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촌[심양시]

한자 和平村[瀋陽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요령성 심양시 북릉향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행정촌
가구수 850세대
인구[남/여] 2,500명
개설 시기/일시 1936년
변천 시기/일시 1990년대 중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대 말
행정촌 요령성 심양시 북릉향
정의

요령성 심양시 북릉향에 속한 한인[조선족] 마을.

개설

심양시 우홍구 북릉향 화평촌은 오늘날 명렴가 일대에 정착한 한인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여기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 심양에서 가장 많은 한인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일제가 패망 후 중국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 1955년 12월 이곳에 농업초급사가 설립되면서 화평사(和平社)로 명명했다. 마권자(馬圈子), 구련툰(溝連屯), 하전자(下甸子), 신팡자 등의 마을을 망라하여 속칭 ‘신팡자’ 또는 ‘고려팡자(高麗房子)’라 불렀다. 당시 이곳은 모래밭이었는데 1936년 사산(砂山)지역의 한인 1천여 세대가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가마니·새끼 등 벼짚 가공업에 종사했으며, 소수가 벼농사를 지었다. 광복 후 이곳을 명렴가로 개칭했다가 화평촌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신 그룹의 성장 전략

1990년대 중반까지 농촌이던 화평촌에 심양 화신 그룹을 유치하였다. 그 뒤 화평촌은 도시 확장에 따라 1990년대 중반에 도시 마을로 변화했다. 화평촌 역대 촌 지도부가 토지를 잘 활용하여 현지 기업을 육성하고 한국 기업 등의 외자 기업을 적극 유치해 튼튼한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심양 화신 그룹은 연간 총생산액 11억 원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변모하였다.

심양 화신 그룹은 기업 성장과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제고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외자 유치를 강화하는가 하면 해외로도 진출하여 서울에 화신 그룹 서울 사무소를 개설하고 북한 시장으로도 진출했다. 또한 460무(畝) 토지에 ‘한국 공업 단지’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명칭 유래

화평촌은 신방자, 대리가로 일컬어져 왔다.

형성 및 변천

화평촌은 신방자, 대리가로 불렸는데 오늘날 심양시 서쪽 황고구의 서남쪽 명렴가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 패망 이후 화평촌에 요령성 내뿐 아니라 흑룡강, 길림 등 다른 지방에서 많은 이주민이 밀려 들어와 비교적 큰 촌락을 이뤘다.

화평촌심양시 도시 변두리에 위치해 자연환경이 뛰어난 만큼 1970년대부터 공영기업이 들어섰고 1980년대에 더욱 발전했다. 당시 공영기업의 발전과 공업화의 흐름으로 1990년대 말에는 외자 기업 22개를 포함해 촌의 기업이 50여 개에 달했다.

현황

2012년 기준으로 화신 그룹 산하에 850세대 2,5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어 방송 넷(http://www.krcnr.cn , 201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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