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의 세 가지 보배」

한자 太原의 세 가지 寶貝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설화|전설
주요등장인물 곽상서|한석봉
모티프유형 왕희지의 태원부 현판|오도자의 백선화|한석봉의 도화 병풍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7년
정의

황구연[조선족 민담 구연 예술가]이 ‘한석봉의 도화 병풍(桃花屛風) 등 산서성(山西城)의 성도인 태원(太原)의 세 가지 보배’를 구연한 설화.

개설

「태원의 세 가지 보배」는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에 남아 있는 세 가지 보배의 유래를 설명하는 유물전설(遺物傳說)이다. 왕희지의 태원부(太原府) 현판, 오도자의 백선화(白扇畵), 한석봉의 도화 병풍(桃花屛風)이 태원에 남겨지게 된 배경이 전개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황구연[남, 1909~1987, 경기도 양주군 출생, 1937년 길림성 연길현(현 용정시) 이주]의 구연 작품으로 그의 두 번째 자료집인 『파경노』[민족 출판사, 1989]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2007년에 연변대학 조선 문학 연구소에서 『황구연 민담집』[연세 대학교 국학 총서 73, 중국 조선 민족 문학 대계 24]을 발간했는데, 이 자료집에도 동일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에는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307∼365]가 태원부에 써준 ‘태원부 현판’, 당나라의 오도자(吳道子)[685∼758]가 초부에게 그려준 ‘백선화’, 조선의 한석봉(韓石峰)[1543∼1605년]이 태원 곽상서에게 건넨 ‘도화 병풍’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태원의 세 가지 보배’라고 한다. 한석봉이 입신양명한 후 그의 필체가 신이하다는 소문이 중원에까지 미쳤다. 그때 한석봉이 잠깐 태원에 머물렀는데, 소식을 접한 곽상서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한석봉에게 달려왔다.

곽상서는 한석봉을 ‘서성(書聖)’이라고 존대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도화 병풍에 필체를 남겨줄 것을 긴히 청했다. 한석봉은 곽상서의 예에 못 이겨 그를 따라 갔다. 그런데 병풍 속의 도화 그림이 마치 신선이 조화를 부린 듯 정교하며 아름다웠다. 이에 한석봉은 “다 같은 도화이건만 아래 윗가지 빛깔 달라/ 그 어인 연유냐고 동풍더러 물었더니/ 다행히 그 사이에 말할 줄 아는 새가 있어/ 윗가지 붉은 빛 비쳐 아래꽃잎 발그레하다 하더라.”라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곽상서는 한석봉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석봉의 명성이 다만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병풍을 접어 한 켠에 밀어넣었다. 며칠 후 곽상서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서 아름다운 빛이 새어 10여 리나 밝히고 있었다.

곽상서는 놀라 한걸음에 달려와 빛의 근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 빛이 병풍 속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곽상서는 죽는 날까지 도화 병풍의 빛을 감상했으며, 후세에까지 가보로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티프 분석

「태원의 세 가지 보배」의 모티프는 ‘왕희지의 태원부 현판, 오도자의 백선화, 한석봉의 도화 병풍’이다. 이 작품을 통해 중국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에 남아 있는 세 가지 보배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설이라기보다 실제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전개한 야사(野史)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 구비문학 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 『한국 민속 문학 사전: 설화편』(국립 민속 박물관, 2012)
  • 황구연, 『천생배필』(연변인민출판사, 1986)
  • 황구연, 『파경노』(민족 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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