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名筆 韓石峯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 |
|---|---|
| 주요등장인물 | 한석봉|주지번 |
| 모티프유형 | 인물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7년 |
| 관련 지명 | 중국 산서성 |
황구연[조선족 민담 구연 예술가)] ‘한석봉의 성장과 사자관으로서 활약’을 구연한 설화.
「명필 한석봉」은 한석봉[韓石峰, 1543~1605년]이 어머니의 굳은 의지로 명필가로 성장했다는 것과 과거에 급제하여 사자관[寫字官: 외교 관계 문서 정리 담당]으로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는 것을 설명하는 인물 전설(人物傳說)이다.
한석봉은 부친의 유언대로 명필가가 되고자 9살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7년이 지나 16살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한석봉에게 불을 끄고 글을 쓰라고 했다. 불을 켜자, 한석봉은 자신이 쓴 형편없는 글씨를 보았다. 이에 한석봉은 당대 명필로 이름난 병조참판 신희남[愼喜男, 1517~1591]의 집으로 향했다. 한석봉은 그곳에서 3년간 피나는 연습을 했다. 결과 한석봉의 글씨가 오묘하다는 소문이 장안에 나돌았고, 심지어 궁궐에서도 한석봉의 글씨를 병풍에 담아 보관했다. 한석봉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어느 고을 군수를 거쳐 승문원의 사자관에 올랐다. 이 무렵, 한석봉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감영으로부터 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한석봉이 가보니,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구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회식 자리에서 건넨 천여 자가 넘는 한시에 화답하는 시를 당장 내일 정오까지 써야 한다고 했다. 조선을 얕잡아 보기 위한 주지번의 술책이었다. 한석봉은 문제없다며, 차천로[車天輅, 1556~1615년]가 읊는 화답시를 열두 폭 병풍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음 날, 이정구가 열두 폭 병풍을 주지번에게 건네니, 주지번은 신묘한 글씨체에 탄복하며, 중국 조정에 조선에 훌륭한 인재가 많다는 것을 알렸다.
「명필 한석봉」의 모티브는 ‘한석봉의 신이한 글씨’이다. 한석봉이 글공부를 기약한 10년을 채우지 않고 집에 돌아오자,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을 썰어 한석봉을 다시금 일깨웠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석봉이 하룻밤 만에 열두 폭 병풍에 천여 자 넘는 글을 써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건넸다는 일화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실제 한석봉의 글씨는 중국에서조차 신이한 보물로 간주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산서성(山西城, Shanxi)의 성도인 태원(太原, Taiyuan)에서는 아직까지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쓴 태원부(太原府)의 현판, 오도자[吳道子, 685∼758]가 그린 백선화(白扇畵), 한석봉이 쓴 도화병풍(桃花屛風)의 한시를 세 가지 보물로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참된 깨달음과 피나는 노력만이 어떤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