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高句麗 城郭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조선 |
길림성(吉林省)과 요령성(遼寧省), 한반도 일대에 분포하는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성곽.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성을 축조하여 도성으로 만들었다. 3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교통로를 따라 주요한 전략요충지에 성을 쌓아 군사방어의 거점 및 지방통치를 위한 치소(治所)로 삼았다. 성을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지역 주민들을 지배하는 행정 관청으로 기능했다. “요동이나 현도 등 수십기의 성에 모두 관사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고 하는『주서(周書)』의 기록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4세기 이후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은 더 많이 축조되었다. 고구려 멸망 당시 “5부 176성 69만7천호”였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 보이듯 성은 고구려 전역의 중요 지점에 조성되었다. 고구려 성은 중국 동북지역의 요령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북한 지역, 그리고 남한 일부 지역에 분포한다. 지금까지 중국에 150기 이상, 북한에 50여 기, 남한에 50여기 정도의 고구려 산성이 확인되어, 『구당서』에 기록된 숫자를 능가한다. 이로 보아 사서에 기록된 176기는 지방통치단위로서의 성만 거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6~7세기 고구려에서는 제대성(諸大城)-제성(諸城)-제소성(諸小城)·성(城)으로 지방통치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고구려 성의 숫자가 176기보다 많은 것은 지방행정조직 단위가 아닌 소규모의 보루성 숫자까지 모두 포함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에 있는 고구려 산성은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하천이나 계곡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쐐기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이용, 견고하게 조성되어, 고도의 건축기술과 강한 군사력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구려 성은 입지 조건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으로, 성의 축조 재료에 따라 토성·석성·토석 혼축성, 목책성 등으로 나뉜다. 판축토를 쌓아 축조한 토성은 판축토를 쌓아 축조한 토성은 같은 평지성이 이에 해당되지만, 심양(瀋陽) 탑산산성(塔山山城)이나 요원(遼源) 용수산성(龍首山城)처럼 중대형 포곡식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석성은 다수의 고구려 산성이 이에 해당하는데 쐐기형 돌로 축조한 석성과 판축 후 바깥쪽에 돌을 덮는 석성으로 나뉜다. 토석혼축성은 무순(撫順) 고이산성(高爾山城)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과 노변장관애(老邊墻關隘)을 예로 들 수 있다. 목책성은 목책을 2열로 설치하여 성벽으로 삼은 성으로 남한에서만 발견되며, 청원 남성골산성과 연천 호로고루, 안성 도기동 산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성의 시설로는 성문과 성벽, 배수시설인 수구(水口) 등이 있다. 그리고 성벽에는 마면[치]과 여장, 성벽이 꺾이는 곳에 세운 각루 등이 있고, 성 내부에는 장대나 망대, 저수지나 우물, 샘 등과 건물터와 병영터 등이 있다. 성의 둘레에는 해자를 돌리거나 참호를 파기도 하여 방어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특히 4세기 이후의 성들에서 잘 보인다. 4세기 이후의 성들은 구릉의 사면과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아서 성 내외로 출입이 편할 뿐 아니라 성 내부가 넓어서 적이 침입하게 되면 성으로 들어가 농성(籠城)을 하는 요새가 되기도 한다.
광개토왕비에는 “추모왕은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산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고구려 유적의 분포상황으로 보아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에 있는 오녀 산성(五女山城)이 그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오녀 산성(五女山城) 안에서 연못과 건물지, 병영 터 등이 확인되었다. 오녀 산성(五女山城)은 높은 산 정상에 조성되었으므로 방어에는 최적이나 평상시 국정을 운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평지에 홀본, 즉 졸본성(卒本城)이 있어 평상시에는 국왕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나라를 다스렸고, 적의 침공이 있을 때 산성인 흘승골성(紇升骨城) 즉 오녀 산성(五女山城)으로 들어가 항전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도성은 초기부터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구성되었다고 보면서 하고성자 토성을 평지 도성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 성은 광개토왕비문에 서술된 내용과 방향이 맞지 않는다. 이에 오녀 산성(五女山城) 동쪽에 있는 나합성(喇哈城)을 평지도성으로 보았지만 조사 결과 고구려 초기에 조성된 성이라 볼 수 없다는 견해가 나왔다. 최근에는 초기 고구려 도성이 평지성과 산성이 조합된 것이 아니라 산성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또 국력이 약했던 고구려 건국 당시에는 대규모 노동력과 재력을 투입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평상시 거점에 성곽을 축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나왔다. 초기에는 산상의 군사 방어성이 평상시 거점보다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오녀산 동쪽, 대규모 고구려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부근의 수몰지구를 졸본의 평지 거점으로 보았다.
고구려의 두 번째 왕도는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으로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이다. 집안 지역은 통구 분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로서, 기원전후 무렵부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왕도였다. 국내성 도읍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도성이 구성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평상시 도성인 국내성은 통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에 둘레 2.7㎞ 규모로 조성된 석성으로, 발굴조사 결과 성 내안에서 궁전터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적군 침입시 입보하는 산성은 국내성 서북 방향으로 2.5㎞에 떨어져 있는 환도 산성(丸都山城)으로 보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환도 산성에서는 성 내에서 왕궁지로 비정되는 한 변 90여 m의 대형 건물지와 팔각형 건물지 두 기, 점장대, 병영터, 연못 등이 확인되었다.
평양성 시기의 도성으로는 대성 산성(大城山城)과 안학궁(安鶴宮) 및 평양성(平壤城)이 있다. 대성 산성은 6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포곡식(包谷式) 석성으로 둘레 7㎞ 정도이다. 대성산성에 대응되는 평지 왕성으로는 안학궁이 지목되었지만 출토 기와의 연대가 늦고, 고구려 석실분 위에 성벽이 축조되었기 때문에 천도 직후 조성된 평지 도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안학궁보다 조성 시기가 이른청암리 토성(淸巖里土城)이 천도 직후의 궁성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고구려 말기의 도성은 북성과 내·외·중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석성인 평양성이다. 평양성은 양원왕(陽原王) 8년[552]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평원왕(平原王) 28년[586]에 완성되었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으로 나눠져 있던 도성을 하나로 합치고 외성을 쌓음으로써 방어력을 강화하고 운영의 편리성도 도모한 도성이다.
고구려 지방 각지에는 크고 작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산성은 4세기를 기준으로 전기 성과 후기 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의 산성은 주로 산 정상부에 축조했으며,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을 천연 성벽으로 삼았고, 방어력이 약한 일부 구간에만 쐐기형 돌을 이용하여 층마다 안으로 견고하게 들여쌓았다. 가장 대표적인 성으로 환인의 오녀산성과 그 외곽에 분포하고 있는 중국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의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과 흑구산성(黑溝山城)을 들 수 있다. 전기의 성들은 이후 시기에 축조된 산성들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인데, 험준한 산 정상부에 성을 축조한 이유는 아직 군사력이 외적, 특히 한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방어력 강화가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전기에 많이 조성된 또 다른 성으로는 도성 방위를 주목적으로 하는 관애들이다. 관애는 환인(桓仁), 집안(集安), 신빈(新賓), 통화(通化) 등에 집중 분포하여서 도성 방위를 주목적으로 하여 교통로를 차단하는 차단성과 군사적 초소로서 기능하였다.
후기의 성은 확대된 고구려 전 영역에 분포한다. 구릉의 사면과 평탄지를 연결해 축조하여 평상시 거주성과 방어의 기능을 겸하였다. 성내 출입이 용이하도록 성문은 평지나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하며, 높은 곳에는 장대를 세워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대형 산성은 내·외성으로 이루어지거나 보조성을 갖는 등 복합식이 많다.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전국에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민에 대한 지배를 직접 수행하게 되면서 산성의 규모가 이전보다 대형화되었다. 후기의 성은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대형 성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중형, 소형 성들을 배치하여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지역지배를 담당하는 행정 치소로서의 기능과 전쟁시 주민을 입거시켜 농성하며 전쟁하는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