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石棚山 支石墓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요령성 영구시 개주시 이대향 석붕촌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지석묘 |
|---|---|
| 양식 | 탁자식 지석묘 |
| 크기 | 860cm[길이]|590cm[너비]|55cm[두께](상석) |
| 문물|보호단위등급 | 중국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 |
| 조성 시기/일시 | 고조선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890년대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0년대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3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대 |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
| 문화재 지정 일시 | 최근 |
| 소재지 | 개주시 이대향 석붕촌 |
요령성(遼寧省) 영구시(營口市) 개주시(蓋州市) 이대향(二臺鄕) 석붕촌(石棚村)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석붕산 지석묘는 요령성 영구시 개주시 석붕촌의 부도하(浮渡河) 북안 독립 구릉 정상부 평탄 대지에 있는 대형 탁자식 지석묘이다. 상석 크기를 기준으로 할 때 요령성을 포함한 중국 동북 지역의 지석묘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여 일찍부터 동아시아 학계에서 주목을 받아 왔다.
석붕산 지석묘는 요령성 영구시 개주시 이대향 석붕촌 남쪽 500m 부도하 북안의 평면 타원형 독립 구릉[석붕산, 지표 높이 20여 m] 정상의 평탄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석붕산 지석묘에 대해서는 1890년대 일본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지표 조사를 하였다. 이후 1930~1940년대 여러 명의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답사 수준의 조사를 하였다.
1950년대 중국개현 문물 관리소(盖縣文物管理所)가 1차 지표 조사하였고, 1973년 중국요령성 문물보사대(遼寧省文物普査隊)가 처음으로 정밀 실측 조사를 하였다. 이후 1980년대 요령성 문물 고고 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여순시 박물관(旅順市博物館)·영구시 박물관(營口市博物館) 등이 수차례 지표 조사와 실측 조사를 하였다.
석붕산 지석묘의 상석은 평면 장방형으로 장축 방향은 남북이다. 지석묘의 길이는 8.6m, 너비 5.9m, 두께 0.55m이다. 묘실은 길이 2.75m, 너비 2.1m, 높이 2.33m[실내 기준]에 이른다. 상석·벽석·바닥석의 치석 또한 물매질까지 해 놓을 정도로 정성들였고 조립 상태 또한 정교하다.
석붕산 지석묘는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출토 유물은 없다. 지표 조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유물의 수습은 없었다. 전근대부터 도관이 들어서는 등 개발 아닌 개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석붕산 지석묘는 일찍부터 민속 신앙 대상이 되어 왔다. 늦어도 19세기부터는 도관[고운사(古雲寺)]의 주존 신상[지장왕, 남해관음대사, 관음보살]을 모시는 석실로도 활용 되었다. 석붕산 지석묘 주변의 주민들이 석붕산 지석묘를 ‘석붕묘(石棚廟)’·‘석묘자(石廟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주변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독립 구릉 정상부에 대형 탁자식 지석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16세기 중반 이후의 요동과 관련한 모든 지리지류에 주요한 기술 대상으로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이다.
지석묘의 상석과 벽석 등에는 운반과 조립과 관련된 홈과 표시가 군데 군데 남아 있다. 묘실의 조립은 ‘ㅠ’자형으로 특이하다. 상석 상면 서남부에 사람 얼굴 모양이 음각 되어있고, 동쪽 벽석 내면 후단부의 중간 조금 위쪽에 범문으로 보이는 2개의 글자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하게 음각 되어 있는데, ‘고운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