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高麗 對外 關係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려/고려 |
고려가 건국 이후부터 다른 국가들과 대외적으로 맺었던 관계.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중국 5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이에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 정책을 썼으나 북방 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 정책을 취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대륙은 고려[918~1392]와 북송(北宋)[ 960∼1127] 간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북방 유목 민족 국가인 요(遼)[907∼1125]와 금(金)[1115∼1234]의 직·간접 영향 아래 유지되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들 북방 유목 민족에게는 송과 고려가 경제적 욕구 충족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정치 외교적 상황에서 고려는 요와 금에 대해 평화 유지 방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0세기 초 당의 멸망 이후 거란족에 의해 세워진 요가 중원의 송을 압박하고, 12세기 초에는 다시 여진족이 흥기하여 요·송을 아우르는 금이 건국 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바뀌었다.
중국 대륙의 정세 변동은 때로 직접적인 군사적 침입을 수반하여 고려의 내정에 변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 민족이 일어나 송나라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고가 침입했을 때는 고려에서는 최씨 무신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 정책은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 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다.
13세기 말, 원 제국의 성립은 이전의 거란·여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사의 흐름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또한 14세기 후반 원 제국의 몰락은 고려와 중국, 만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체 사회를 격동과 전쟁의 시기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14세기 중반 중국에서 반원 운동이 일어나자, 공민왕은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쌍성 총관부와 압록강 유역의 실지를 회복함으로써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고려는 홍건적 침입으로 원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확인하고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원나라와 단교하고 명나라와 통교했다.
공민왕과 명나라 사신이 피살되자 고려와 명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우왕 초기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이 친원 정책을 추구하여 원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했다. 그 뒤 1385년(우왕 11)에 이르러 명나라의 사신이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다.
하지만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하면서 고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최영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신흥 유신들과 연결하여 친명의 입장에 섰던 이성계 일파는 이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최영 등을 축출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외교 관계를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갈등은 끝을 맺었다. 14세기 이후 다시 북방 유목 민족을 몰아내면서 명과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고 15~16세기 동아시아의 안정기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