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생활·민속/민속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노동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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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3년-1982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1990년 |
동북3성 지역 농촌 사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리(里)나 마을 단위로 둔 한인 노동 조직.
두레는 한민족의 대표적인 공동 노동 조직으로 모든 집이 구성원으로 가입해야 하는 강제성이 있다. 두레에는 조직이 구성되어 있고, 농사를 마치면 결산을 하는 등 일련의 과정이 진행된다. 두레를 만든 가장 큰 목적은 모내기와 김매기처럼 적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오늘날 기구인 셈이다. 두레는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강가점(姜家店) 오성촌(五星村) 경기툰(京畿屯) 지역에서는 모내기와 김매기에서 한국의 것과 유사한 ‘두레’ 풍속이 있었다. 이곳에서 못자리는 음력 3월 초순의 청명 전후[양력 4월 5~6일]에 실시하고, 3벌 김매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두레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두레 풍속은 중국 건국 이후 집체 경작[1953~1982년]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2~1990년 개방에 의한 개인 경작과 개인적 자유, 욕구를 추구하는 시기에 마을에서 악기와 농기를 장만해서 전통 두레 놀이를 복원하려 했으나, 지속성을 띠지는 못했다.
동북3성 지역 한인 사회에서는 두레와 유사한 품앗이가 오히려 두레보다 성행하였다. 1950년대 이전에 한인들은 소, 수레, 가대기 같은 생산 공구가 없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농업 생산 과정에서 이러한 곤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친척 혹은 사이가 친한 사람들로 2~3세대가 한 개 팀을 묶어 일을 하였는데 이것을 ‘두레’라고 한다. 한국의 마을이나 리(里)에서 강제적으로 1인당 가입하는 두레와는 성격 차이를 보인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서는 “소결이” 혹은 “보도치”라고 부르는 두레 방식이 존재하였다. 소결이는 부림소가 있는 사람끼리 묶는 품앗이로 논밭을 갈 때 소를 두 마리씩 메워야 한다. 만약 암소나 수소가 한 마리밖에 없으면 소 한 마리를 소유한 다른 사람과 소결이를 묶는다. 소가 없는 가정과 있는 자가 품앗이를 묶는 경우에는 그 중 한 사람은 소와 수레, 가대기 같은 농기구가 있어야 한다. 소와 농기구가 없는 사람은 소와 이들 농기구를 가진 집의 갈이와 써레질은 물론 가을걷이도 도와주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는 소 임자의 농사일을 일정기간 해주거나 소임자에게 소 사료를 일정하게 지불하는 것이다. 이런 품앗이 형태는 주로 친척지간에 행해졌다.
김매기가 끝나는 7월 15일 백중 무렵에는 호미걸이 풍속을 하였는데, 이것을 “호미씻이”, “먹두레”라고 한다. 이날은 힘든 두레 일이 끝나 농사의 피로를 풀고, 회계결산을 위해 모여서 한바탕 먹고 마시며 노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