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바보溫達과 平岡公主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 |
|---|---|
| 주요등장인물 | 온달|평강 공주 |
| 모티프유형 | 인물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7 |
| 관련 지명 |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 |
고구려평원왕(平原王, ?~590년, 재위: 559~590년) 때 외모는 누추하나 마음은 명랑한 바보 온달이라는 거지가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해서 눈 먼 어머니를 봉양했다. 당시 평원왕에게 울보인 딸이 있어서 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렸다. 공주가 자라서 상부 고 씨에게 출가하라는 부왕의 명을 어릴 때의 농담을 들어 거역하자,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설득하여 결혼했다. 몸에 지니고 나온 금팔찌로 병든 국마를 사서 잘 길러 준마를 만들고, 그 말로 온달이 무술을 연마하게 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 및 5부의 병사들이 낙랑언덕에서 사냥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온달이 사냥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평원왕이 놀랐다. 온달은 후주(後周)와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워서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大兄)의 벼슬에 올랐다. 590년에 온달은 임금에게 신라에 빼앗긴 한수 이북의 땅을 회복하겠으니 군사를 달라고 청하여 신라군과 아단성에서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다. 장례를 지내려는데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쓰다듬으며 생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돌아가라 하자 관이 움직여 장사지냈다.
「바보온달과 평강 공주」의 모티브는 ‘바보온달의 기이한 입신출세’이다. “바보온달과 평강 공주”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특히 바보(고구려의 평민)가 일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세상에 당당히 나섰다는 ‘입신출세의 기이담(奇異譚)’은 이후 여느 설화의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보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의 증거물로서 단양군 영춘면에 온달과 평강 공주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온달동굴이 존재한다는 사실, 온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장이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보온달과 평강 공주”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고구려평원왕의 평민 등용과 왕권 강화,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벌인 고구려와 신라의 접전, 고구려 장군총의 분포 등 이면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추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