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泊汋城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산성 |
|---|---|
| 관련인물 | 소부손|고문|설만철|배행방 |
| 조성|건립 시기/일시 | 고구려 시대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0~1993년 |
| 현 소재지 |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 |
단동시의 압록강 관광 자원 개발 과정에서 이 일대의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던 중 명대(明代) 만리장성 동단 기점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하부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었다. 장성 동단기점 유구 조사 과정에서 거대한 석축 우물지를 발견, 조사 결과 고구려의 것으로 판정되었다.
우물 내벽 직경은 4.4m, 바닥에서 지표까지의 깊이는 23m. 우물은 원형으로 그 북쪽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차단하고 흙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긴 벽을 축조하였으며, 우물의 둘레는 돌로 쌓아 반원형의 배수구를 둘렀으며, 물을 길어 산 위로 왕래 하기 위해 2개의 돌계단을 쌓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우물의 가장자리는 돌로 타원형의 벽을 쌓았는데,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고 견고하다. 바깥으로 너비 2m의 구조를 한 줄 둘렀는데 그 안에는 가는 모래와 강자갈로 채워 물을 여과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각종 유물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는데, 길이 3.7m에 이르는 나무배와 노, 삿대, 통, 구유, 목제완, 널빤지, 바가지, 철제 저울추, 철제 갈고리, 회색 단지, 손잡이가 2개 달린 큰 항아리 등이었다.
호산 북면 정상부 가장자리의 수풀이 무성한 곳, 그 토층 하부에서는 쐐기형 돌로 축조한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 끊어진 곳도 있지만 산 둘레의 반 바퀴 정도로 600m 정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장성 유적의 조사에 주목적이 있던 조사 결과여서 산성의 전모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어떤 구간은 상당히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여기에 근거하여 산성의 둘레 길이는 약 1,200m라고 추정되고 있다. 성벽의 안팎 면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쌓았고,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아 채웠다. 석축 성벽에서는 찰갑 조각, 화살촉, 투겁창, 단지, 솥, 도끼 등 각종 철제 유물이 나왔다. 호산 정상부에서는 청동기 시기, 한대, 고구려, 요금(遼金), 명대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게 발굴되었다.
박작성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어, 애하 건너편의 애하첨 고성지와 함께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 형태를 보여준다. 이에 압록강 하구에 위치했던 것으로 문헌에 기재된 박작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이었다. 압록강 남쪽의 의주(宜州)백마 산성(白馬山城)과 함께 압록강 방어의 주요 성곽이었다고 보인다.
648년 당(唐)의 설만철(薛萬徹)과 배행방(裴行方)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건너와 공격, 이들은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기 1만으로 막았으나 패하여 퇴각하였다. 당군이 박작성을 포위했으나 지형이 험준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과 안시성(安市城) 등의 군사 3만 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으나 패하였다.
현재 호산 남쪽에는 호산 장성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고구려 우물은 메워졌으며 명(明) 장성유적에 앞서 고구려의 산성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대신 호산 산성을 명대 장성의 동쪽 기점이라 평가하고 여기에 벽돌로 쌓은 명대 장성을 복원하여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박물관의 좌측으로 산 사면에서 고구려 성벽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