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二道村[撫順市]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요령성 무순시 영릉진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행정촌 |
|---|---|
| 면적 | 수전 약 1,500여 무, 남새밭 약 1,000여 무 |
| 가구수 | 720호 |
| 인구[남/여] | 2,212명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6년 전후 |
| 현 소재지 | 요령성 무순시 영릉진 |
요령성 무순시 영릉진에 있는 한인[조선족] 마을.
이도촌은 혼하 북쪽, 심양-길림 철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쪽 마을은 동이도방, 서쪽 마을은 서이도방이라 불렸는데, 통칭 ‘이도방’이라고 칭했다. 후에 ‘이도’라고 약칭하였다.
1980년대 초, 전국 지명 보급 조사에 근거하면, 청나라 도광 연간에 황제가 신빈 영릉으로 조상들의 묘소에 가는 어도(御道)를 수축한 것이 바로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마을에는 원래 이 어도 외에 또 다른 한 갈래의 옛길이 있었다. 어느 날 도광제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도촌의 부호인 궁백만(宮百萬)의 집에 들러 식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궁백만의 집이 어도와 옛길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이도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이도방을 ‘이도’라고 약칭하였다.
한인[조선족]이 이도촌에 언제 들어왔고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도촌은 혼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도촌은 한인[조선족]이 6개 생산소대에 720호, 인구 2,212명에 달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원래 이도촌에는 수전(水田)이 약 1,500여 무(畝), 남새밭이 약 1,000여 무 있었다. 1986년 전후 중국 내에서 실시된 농업 생산 도급제로 촌민들의 경제 수입이 큭 늘었다. 이곳의 서기, 촌장은 대개 조선족 출신으로 정병태, 김지화, 강혜경, 이근무 등과 현임 최상호 등이 맡았다.
1962년 7월, 이도촌에 조선족 소학교를 설립되었다. 부지 면적이 1만여 ㎡에 10개 학급, 학생 260여 명, 교직원이 23명에 달했다. 1989년 4월에 폐교되기 전까지 총 1,0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부동산 개발과 도시 확장에 따라 20여 년간 가꿔온 이도촌의 농토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의 첨가, 구가, 북관 등의 촌들도 사라졌다. 촌민들은 대부분 인근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더는 농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장이 없어 노동자도 아니다. 지금은 예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넓은 포장도로가 가로세로 건설되었고 새로운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올랐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촌민 위원회의 간판에 쓰여 있는 “이도”란 두 글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