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創業村[盤錦市]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요령성 반금시 반산현 첨수진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행정촌 |
|---|---|
| 개설 시기/일시 | 1970년대 |
요령성 반금시(盘锦市) 반산현(盘山縣) 첨수진(甜水鎭)에 소속된 한인[조선족] 마을.
창업촌(創業村)은 반금시 서북부에 위치하는데, 1970년대 요령성 정부에서 이른바 “남대황(南大荒)”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전에 능한 조선족들을 이 지역으로 대거 유치하면서 비롯되었다. 초기에는 380여 호, 1,200여 명에 달했던 큰 한인[조선족] 집성촌이였다. 그런데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중수교 후 조선족들의 도시 및 한국 등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현재는 주민들이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10여 년 전, 곡물값이 싼 데 비해 각종 비용 지출은 많아 많은 농민이 농사 짓기를 포기하여 경작지를 묵히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장 지도부가 조선족 마을의 일부 토지 경영권을 한족에게 넘기려 하였다. 이때 김성관 지서와 전시복 촌민위 주임은, “허허벌판에 움막 쳐놓고 쪽잠 자며 일구어낸 옥토가 아닌가? 이렇게 순순히 내놓는다면 영원히 경영권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농장 지도부와 협상하여 이를 막았다.
당시 창업촌은 “쌍백촌”으로 불렸다. 주민들이 촌에 진 빚이 100만 원이요, 촌에서 은행과 개인에게 진 빚이 100만 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에 빚부터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찮았다. 일부 주민들이 외지로 이주하거나 한국 등 해외로 나가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슬기롭게 이겨내 촌민들의 빚을 대부분 청산하였다.
촌 지도부는 전체 마을 토지를 통합 관리하며 남은 사람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토지를 경작할 것을 권하였다. 그 결과 46세대의 농민들이 전체 마을의 대부분 토지를 경작하였고, 벼농사 외 토지에 반금 특산인 민물 게를 양식하여 수입을 늘려나갔다. 이후 창업촌은 다른 민족들에게 모범이 되어 시급 문명촌, 생태촌, 새농촌 건설 시범촌으로 선정되었다.
창업촌은 1970년대 성 정부에서 이른바 “남대황” 개발 정책으로 수전에 능한 조선족을 이 지역으로 대거 유치하여 세워진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