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羅德憲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 지역 | 요령성 |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 성격 | 무신(武臣) |
|---|---|
| 성별 | 남 |
| 본관 | 나주(羅州) |
| 대표관직 |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
| 출생 시기/일시 | 1573년(선조 6) |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선조 36) |
| 활동 시기/일시 | 1619년(광해군 11) |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인조 2) |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인조 13) |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인조 14) |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인조 15) |
| 몰년 시기/일시 | 1640년(인조 18) |
| 유배|이배지 | 평안북도 의주군 |
| 사당|배향지 | 광주 광산구 월계동 510 |
|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4-2 | |
| 전라 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
조선 후기 심양(瀋陽)에서 열린 황제 즉위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하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구타와 회유를 받은 무신.
나덕헌은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1619년(광해군 11) 북도 방어사 겸 길주 목사(北道防禦使兼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로 참여해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1635년(인조 13)에는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 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홍타이지가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였는데, 나덕헌은 경축 행사의 반열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구타를 당했다. 관소(館所)에 구금되었다가 다음 날 청나라가 조선에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당시 나덕헌은 청나라 황제의 국서 내용을 보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으나, 청나라에서는 짐에 함께 넣어 100여 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하였다.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나덕헌이 청나라 황제의 하례식에 참석하였다고 하여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다.
1636년(인조 14) 9월에 오해가 풀려 석방되어 전라도 나주로 내려가 생활하였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인조 15) 6월에 삼도 통어사로 발탁되었고, 이어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나덕헌의 시문집으로 『장암유집(壯巖遺集)』 7권 3책이 전한다. 문집에는 춘신사로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면서 기록한 「북행 일기(北行日記)」와 삼도 통어사 때의 기록인 「통어영록(統禦營錄)」 등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