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儀禮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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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생활·민속/생활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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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의례에서 입는 이주 한인의 복식.
인간의 중요한 생활 문화의 하나인 복식 문화는 절기, 구성 재료, 성, 연령, 계급이나 계층, 기능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나타낸다. 기능적 측면에서 보면 일상 생활, 의례, 종교, 놀이 등에 따라 복식이 차이 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활동하기에 편리한 일상복 혹은 평상복을 착용하는데 비해, 특정 의례 시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의례복을 착용한다. 돌복이나 생일복, 관례복, 혼례복, 회갑복, 상례복 등은 일생 의례복에 해당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는 옷이다. 흰색의 옥양목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이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른의 옷을 뜯어서 만들기도 한다. 오래 살라고 잘 자란 남의 아이 것을 빌려다 입히기도 했다.
저고리는 좌임으로 여미며 여자는 꽃무늬 천을 이용하여 만들고 끝동을 달지 않는다. 남자 아이는 흰색으로 만들고 남색 끝동을 달았는데 이렇게 하면 고기를 잘 잡는다고 한다. 배냇 저고리는 어른 저고리와는 달리 고름이 없고 끈으로 돌려서 묶으며 겨울엔 누비 저고리를 입혔다. 배냇 저고리는 보관했다가 결혼할 때 준다.
돌에는 여자 아이는 빨강 치마, 노랑 저고리 혹은 분홍 치마와 저고리를 입혔고 조끼는 입히지 않는다. 그리고 빨간 주머니를 달아준다. 남자 아이는 색동 저고리에 남색 조끼, 바지를 입히며 역시 빨간 주머니를 달아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돌에는 대부분 한복을 입힌다. 마을을 돌며 옷을 파는 보따리 장수가 있어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돌사진 대부분이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이는 한복이 예복으로 자리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돌복의 경우 돈을 실타래에 묶어 목에 걸어주면 좋다. 돌복은 해방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한편, 돌복에 머리치장은 특별하게 하지 않는다.
1940년대에는 이주할 때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을 입고 혼례를 했다. 옷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입던 치마저고리를 입고 혼례를 하였다. 원삼은 입지 않았다. 전통 혼례복은 없었고 구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는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머리에 꽃장식이 된 면사포 같은 ‘무릉깨’라는 것을 썼다. 무릉깨는 길이가 발끝까지 끌린다. 그 당시 신부 치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할머니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님들이 해주셨으나 지금은 언니나 아들을 낳은 색시가 대반으로 옷을 입혀준다. 현재 결혼식 때 신부의 복장은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화관과 너울을 쓴다. 한복에 면사포를 쓴 형식인데 이는 이주 한인들의 일반적인 혼례복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신랑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으며 마을에 사모관대를 가지고 있는 집이 있어서 빌려서 입기도 하였으나 거의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남자들의 혼례 옷차림은 해방 후 1970년대까지는 보통 사지와 같은 고급 천으로 ‘중산복’ 혹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었는데, 1980년대 이후로는 기본상 양복에 넥타이를 맨다.
혼례복에 있어 여성들은 아직도 한복을 입는데 반하여 남자들은 양복을 입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은 결혼 후에도 한복을 입는 날들이 더러 있는데 비하여 남자들은 입는 날도 거의 없고 거기다가 옷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회갑은 한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잔치이다. 혼례가 간소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성대하게 치룬다. 회갑 때 남자들은 농촌의 경우는 보통 한복에 중절모를 쓰며, 도시에서는 1970년대까지는 보통 중산복에 간부모를 썼고, 1980년대 이후로는 한복을 입는 경우도 있고 양복에 중절모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와 반해 할머니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복을 입는다.
그러나 한국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할아버지도 한복을 새로 장만해 입는다. 회갑 때 한복을 차려 입는 것은 큰상을 받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모는 큰상을 받고 자식들의 절을 받는데 이때 그 자식들의 정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보다 더 화려하게 차리려 한다. 따라서 자연히 한복도 좋은 것으로 준비하게 된다. 회갑 때 옷을 꼭 마련하는 것은 이 옷을 죽을 때 입는 수의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의는 미리 준비해 두지도 않으며 윤달 든 해에 수의를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남자의 수의는 베옷을 만들어 입히는 것이 원칙이나 베가 없는 사람들은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 보낸다. 또한 남자들은 평상시에도 한복을 거의 입지 않기 때문에 수의로 한복을 만들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광목을 사다가 크게 만들어서 입히는 경우도 있다.
여자들은 환갑 때 해 입은 한복을 입으면 좋다고 하여 이 옷을 곱게 보관하였다가 죽을 때 입는다. 그리고 여자들의 경우 수의를 만드는 경우에는 광목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서 입힌다. 한복을 입힌 후에는 베로 시신을 말아 묶은 후에 매장한다. 남자들은 한복을 입지 않고 여자들만 환갑 때 입었던 옷을 입히는데 그 이유는 여자 한복은 죽은 몸에 입히기가 쉽지만 남자 한복은 바지통이 좁아 입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 문화의 영향도 받고 경제적으로도 나아졌기 때문에 수의를 다시 만들고 있다. 수의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하며 천은 베나 광목을 이용하고 통을 넓게 하여 입히기 쉽게 한다. 시기는 겨울이나 봄 농한기 때 준비하며 흰색 보따리에 싸서 장롱에 보관한다. 수의를 만드는 것을 수의를 입을 사람이 직접 봐야 좋아한다고 한다. 본인이 친구나 딸과 함께 만든다. 죽은 사람의 옷은 불에 태운다.
상복은 따로 특별한 것이 없다. 그냥 입고 있던 평상복 위에 하얀 광목을 찢어서 허리와 팔에 묶는다. 이것을 ‘화채’라고 하는데 중국식 영향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장터에 가면 묶었던 화채끈을 풀어서 같이 태우는데 이것은 상제의 고생을 벗는다는 의미이다.
상례와 관련된 의례복은 거의 사라진 상황인데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도 이유가 되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매장이 화장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법적으로 화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저승에서의 재생을 위하여 준비하였던 여러 가지 의례물이나 신앙은 사라지게 되었다.
상제는 보통 의복에 검은 휘장을 달고 앞가슴에 작은 흰꽃을 단다. 그런데 개혁개방을 전후하여 과거의 장례 관행이 일부분 되살아났다. 현재의 장례에서 고인의 아들과 며느리들은 삼베로 만든 두건과 허리띠를 착용하고 손자는 허리띠만 착용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