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黃眞伊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 |
|---|---|
| 주요등장인물 | 황진이|지족선사|서경덕|이종숙|임제 |
| 모티프유형 | 황진이의 기생 입적과 일화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7년 |
| 관련 지명 | 황해도 개성시 |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庶女)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시신이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기도 했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벽계수를 시험한 후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라 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남겼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추모시를 남겼는데, 이 일로 임제는 파직당했다.
「황진이」의 모티브는 ‘황진이의 기생 입적과 일화’이다. 두루 아는 것처럼, 황진이는 박연폭포,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히는 조선 최고의 명기이다. 재색을 겸비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청초 거진 골에”,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 한국문학사에 획을 긋는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황진이를 다루고 있는 자료는 흔치 않다. 고작 『어우야담(於于野談)』, 『금계필담(錦溪筆譚)』, 『동국시화휘성(東國詩話彙成)』 등에 편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황진이의 기녀 입적 배경, 지족선사(知足禪師), 서경덕(徐敬德), 벽계수이종숙(李終叔) 등과 벌인 일화, 죽어서까지도 임제(林悌)를 파직시킨 일화에 이르기까지 황진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