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왕 발터와 뽕나무」

한자 渤海王 발터와 뽕나무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설화|전설
주요등장인물 발해왕|발해 왕후|발해 왕후의 아버지
모티프유형 발해왕의 왕후와 왕후 부친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7년
관련 지명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녕현 동경성 일대
정의

황구연[조선족 민담 구연 예술가]이 ‘발해국 시절에 어느 임금이 만든 발터(돌계단)의 내력’을 구연한 설화.

개설

「발해왕 발터와 뽕나무」는 발해국 시절에 한 임금이 만든 발터(돌계단)의 내력을 설명하는 유물 전설(遺物傳說)이다. 만백성을 위해 손수 뽕나무를 심고 길쌈을 하는 왕후의 마음에 감복하여, 임금이 어부의 삶을 놓지 않는 왕후의 아비를 위해 강가에 발터(돌계단)을 만들어주었다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황구연[남, 1909~1987년, 경기도 양주군 출생, 1937년 길림성 연길현[현 용정시] 이주]의 구연 작품으로 그의 첫 번째 자료집인 『천생배필』(연변인민출판사, 1986)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2007년에 연변대학 조선 문학 연구소에서 『황구연 민담집』(연세 대학교 국학총서 73, 중국 조선 민족 문학 대계 24)을 발간했는데, 이 자료집에도 동일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에서 동경성을 지나면 강가에 돌을 깎아 만든 층층대가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발해왕의 발터(돌계단)’라고 한다. 발해국의 어느 임금이 왕후를 여의었다.

그런데 백성들 사이에서, 이번에는 ‘손에는 백옥을 들고 몸에는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를 왕후로 맞이해야 나라에 근심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임금과 문무 대신들은 방을 붙이고 이러한 규수를 맞이하려 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망루 위에 올라선 임금의 눈에 ‘손에는 백옥을 들고 몸에는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가 들어왔다. 임금이 나졸을 시켜 규수를 맞이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손에는 두부를 들고 있었고, 몸에는 마대자루를 두르고 있었다. 저녁 노을빛에 반사가 되어 두부가 백옥처럼, 마대자루가 황금치마처럼 보인 것이었다. 임금은 필시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다.

하여 규수의 내력을 들어보니, 가난한 어부의 딸로 아비를 위해 매일 같이 두부를 봉양했던 것이었다. 임금은 효성에 감복해 그녀를 왕후로 맞아들였다. 왕후는 만백성이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도록 두루 뽕나무를 심고 손수 길쌈을 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왕후의 아비도 궁궐에서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늘 강가로 나가 고기를 잡았다. 이에 임금이 왕후의 아비를 위해 강가에 돌계단을 만들었다. 이후 그 돌계단을 ‘발해왕의 발터(돌계단)’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발해왕 발터와 뽕나무」의 모티프는 ‘발해왕의 왕후와 왕후 부친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의 삶을 잊지 않고, 발해왕의 왕후가 만백성을 위해 뽕나무를 심고 길쌈을 하는가 하면, 왕후의 부친도 강가에서 고기를 잡았다는 사실을 발해왕이 건립한 ‘발터(돌계단)’를 증거물로 삼아 강조하고 있다.

발해왕이 신분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배우자를 선택했음은 물론 왕후 및 그 측근도 백성을 위한 지순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의 고토에 터를 잡고 있는 한인의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 구비문학 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 『한국 민속 문학 사전: 설화편』(국립 민속 박물관, 2012)
  • 연변대학 조선 문학 연구소, 『황구연 민담집』보고사, 2007
  • 황구연, 『천생배필』(연변인민출판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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