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洼泥甸子村[本溪市]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요령성 본계시 고성진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행정촌 |
|---|---|
| 가구수 | 약 100호[조선족] |
| 인구[남/여] | 1,062명[조선족] |
| 변천 시기/일시 | 1985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75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
| 현 소재지 | 요령성 본계시 괴마자조선족진(북위 41°25'45.59", 동경 125°29'40.04") |
요령성(遼寧省) 본계시구(本溪市區)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 괴마자진(拐磨子鎮)에 속한 한인[조선족] 마을.
와니전자촌는 12개의 조(組)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 한족과 만족이며 6조와 7조만이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한족과 뚜렷한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족화(漢族化)가 이루어져 있지만, 조선족은 언어, 복식, 음식, 풍습 등에 있어서 다른 민족과 구분이 뚜렷하다. 물론 조선족조라고 해서 완전히 조선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와니전자촌에 환인댐이 건설되고 환인 수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수몰민이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한족을 조선족조에 수용하도록 하였다.이에 지금 6조는 조선족 67호와 한족 4호, 7조는 조선족 46호와 한족 9호가 거주하고 있다.
벼농사가 일찍 시작하여 지질이 약간 물렁물렁한 지대라고 하여, '와니전자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상전자(上甸子)’라고 불렀다.
와니전자촌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해방이 되자 많은 사람이 고국으로 혹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1960년대 초 환인댐 건설로 3개 향이 수몰되면서 많은 사람이 심양 소가둔(蘇家屯)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는 집안 일대에 살던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의하여 많은 젊은이가 외지로 나가느 바람에 현재 마을에는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거주하고 있다.
1985년 괴마자가 만족조선족진이 되었다. 소수 민족이 인구의 40% 이상 되면 자치현이 되는데, 당시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만족과 연관이 되면 만족으로 계산하여 괴마자진과 와니전자촌이 만족자치진에 포함되었다. 현재 괴마자진 정부 내의 직원 70명 중에서 다수가 만족이며, 조선족은 부진장(副鎭長) 한 사람밖에 없다. 부진장 이광도는 트럭 운전 및 상업에 종사했는데, 민족진에는 해당 민족 출신이 간부가 되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임 조선족으로 진장을 하였던 이봉구의 추천으로 부진장이 되었다.
괴마자진 정부에서 통화로 가는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남쪽으로 비포장 산길을 따라가면 먼저 쌍립자(雙立子) 마을을 만난다. 환인현은 인삼과 녹용 생산을 위한 중국 국립 농장이 있으며, 인삼과 녹용은 한국과 일본 등지로 수출된다고 한다. 또한 약재 채취도 이곳의 수출 품목이다.
특히 와니전자촌은 환인에서도 가장 벼농사가 일찍 시작된 곳이다. 1875년에 처음으로 경상도 농민에 의해 수전이 만들어지고 벼 재배가 전파되었으며, 대대적으로 논이 만들어진 것은 1923년이라고 한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 와니전자촌의 경상도 출신들은 고국 혹은 다른 지역으로 나갔고, 1960년대 초 환인댐 건설로 3개 향이 수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심양 소가둔(蘇家屯)으로 이주했다. 그 자리에 집안 일대에 살던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1980년대에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많은 젊은이가 외지로 나간 바람에 현재 마을에는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남았다. 젊은 여성들도 심양 등지의 식당이나 회사에서 일하고, 남자들 중에는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떠난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