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상 적석묘

한자 樓上 積石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요령성 대련시 감정자구 영성자진 후목성역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적석묘
양식 적석묘
크기 320cm[길이]|205cm[너비]|74cm[높이](1호 묘실)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 성급 문물 보호 단위
조성 시기/일시 고조선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8년 11월 6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10월 10일~10월 13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4년 5월 17일~6월 17일
문화재 지정 일시 1960년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58년, 1963~1964년
소재지 요령성 대련시 감정자구 영성자진 후목성역촌
정의

요령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감정자구(甘井子區) 영성자진(營城子鎭) 후목성역촌(後牧城驛村)에 있는 청동기 시대[고조선 시대]의 적석묘.

개설

누상 적석묘는 요령성 대련시 후목성역촌 부근의 누상(樓上)이라 불리우는 낮은 대지성 구릉 정상부에 있는 적석묘이다. 요동 반도 남단의 후기 청동기 시대 문화인 강상 유형(崗上類型) 누상 단계를 대표하는 표지 유적이다. 1963년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공동 조사하기도 하였다.

위치

누상 적석묘는 요령성 대련시 후목성역촌 북쪽 누상이라 불리 우는 낮은 대지성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강상 적석묘로부터 동남쪽 450m 지점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누상 적석묘는 1958년 가을 대련 제7 중학교(大連 第7 中學校)의 교사와 학생들이 ‘누상’이라 불리 우는 언덕에서 퇴비를 마련하기 위해 언덕 상부의 1m 두께의 황색 사질점토를 걷어낸 후 그 아래에 퇴적되어 있는 0.5~1.5m의 초탄회층(草炭灰層)을 파내려가다 적석묘 묘실 상부의 석재와 함께 비파형 동검 등을 발견하였다. 이에 여순시 박물관(旅順市博物館)이 같은 해 11월 6일 현장을 확인하고 노출된 3기의 묘실을 수습 조사하였다.

이 조사를 기초로 하여 1963년 10월 10일~10월 13일 기간 동안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를 조직하여 시굴 조사를 하였고, 1964년 5월 17일~6월 17일 기간 동안 시굴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가 발굴 조사하였다.

형태

누상 적석묘에서는 총 10개의 묘실이 확인되었는데, 묘역 대부분이 상당 부분 교란 파괴되었으므로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은 묘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파괴가 특히 심한 묘역의 남반부에서 묘실의 존재가 단 한 기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강상과 마찬가지로 대략 둥근 언덕의 정상부 중심부에 돌과 흙을 섞어 묘역을 마련하여 놓았는데, 묘역의 규모는 동서 길이 30m·남북 너비 23m·높이 1.5m 가량이다.

확인된 묘실은 배치 상태·축조 방식·공반 유물을 기준으로 할 때, 3개 부류로 구분된다. 1부류[1~3호]는 바닥부는 물론 벽석과 개석까지를 대형 판석으로 축조한 석실묘로, 묘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묘실은 물론 출토 유물이 다른 부류에 비해 월등한 것을 고려할 때, 누상 적석묘 가운데 상위 묘실로 볼 수 있다.

2부류[4호, 9호]는 1부류 석실묘와 같은 중축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판석저묘(板石底墓)를 말한다. 묘실과 유물에서 1· 2부류의 중간에 해당하는 위상을 보인다.

마지막 3부류[5~8호, 10호]는 묘역 외곽에 배치되어 있는 역석저묘(礫石底墓)로서, 유물 면에서 하위의 위상을 보인다.

출토 유물

누상 적석묘의 1호 묘실에서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 3점, 청동 손칼 1점, 청동 단추 장식 38점, 청동 구슬 3점, 청동 공모양 장식 1점, 청동 장식 1점, 돌 단추 장식 1점, 마노 구슬 1점, 돌공 1점이, 2호 묘실에서는 청동 단추 장식 4점이, 3호 묘실에서는 비파형 동검 4점, 검병 두식(劍柄頭飾) 2점, 세장형(細長型) 도끼 2점, 청동 끌 2점, 청동 손칼 1점, 청동 송곳 1점, 청동 방울 1점, 청동 방패 모양 장식 1점, 청동 호랑이 모양 장식 1점, 청동 단추 장식 12점, 청동 반원형 장식 1점, 청동 장방형 장식 2점, 청동 방형 장식 3점, 청동 원형 장식 1점, 청동 편평형 패식 1점, 청동 고리 3점, 청동 활시위 덮개 1점, 강상형 토기 일괄, 돌 대롱 구슬 4점, 마노 장식 1점 등이 출토되었다.

4호 묘실에서는 마노 구슬 2점, 5호 묘실에서 정가와자형호(鄭家窪子型壺) 1점, 돌 화살촉 1점, 돌 구슬 3점, 숫돌 1점, 6호 묘실에서 비파형 동검 1점, 단령관(短領罐) 1점, 9호 묘실에서 양익 유경식(兩翼有莖式) 동촉(銅鏃) 2점, 청동 단추장식 1점, 청동 패식 2점, 청동 팔찌 1점, 돌 화살촉 6점, 돌 구슬 10점, 마노 구슬 4점, 돌 드림 장식 3점, 숫돌 1점, 10호 묘실에서 청동 끌 1점, 돌 가락 바퀴 1점이 출토되었다.

현황

누상 적석묘는 발굴 조사 후 주민들의 생업 활동 등으로 인해 계속 파괴되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의의와 평가

누상 적석묘는 요동 반도 남단의 후기 청동기 문화인 강상 유형 누상 단계를 대표하는 표지 유적이다. 누상 적석묘는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과 연관이 있는 십이대영자형 정가와자식[AIII식] 비파형 동검·청동 호랑이 모양 장식·정가와자형호 등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누상 적석묘 적석부 상부 퇴적층에서 명도전(明刀錢)·철낫·니질(泥質) 회색 토기 등의 전국연문화(戰國燕文化)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원전 5~4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요동 반도 남단 지역은 기원전 3세기 초 전국연 문화와 토착계 문화인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변모되는데, 이 시기에 강상형 적석묘의 축조도 완전히 중단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누상 적석묘는 강상형 적석묘의 마지막 단계의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정배, 『한국 민족 문화의 기원』(고려 대학교 출판부, 1973)
  • 오강원,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청계, 2006)
  • 金貞培, 「韓民族의 起源과 國家 形成의 諸問題」(『국사관 논총』 1, 국사편찬위원회, 1989)
  • 오강원, 「東北亞 地域 扇形 銅斧의 型式과 時空間的 樣相」(『강원 고고 학보』 2, 강원 고고 학회, 2003)
  • 오강원, 「琵琶形 銅劍~細形 銅劍 T字形 靑銅製 劍柄의 型式과 時空間的 樣相」(『한국 상고사 학보』 41, 한국 상고사 학회, 2003)
  • 오강원, 「遼寧 地域의 靑銅器·初期 鐵器 時代 複合 社會의 形成과 社會 變動」(『先史와 古代』 38, 한국 고대 학회, 2013)
  • 오강원,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북한 지역 물질 문화의 전개와 고조선」(『동양학』53,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2013)
  •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 「누상」(『중국 동북 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1963~1965]』,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6)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