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 아리랑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민요 |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6년 |
| 1978년 |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11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대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 한인[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을 비롯해 산동성, 내몽고 등 중국 일대의 한인[조선족]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아리랑.
조선족 아리랑은 한반도에서 생성되고 유행한 아리랑이 조선인의 이주와 함께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형성된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가족과 마을 단위로 만주 땅에 정착한 조선인은 가급적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고향 특유의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왔다.
민족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 가운데 하나인 아리랑은 마을마다 출신 지역별로 독특하게 형성되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설움과 회포를 풀어주는 도구로 자리를 잡았다. 한인[조선족]의 힘겨웠던 삶만큼 아리랑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수난과 질곡의 과정을 겪은 시대의 흔적들로 점철되어 있다.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으로 통하는 한인[조선족]은 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가무(歌舞)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리랑을 꼽는다. 아리랑은 생활 곳곳에서 옛 모습 그대로 전승되거나 대중가요로 창작되어 불리고 있으며, 한인[조선족] 생활 주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중국 문화권 내에서 민족 음악 예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해 나가는 가운데 가극이나 문학작품 등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기도 하였다. 지금도 아리랑은 숱한 좌절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온 한인[조선족]을 하나의 고리로 엮는 노래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족 아리랑은 1860년대 이후 조선인이 자연재해를 피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 지방에 몰려들기 시작한 시기에서부터 1910년대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시기, 193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한 집단 이주 시기까지 거의 모든 시기를 거치며 전승되었다. 이주민들 중에는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귀담아듣고 배운 민요, 그 가운데 아리랑을 자신이 정착한 마을에서 불러 되살렸다.
중국 조선족 마을을 출생지 별로 보면 대체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접어놓은 형태다. 비교적 일찍 이주를 한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고향 땅과 가까운 두만강이나 압록강 건너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요령성의 강 유역 쪽에 주로 정착했는데 반해 뒤늦게 이주를 한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 사람들은 연변보다 북쪽에 있는 흑룡강성 내륙 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하나 조선족 민요인 아리랑의 지역별 존재 양상도 크게 보아서는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두만강 연안인 연변 일대와 흑룡강성 목단강 일대는 함경도 민요, 압록강 연안인 요령 일대는 평안도 민요, 길림성 장춘 지구와 길림지구, 흑룡강성 대부분의 지역은 남도 민요가 분포하고 있다. 민족문화를 대표하는 유산 가운데 하나인 아리랑도 마을마다 출신 지역별로 독특하게 형성되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설움과 회포를 풀어주는 도구로 전승되었다.
동북 3성의 한인[조선족] 사회는 1982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한반도를 떠나 동북에 정착한 이래 100년이 넘게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말과 글, 전통문화와 풍속을 지켜오면서 삶을 영위해온 한인[조선족]은 본래의 집단 거주 지역인 농촌을 떠나 북경, 청도, 천진, 하북, 산서 등지의 도시로 이주했다. 특히 1999년 12월 한국 정부가 재외 동포법을 제정하면서 한인[조선족]의 한국 취업이 본격화되자 50만 명에 이르는 한인[조선족]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이주했다.
한인[조선족]의 재이주는 마을의 공동화(空洞化)로 이어져 출신지가 다른 지역의 이주민들이 유입되거나 한족과 만주족 등 이민족의 유입을 초래했다. 마을의 해체와 함께 불어 닥친 문화적인 환경 변화는 이주 이후 정착된 조선족 민요 아리랑의 지역별 존재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민족의 이주와 함께 전해진 아리랑은 우리와는 다른 체제 속에서 민요와 신민요 아리랑으로, 항일 저항가로, 새로운 창작 가요로 발전하며 뿌리를 내렸다.
초창기 이주민들이 부른 아리랑은 조선 시대 후기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구아리랑˃이었으나,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알려지면서 신민요 ˂아리랑˃과 지역별로 전승되던 아리랑이 전해져 널리 전파되었다.
이주 1세대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후손들에게 전승된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청주 아리랑˃ 등은 지금도 잔치 때나 유희의 공간에서 널리 불리는 아리랑이다. 그러나 이주 1·2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몇몇 대표적인 아리랑을 제외하고 많은 아리랑이 사라져 문헌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한인[조선족] 역사만큼 깊게 뿌리내린 ˂아리랑˃은 여러 아리랑 가운데 대표 아리랑으로 음조와 음색, 창법의 변화를 수용하며 전승되기도 하였다. 가사나 가락이 변형되어 ˂독립군 아리랑˃과 같은 항일 저항가나 ˂장백의 새아리랑˃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아리랑으로 재창작되어 문학이나 가극 등 다른 장르로 확산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했다. 이러한 유형과 장르의 확산은 아리랑이 한인[조선족]의 대표적인 노래로 다양하게 전승되는 바탕이 되었다.
한인[조선족]의 역사와 애환을 담아 새롭게 창작된 아리랑은 195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민요풍의 가요로 발전해 가사뿐만 아니라 선율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넓은 범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종류만도 무려 100여 종에 이른다.
이주 1세대의 아리랑에는 불모지를 개간해 힘겹게 살아온 한인의 삶과 귀향의식, 일제 강점기와 광복의 역사적 감회가 드러나는 데 반해 중국 땅에서 태어나 자란 후손이 부르는 아리랑에는 귀향의식이 사라지고 문화대혁명 등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자긍심과 애정이 표출되어 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유입된 조선족 아리랑은 1945년 일제의 패망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의 양상을 띤다. 광복 후 아리랑은 슬픔과 탄식을 바탕으로 한 전통 민요풍에서 서서히 벗어나 민족의 활달한 기상을 일깨웠다. 초창기 항일 아리랑에 나타난 ‘아리랑 고개’는 ‘울며 넘는 피눈물의 고개’, ‘쪽바가지 차고 넘던 고개’, ‘탄식의 고개’, ‘그리움의 고개’였으나 해방 이후에는 ‘기쁨의 고개’가 되어 해방된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심정과 염원을 반영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한인[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에서 땅을 분배받은 기쁨을 노래한 ˂새아리랑˃은 밝고 명랑한 가사와 선율로 해방된 기쁨과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로 이전의 슬픔이나 탄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새아리랑˃은 중국 조선족 음악에서 신민요 발전의 토대를 구축한 아리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리랑은 1960년대에 이르러 수난기를 맞기도 했다. 그 원인은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에 있다. 이 시기에는 노래로 모택동(毛澤東)의 어록에 곡을 붙인 어록가(語錄歌)와 숭배가(崇拜歌)만 불러야 했다.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는 전면 부정되었기 때문에 아리랑은 물론 민족적인 색채를 담고 있는 노래와 문학작품 등은 ‘잡귀신’으로 취급받아 자취를 감추었고, 많은 민족 음악가들이 터무니없는 죄명을 쓰고 음악 무대에서 사라졌다.
10여 년간의 암흑기를 지나 1978년부터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압제당했던 한인[조선족]의 전통문화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문화대혁명의 아픔을 극복하면서 한인[조선족]의 심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민요 아리랑도 다시 생활 곳곳에서 전승되었다. 이 시기 한인[조선족] 예술가들은 전통민요 뿐만 아니라 아리랑을 수집해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사회주의 음악적 특징을 더해 아리랑을 가극 등의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전통민요를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한 민요풍의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인[조선족]의 기상과 정서를 담은 ˂장백의 새 아리랑˃, ˂아리랑련곡˃, ˂내고향 아리랑 총각˃ 등은 이때 나온 노래들이다. 2000년대 들어 조선족 가요 창작이 새로운 부흥기를 맞으면서 한인[조선족]의 삶을 담은 많은 아리랑이 쏟아지게 되었다. 이들 아리랑은 ˂백두 아리랑˃, ˂진달래 아리랑˃ 등 조선 민족의 상징을 노래하거나 ˂새아리랑˃, ˂희망 아리랑˃ 등 한인[조선족]의 정서를 노래하는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한인[조선족]이 머무는 도시는 또 다른 아리랑의 주제가 되는데, ˂연변 아리랑˃, ˂청도 아리랑˃, ˂동녕 아리랑˃ 등에는 중국 땅에서 한인[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자긍심이 강하게 드러난다.
2000년 이후 창작된 아리랑에서는 과거 설움과 한(恨)으로 여겨진 ‘아리랑 고개’, ‘오랑캐령’이 이제는 더 이상 넘기 힘든 고개가 아니라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희망의 분수령으로 경쾌하게 노래되고 있다.
한인[조선족]의 시대적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아리랑은 지금도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 연변음악가협회의 기관지인 『연변 음악』에는 매 호마다 아리랑을 제목으로 한 창작가요를 비롯하여 1백여 곡이 넘는 가요와 동요가 실리고 있다. 여기에 실린 아리랑은 라디오와 방송,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한인[조선족] 사회는 물론 중국과 한국 등지로 퍼져가 조선족 음악의 저변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아리랑은 가요뿐만 아니라 가극과 연극, 문학, 드라마,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끊임없이 확산되면서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중국에서 한인[조선족]이 아리랑을 통해 한인[조선족] 문화 예술의 위상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던 작품으로 1991년 가극 「아리랑」과 2006년 대형 음악 무용 「천년 아리랑」이 있다.
1990년 11월 호남성 주주시에서 열린 전국 가극 공연에서 연변 가무단은 한인[조선족]의 민간 전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식으로 창작한 가극 「아리랑」을 공연해 우수극 목상을 받았고, 민족과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여 황홀한 매력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2006년 9월 제3회 전국 소수 민족 문예 공연에 참가해 최고 대상을 받은 연변 가무단의「천년 아리랑」은 한인[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무대에 올린 3막으로 구성된 가무극으로 북경과 장춘 등 공연하는 곳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천년 아리랑」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성공을 거두자 2007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천년 아리랑」을 ‘가무의 고향’ 연변의 관광 브랜드로 삼고 경제 사회 발전 전략의 하나로 추진하기 위해 ‘문화 강주’ 계획 속에 포함했다. 그리고 2009년 새 중국 성립 60주년 기념으로 대형 가무 「장백산 아리랑」을 제작해 북경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고 전국 순회 공연을 했으며, 2010년 상해 엑스포 전시 공연에 참가해 국내외 관람객들의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도 이미 이 공연을 국가 무대 정품 종목으로 신청했다. 최근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아리랑을 바탕으로 연변을 ‘가무의 고향’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한인[조선족] 문화 예술계에서도 아리랑을 한인[조선족] 문화 보전의 상징으로 여기며 전승 보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 삼성에 주로 거주하던 한인[조선족]은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에 따라 1990년대 이후 중국 전역 대도시로 넓게 퍼져가고 있다. 한인[조선족] 거주지도 흑룡강성, 길림성에서부터 요령성, 산동성, 해남성(海南省)에 이르는 S자 모양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중국 한인[조선족]의 역사 문화 중심지인 용정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서 조차도 이미 많은 한인[조선족]들이 떠났고 그 자리를 한족이 채우고 있다. 부모가 일자리를 찾아 중국의 대도시,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러시아 또는 미국, 유럽 등지로 떠난 후 한인[조선족]이 거주하던 농촌은 한족이 거주하는 마을로 바뀌고, 각급 조선족 학교의 80%가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우리말을 잃게 되었는데, 이는 민족문화의 소멸과 한족으로의 동화(同化)로 이어지고 있다. 한인[조선족]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집단 거주 지역이 무너지면서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던 문화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거대한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풀이되는 한인[조선족]의 위기 앞에 아리랑이 전승 위기에 직면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2011년 6월 중국 정부가 조선족의 아리랑을 중국 국가급 비물질 문화 유산(國家級非物質文化遺產)으로 등재했을 때 한인[조선족]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모두가 크게 반긴 것도 이러한 현실에 대한 우려가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2020년에 이르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인[조선족] 비율이 10%대에 그칠 것이라는 통계 지표가 나오자 한인[조선족] 문화 예술계는 민족문화의 소멸을 우려해 아리랑을 비롯한 혼례, 씨름 등 유무형의 유산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에 힘쓰고 있다. 아리랑을 비롯한 판소리 등 무형 문화유산 등재를 서둘러 신청한 주체도 다름 아닌 한인[조선족]이다. 한인[조선족] 학계와 예술계에서는 중국이라는 다민족(多民族) 다원화(多元化) 문화권 속에서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문화의 등재가 한인[조선족]의 정체성을 지켜 가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인[조선족] 예술가들은 민족의식이 약해 말을 잃고 전통도 잃고 마침내 민족까지도 잃어가는 만주족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조선족은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민족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인[조선족] 문화 예술계에서는 지금도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문화의 전승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아리랑 공연, 아리랑 가사 창작, 아리랑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아리랑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과 콘텐츠 육성에 몰두하고 있다. 한인[조선족] 교육계와 문화 예술계에서는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거론하는가 하면 다양한 장르를 통해 아리랑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아리랑은 가사 창작, 가극과 연극, 문학, 드라마, 미술 등 각 장르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가 하면 생활 주변에서 아리랑을 표상한 상호 등이 다양하게 넘쳐나고 있다.
한인[조선족]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이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지로 들어선 지 15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아리랑은 지리적, 기후적 조건이 다른 해당 지역의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면서 오랜 세월 나름대로 한인[조선족]의 특색을 담아 발전해왔다.
한인[조선족]이 살아가는 마을은 아리랑의 이주 공간이기도 하다. 한인[조선족]이 살아가는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그 마을을 개척하고 지켜가는 구성원들이 어디에서 들어왔으며, 어떤 종류의 아리랑이 전승되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38년 청주시와 옥천군 등지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세운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에는 ˂청주 아리랑˃이 전승되고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군 출신의 이주민들이 많은 흑룡강성 노가기향 신성촌에서는 ˂영천 아리랑˃이 전승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이 많은 요령성 심양시 소가둔구 일대에서는 ˂밀양 아리랑˃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전라도에서 온 이주민들이 개척한 흑룡강성 연수현 중화진 민광촌과 요령성 신빈현 홍묘자향 장영자촌에서 전승되는 민요는 ˂진도 아리랑˃이다. 1990년대 후반 마을이 해체되었지만, 길림성 안도현 삼도향 쪽에 있던 남도 마을과 북도 마을 등 전라도 마을에서 들을 수 있던 민요도 ˂진도 아리랑˃ 등과 같은 남도민요였다.
아리랑은 한인[조선족] 집거지역에서 고향의 민요로 존재하며 지금도 여전히 마을의 정체성(正體性)을 지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청주 아리랑˃이 불리는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이나 ˂경상도 아리랑˃이 불리는 영안시 발해진 등 흑룡강성의 많은 경상도 마을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암촌은 시골 지역이라 오랫동안 다른 지역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고, 정암촌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충청북도 사람들 역시 한족(漢族)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이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한 지역적 유대감으로 지금까지 그들만의 생활과 문화를 보존해올 수 있었다. 흑룡강성 지역도 경상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그들만의 언어 습관이나 노래를 지켜갈 수 있었다. 이 마을들은 이주 1세대를 넘어 2세대와 3세대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일찍이 정착한 선대(先代)로부터 생활 방식 내지는 일종의 귀향 의식을 물려받아 아리랑을 통해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가 있었다. 지금도 마을 잔치 때에는 주민 모두가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에 한족 등 이민족의 유입과 한인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이질 문화를 수용한 마을은 이주 1세대와 2세대에 의해 전승된 아리랑과의 단절 현상이 두드러진다. 설사 전승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사가 변하고, 창법이 바뀌는 등 심한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강원도 아리랑˃이 전승되던 길림성 도문시 수남촌과 송림촌의 경우를 보면, 초창기에는 강원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해 ‘강원도촌’이라는 이름으로 전통문화를 지켜왔으나 민족문화의 전승 축인 젊은 층이 한국 등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던 아리랑은 물론 독창적인 문화적 특질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마을이 사라지면서 전승되던 아리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도 있다. 강원도 사람들이 거주하던 안도현 춘양촌과 원주촌 등은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떠난 곳에 한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아예 한족 마을로 바뀌어 버렸다.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아리랑은 마을이 차츰 해체되자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전승 기반을 점차 잃게 되었다. 하지만 한인[조선족]은 더 나은 곳을 찾아 정착한 곳에서 또 다른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아리랑을 되살리기도 하였다. 한인[조선족]의 재이주는 그 지역의 토양에 맞는 또 다른 아리랑이 뿌리를 내리는 터전이 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나 흑룡강성 지역의 한인[조선족]이 이주해 새로운 아파트촌 마을을 이룬 요령성 소가둔구 신흥촌과 화원신촌, 만융촌 등지의 노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승되는 ˂밀양 아리랑˃과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한인[조선족] 인구가 급증한 산동성 청도 지역에서 한인[조선족]의 삶을 담아 창작된 ˂청도 아리랑˃은 아리랑의 전승과 확산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한인[조선족]은 오늘도 살아가는 곳에서 아리랑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다.
한인[조선족]에게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 우리와는 다른 체제 속에서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등의 격변기와 암흑기를 거치며 전승되었다. 그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인[조선족]에게 아리랑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뒤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부르며 위로를 받는 어머니와 같은 노래이자 현지에서 한 세기 이상 적응하며 수용한 새로운 문화를 반영한 유산이다.
아리랑은 감당하기 힘든 고비 때마다 한인[조선족]이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을 발휘했고, 중국 사회에서 한인[조선족]이 그 어느 민족보다도 문화적으로 발전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아리랑 고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가 하면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가극, 문학, 무용, 미술, 방송 등의 장르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나 소재로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한인[조선족]에게 있어 아리랑은 민족 동질감과 정체성을 일깨우는 노래이자 유산이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민족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의 가락이자 오늘의 삶을 담담하게 표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