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國 보따리 장사 |
|---|---|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상업 활동 |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전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 관할 지역 | 산동성 위해시 |
| 관할 지역 | 산동성 연대시 |
중국 한인[조선족]이 보따리 짐을 챙겨 한국으로 들어가 돈벌이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1980년 중반부터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 전역에서 장사 바람이 크게 일었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 한인[조선족]들이다. 이에 한인[조선족]의 상업 경영 활동은 보따리 장사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개방의 문이 열리자, 일부 한인[조선족]들은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들을 ‘조선족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동네 밖에서 김치, 짠지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이 만든 냉면, 찰떡, 김치, 개고기는 한인[조선족] 음식 중 ‘네 가지 보물’로 인정받아 여러 민족들의 환영과 주목을 받았다. 조선족 아주머니들은 이 브랜드로 중국 전역으로 진출하였다. 인구가 200만 명도 안 되는 한인[조선족]들은 너도나도 중국 전역으로 진출하였다. 그 뒤 보따리 장사는 중국 국내에서 국외로 퍼져 나가면서 해외 진출이 붐을 이루었다.
한인[조선족]들은 초기에는 이웃 나라인 북한, 러시아를 상대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경영 활동 방식은 주로 ‘보따리 장사’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친척 방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외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용 소비품과 중국 의약품, 보건 식품을 내다 팔고 귀국할 때는 중국 주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 등 생활 물자를 가져다 넘겨 이윤을 남겼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한국 문이 열리면서 조선족들은 대외 장사의 방향을 한국으로 돌리면서, 1994년 이후 러시아 붐은 가라앉았다. 한인[조선족]들은 카페리호로 인천~옌타이[煙臺] 간을 월 4~5차례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히였다.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 직후에는 중국 보따리상들이 5,000~6,000명에 달해 카페리 항로들을 가득 채우다시피 했었다. 한인[조선족]들은 한번 한국에 다녀오면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재미에 피곤한 줄도 몰랐는데, 최근 몇 년간 사정이 너무도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인천~중국 간에는 1990년 인천~웨이하이[威海] 간에 처음으로 항로가 열린 이래 모두 10개의 카페리 항로가 개설돼 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 카페리에는 보따리상들이 전체 승객의 70~80%를 차지하는 등 경기가 좋아 인천항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인천항은 한국 보따리 장사의 주요한 경로지였다. 한인[조선족]들을 포함한 보따리상들은 주로 이 경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2013년 1월 기준 인천항 여객 터미널에 따르면 2012년 인천~중국 간 10개 항로의 여객선 이용객은 총 98만 4713명으로 2011년 104만 3230명에 비해 5.6% 감소했다.
이용객이 줄어든 이유는 중국 세관 당국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중국에서 농산물을 사가지고 국내에서 판매하는 소무역상이 줄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소무역상은 2011년 46만 4802명에서 지난해 31만 4920명으로 32%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