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경

한자 桴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요녕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창고
정의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인 고구려의 집집마다 있었던 작은 창고.

개설

3세기 중엽의 고구려 상황을 보여주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큰 창고가 없고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부경이라 했다(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 名之爲桴京)고 한다. 부경의 ‘부(桴)’자는 ‘뗏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경(京)’은 ‘곳집’, ‘큰 창고’라는 의미가 있는 글자이다. 따라서 부경은 통나무나 대나무 등을 뗏목 엮듯이 엮어 만든 곳집이나 창고를 의미한다. 고구려고분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2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창고였음을 알 수 있다.

건립 경위

고구려는 겨울철에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 있으므로, 창고를 2층 누각형태로 지어 습기가 직접 닿지 않게 양식을 보관하기 위해 부경을 집집마다 만들었다.

위치

3세기 중엽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요녕성 남부와 길림성 남부, 한반도 북부 지역을 경역으로 하고 있었다. 부경은 이곳에 사는 고구려 사람들의 집에 있었던 창고이다.

형태

고구려부경의 모습은 덕흥리 벽화고분과 팔청리 벽화고분, 마선구 1호 벽화고분에 그려진 창고 모양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고분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부경은 땅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곳간을 만든 2층의 다락식 창고임을 알 수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에는 창고식 건물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는 사람을 그려놓았다. 농작물은 2층에 보관하므로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농작물에 직접 닿지 않게 할 수 있고, 덕흥리 고분 벽화처럼 벽면에 두 개의 창을 내거나, 마선구 1호분 벽화처럼 나무를 발처럼 엮어 벽을 만들어 통풍이 잘 되도록 했다.

현황

1990년대 초반에는 옛 고구려 수도였던 길림성 집안 시내의 만보정고분군이나 우산고분군, 하해방고분군, 마선고분군, 칠성산고분군고구려 고분군들이 있는 곳과 국내성 근처에도 현대판 부경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도시화의 진행으로 시내에서는 부경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축조 재료나 모양에서 약간 변형되기도 했지만, 집안이나 환인 주변의 시골마을에서는 지금도 부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보다 많지는 않지만 동북쪽 돈화의 시골에도 부경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고구려 시기에 집집마다 갖추고 있던 작은 창고인 부경이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존속하는 것은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식문화의 조건이 부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한겨울 환인이나 집안 인근 시골마을에는 쇠그물망으로 벽체를 한 2층의 다락식 창고에 옥수수를 보관하고 1층에 농기구를 놓아둔 부경인 옥미창(玉米倉)이 많이 있다. 거주건물과 별개 구조물로 보온보다는 습기방지와 통풍에 비중을 둔 창고를 둔 것을 보면, 고구려 당시에도 옥수수 등을 주식량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관청인 경부나 신라의 집모양 토기, 일본의 정창원 등의 예를 통해 고구려의 특징적인 창고인 부경이 남부 지역에도 문화적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지(三國志)』
  • 稻葉岩吉, 「百濟の掠及び掠部」(『釋椋』, 1936)
  • 신영훈, 「고구려 부경고」(『건축』15, 1990)
  • 주남철, 「부경고」(『민족문화연구』27, 1994)
  • 신형식, 「고구려의 부경」(『동양학』26, 1996)
  • 신영훈, 『한옥』(대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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