철령위

한자 鐵嶺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요령성 철령시  
시대 고려/고려
상세정보
성격 행정 직할지
관련문헌 고려사|고려사절요
비정 지역 철령 이북
정의

고려 말기에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 지역에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 직할지.

형성 및 변천

철령위는 명나라가 1387년(우왕 13) 12월 고려 동북방 지역인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라며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결정하면서 설치되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1388년 2월 고려에 알려졌다. 고려는 유사시를 대비해 전국적으로 성을 수축하고 서북면에 무장들을 증파해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고려는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함흥(咸興)은 물론 그 북쪽의 공험진(公嶮鎭)까지도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서 철령위 설치의 철회를 요구했다.

명나라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보해왔다. 그 뒤 명나라는 요동의 봉집현(奉集縣)에 철령위 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황성(黃城)을 중심으로 민호(民戶)의 초무(招撫)에만 나서고 있었다.

고려의 최영(崔瑩) 등 강경 세력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공요 불가론(攻遼不可論)을 주장하였으나, 우왕은 이를 무시하고 평양으로 전진하여 군사를 징집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영은 조민수(曺敏修), 이성계(李成桂) 등을 각 군의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위화도(威化島)에서 이성계가 회군하면서 중단되었다. 이성계 등은 우왕과 최영 등을 제거하고 고려의 내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건국을 본격 추진해 갔다.

이후 명나라는 더 이상 철령위의 설치를 고려에 거론하지 않았고, 조선이 건국한 뒤 1393년(태조 2에는 봉집현의 철령위 지휘사사도 현 만주의 철령으로 이전하였다. 당초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기 보다는, 고려의 만주 방면 진출을 사전에 저지하고 요동 일대를 확실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이화자, 『한중 국경사 연구』(혜안, 2011)
  • 金龍德, 「鐵嶺衛考」(『중앙대 논문집』6, 1961)
  • 金九鎭, 「公嶮鎭과 先春嶺碑」(『백산 학보』21, 백산 학회, 1976)
  • 박원호, 「鐵嶺衛의 位置에 관한 再考」(『동북아 역사 논총』13, 동북아역사재단, 2006)
  • 박원호, 「鐵嶺衛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한국사 연구』136, 한국사 연구회, 2007)
  • 남의현, 「元·明交替期 한반도 북방 경계 인식의 변화와 성격-明의 遼東衛所와 3衛(東寧·三萬·鐵嶺)를 중심으로-」(『한일 관계사 연구』39, 한일 관계사 학회, 2011)
  • 남의현, 「元末明初 朝鮮·明의 요동쟁 탈전과 국경 분쟁 고찰」(『한일 관계사 연구』42, 한일 관계사 연구회, 2012)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