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王子 好童와 樂浪公主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 |
|---|---|
| 주요등장인물 | 호동 왕자|낙랑 공주|최리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7 |
| 관련 지명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 |
황구연[조선족 민담 구연 예술가]이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비극적 사랑’을 구연한 설화.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는 『삼국사기』제14권 ‘고구려 본기’에 수록되어 있는 호동설화(好童說話)의 각 편으로, 고구려의 호동 왕자(好童王子)가 낙랑국(樂浪國)의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꾀어 자국의 자명고(自鳴鼓)를 찢게 함으로써 낙랑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인물 전설(人物傳說)이다.
호동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대무신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지었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했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하며 호동을 사위로 삼았다.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고(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 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진정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고 했다. 그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가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모티브는 ‘낙랑 공주의 자명고 파괴와 낙랑국 멸망’이다. 이 작품은 비록 한인 사회에서 채록된 “호동 설화(好童說話)”의 각편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을 거치는 과정에서 옛 것들이 많이 파괴되고 훼손되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그 원형이 온전히 계승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