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만주 조선 문예선』을 통해 본 1940년대 조선인 만주 인상기

한자 滿州 朝鮮 文藝選을 通해본 1940年代 朝鮮人 滿州 印象記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일제 강점기 길림성 장춘시에 있던 조선문예사(朝鮮文藝社)가 간행한 합동 수필집인 『만주 조선 문예선』에 실린 조선인 문학가들의 작품에 대한 소개.

만주에서 발간된 조선어 수필집 『만주 조선 문예선』

1941년 11월 5일, 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 장춘대가(長春大街) 304의 B6에 위치해 있던 조선문예사(朝鮮文藝社)에서 조선어 수필집 『만주 조선 문예선』이 간행되었다. 편집인은 신영철(申塋澈)이고 발행자는 노승균(盧承均)이며 인쇄자는 양본진일(梁本進一)이다. 이 문집은 중국 땅에 세워진 만주국, 만주국에서 조선인들이 펴낸 조선어 수필집이다. 이것은 『만주 조선 문예선』을 비롯한 당시 만주지역에서 간행된 단행본들이 가지는 독특한 위상일 것이다.

1940년대 초 만주에서 간행된 조선어 창작집은 『만주 조선 문예선』뿐만 아니라 소설집 『싹트는 대지』[1941. 11. 15.], 시집 『만주 시인집』[1942. 9.], 『재만 조선 시인집』[1942. 10.] 등이 있다. 또한 안수길의 개인 창작집 『북원』[1944]도 있다. 『싹트는 대지』는 『만주 조선 문예선』이 간행된 지 열흘 만에 발간되었다. 시집은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각각 박팔양과 김조규에 의해 편찬되었다.

『만주 조선 문예선』과 『싹트는 대지』는 모두 신영철이 발간하였다. 동일한 인물에 의해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편집에서 출판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염상섭의 서문에 안수길의 「새벽」을 비롯한 박영준, 현경준 등 7인의 중단편을 수록하고 있는 『싹트는 대지』는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조선이 아닌 만주에서 조선어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의 신문과 잡지에서도 논평이 잇달았다. 만주건국 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싹트는 대지』를 사려고 신영철의 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는 『싹트는 대지』가 출간된 지 사흘만인 18일에 다시 재판을 발행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싹트는 대지』의 이러한 유명세와 달리 『만주 조선 문예선』의 출간은 쓸쓸했다. 안수길의 회고록에서 수필집 한 권을 펴냈었다는 기록이 있었을 뿐 실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오양호 선생님에 의해 『만주 조선 문예선』[역락, 2012]이 출간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영인본을 보면 『만주 조선 문예선』이 그간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등사판 위에 기름 종이를 놓고 철필로 써서 그것을 손으로 등사해서 만든 『만주 조선 문예선』은 수제 책자였다. 이는 『싹트는 대지』가 만선 일보사의 활자로 인쇄되었던 점과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책자의 철필 글씨체 역시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의 것이다. 97쪽이나 되는 분량을 혼자만의 작업으로 진행하기에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당시의 열악한 출판 환경을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만주 조선 문예선』이 오늘날 독자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주 조선 문예선』은 서문에서 총 25편의 글을 싣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수록된 글들을 확인해 보면, 25편이라는 것은 목차의 갯수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수필 19편, 고시조 14편, 시 2편이 수록되었다. 그중 최남선과 신영철의 글이 각각 4편, 3편으로 가장 많았고, 전몽수의 글이 2편으로 그 뒤를 이었다. 다음이 염상섭, 안수길, 현경준, 박팔양 등 작가들의 글이 대부분이다. 이중에는 특히 봄을 소재로 한 글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기행문이었던 점도 특기할만하다.

동시에 『만주 조선 문예선』은 박석윤의 「안의주(安儀周)와 고개지(顧愷之)」, 현규환의 「만주의 기후와 생활」, 최남선의 「사변과 교육」, 김두종의 「문화사상(文化史上)의 동의보감」 등과 같은 글들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대부분이 수필들인데 왜 굳이 이런 글들을 수록했던 것일까? 그리고 서문에서 만주 현지에서 창작되고 발표된 글들만을 엄선하여 수록하였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고시조를 수록한 점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언뜻 보면 잡다해 보이기도 하지만 『만주 조선 문예선』을 내리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그 연유를 알 수 있다.

협화(協和)의 나라 만주국, 명랑의 풍속도

『만주 조선 문예선』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글은 아마도 최남선의 「사변과 교육」, 「천산유기(千山遊記)1~2」일 것이다. 한 사람이 집필했음에도 관점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 이 글은 독자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최남선은 『만주 조선 문예선』에 총 4편의 글을 싣고 있다. 위의 두 편 외에도 「독서」와 「백작제반일(百爵齊半日)」이 있다. 「독서」는 최남선의 독서에 대한 태도와 주장을 피력한 글로서 평범한 수필이다. 반면에 「백작제반일」은 그가 왕족이면서 수집가로 유명했던 나진옥옹(羅振玉翁)의 별장을 방문했던 기록이다. 중국의 은주 시대, 한위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의 필적, 서적, 골동품들을 아래위층에 빼곡히 전시하고 있는 별장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소장품의 진귀함, 다양함, 그 광범위함은 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독자들까지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진풍경이다. 이러한 놀라움을 뒤로 한 채 「사변과 교육」을 대하노라면 종전과는 또 다른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이 일으킨 청일전쟁을 교육적인 의미에서 고찰하고 있는 「사변과 교육」에 따르면, 중일 전쟁은 침략적이거나 정복적인 전쟁이 아니며 중국을 응징하고 각성시키기 위한 교육적인 차원에서 수행된 전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본의 “눈물에 젖은, 사랑의 채쪽”에 다름 아니며 이 “성전(聖戰)”을 완수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의 책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최남선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글이다. 하지만 최남선의 이 글을 시작으로 하여 일련의 글들이 이와 동일한 계열에 놓이면서 당시 일본 혹은 만주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역에서 내리어 강밀봉촌의 중앙긴거리로 죄악돌을 깔아 우불퉁두불퉁 게다가 구루마까지 다녀노아서 기픈데는 똘이되고 놉흔데는 좁다란 뚝이 되어 것는데는 여간 불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길거리에 우리 一行을 합쳐 촌사람들이 석기어 그야말로 장신 그대로이다. 보퉁이를 둘러메인 만주남자, 쪽진뒷곡지 구거리에 긴두루막이를 질질끄는 만주여자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업은 조선안악네 귀덥퍼리모자에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아저씨 색저고리 색조끼에 바지를 입은 조선소년 양복입은 내지인신사, 소매 느러진 기모노에 게다짝을 끄는 부녀 어쨌든 협화의 나라인만큼 이 조그만 거리에도 고로각색으로 통행인이 제법복잡하다. 나도 거기에 한목끼어 거러갓다

길림서부터 오든눈이 여기와서는 제법굴게 쏘다진다.

역전에는 시골장터만한 거리가 형성되어 잇는데 조선촌이나 거의 틀닐것이 업다. 길좌우에는 한집두집씩 걸러 가개가 버려잇고 촌공소를 위시하여 우급학교 농사합작사교역장도 잇스며 심지어는 평양냉면집까지 진출하여왓다. 조선사람과 인연기픈 북선의 냉면 남선의 떡국과 비빔밥서울의 설렁탕은 각기 입맛을 따라 조와하는 품이 달르겟지만 북선에셔 조와하는 냉면이 만주까지 이동된 것은 괴이할 것도 업는 일이다. 서양요리가 도시마다 드러오고 지나요리가 세계각국에셔 환영밧고 일본인개척촌에는 아모리 궁벽한데라도 된장 우메보시와 연어 고등어가 수입된다 하니 김치 고초가루와 떡국냉면이 조선사람을 따라다닌다고 남으람할 것은 업슬 것이다.(신영철, 「정거장의 표정」, 『만주조선문예선』, 11면.)(강조-인용자)

인용문은 신영철이 쓴 「정거장의 표정」의 일부이다. 길림에서 삼십분 거리에 있는 강밀봉 개척촌 방문기인 이 글은 협화(協和)의 나라 만주국의 거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강밀봉 개척촌의 중앙거리는 곧 협화 그 자체였다. 만주인과 조선인, 일본의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진 거리는 제법 통행인으로 붐비는 상황이고 정류장 앞의 시골 장터는 조선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광경이다. 평양 냉면까지 진출해 있는데 오히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일본의 우메 보시, 연어, 고등어는 아무리 궁벽한 산골이라도 수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조선의 냉면쯤은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이런 곳에서 만주국의 협화는 만주인과 조선인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방문기는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발동기 여페는 만주인과 조선인이 억개를 겨누고 정다이 서러서러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밧고 한다. 민족협화는 누구보다도 이분들이 모범적 실천을 하고 잇다.”

신영철의 붓끝에서 그려지고 있는 강밀봉 개척촌은 제법 흥성거리는 모습이며 누구보다도 민족 협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해가고 있는 고장이다. 만주인, 조선인, 일본인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에는 적당한 상권이 형성되어 거리는 번화하고 사람들은 사이좋게 살아간다. 만주의 조선인들은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어렵지 않게 생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개척촌에 대한 기록은 이뿐이 아니다. 신언룡(申彦龍)의 「감가의 기억」 역시 개척촌 방문기이다. 한번도 조선 개척민을 대한 적이 없는 ‘나’는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협화회 중앙본부 주최로 동만선계(東滿鮮界) 개척지 위문대가 개척지 위문을 간다는 소문을 듣고 따라나선다. 강덕 5년[1938] 11월, 그들은 왕청 사인반(四人班) 지방의 조선인 개척촌을 방문하고 위문대에는 영화 위문반도 함께 한다. 그들은 조선 개척민들이 직접 수확한 감자를 야참으로 먹으면서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개척민들이 그들에게 밤새워 털어놓았던 애로사항은 생략된 채 4년 후 그때의 방문은 '즐겁고', '맛있었던' 기억만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개척민들의 생활은 훨씬 안정되고 좋아졌을 것이라는 맹목적이고 긍정적인 믿음만 제시된다.

개척촌 조선인들의 삶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만주국의 협화는 착실히 실현되고 있고 개척촌의 발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도시 조선인의 생활 역시 명랑하고 쾌활하다. 안수길의 「이웃」은 그의 『만선일보』 시절 신경 생활의 한 기록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중국인 여관의 방 한 칸이었는데 그 앞에는 대화(大和) 호텔이 있었고 여관에는 삼십 여 호의 중국인, 러시아인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림을 하고 있었다. 시장이 가깝고 미용실, 우체국, 찻집, 서점 등을 비롯한 일련의 가게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생활하기에 여간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여관에서 24시간 제공하고 있는 더운 물은 추운 만주의 겨울 생활에 가장 큰 편의를 제공해주었으며 가까운 정류장은 엄동설한에 삼십분씩 차를 기다려야 하는 고생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나 그의 마음을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은 골목 안 이웃들의 넉넉한 인심이었다. 가벼운 필치로 그려지고 있는 신경 생활은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만족스럽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협소한 공간에서 다양한 민족이 협조적으로 살아가는 넉넉한 인심이다.

만주는 우리 땅, 고토에서 ‘조선’을 호출하다.

『만주 조선 문예선』은 만주만을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다. 만주 속에는 우리 조선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변과 교육」만큼이나 주목되는 글로 최남선의 「천산유기」가 있다.

「천산유기」는 만주의 안산(鞍山)에 위치한 천산(千山)을 여행한 기행문이다. 천산과 더불어 안산은 여러 수필이나 기행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만주 명물 중의 하나인 천산 덕분이기도 하지만 안산 제철소 때문이기도 하다. 안산 제철소는 무순(撫順) 탄광과 함께 만철 사업을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서 만철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의 하나였다. 이런 까닭으로 만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안산과 무순을 거쳐 갔던 것이다.

1930년대 초반 이광수(李光洙) 역시 천산을 지나 가면서 간단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요동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천산은 남만의 삼대 명산[금석산, 계관산, 천산] 중의 하나이며, 산내에 선사(禪寺)와 도관(道觀)이 다수인 것이 그 한 특징이다. 최남선 역시 천산을 기행하면서 무량관(無量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도관과 중국 도교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주목되는 것은 끊임없이 조선을 상기시키는 그의 행위였다. 천산 부근의 칠성자(七城子) 주변에 이르자 최남선은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조선적(朝鮮的)임”에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모래 바닥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만주에서는 볼 수 없는 맑은 시냇물이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그는 천산의 곳곳에서 조선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다. 한국의 소요산뿐만 아니라 북한산의 모습까지도 찾아내면서 자신의 이런 느낌이 틀리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나그인가 곰곰이 생각하건대 千山과 우리朝鮮人과의 因緣은 거의 重重無盡한 실마리를 풀어낼수도 잇다. 위선 山全体가 長白山의 末脈이 바다를 건너서 泰山을 만들라가는 過野임이다. 遙東半島란 원래 朝鮮半島와 매한가지로 역시 白頭山의 한기슭인 것이다. 그러고 歷史를 말할것가트면 千山의 左右가 古朝鮮의 主要한 地域으로서 高句麗, 渤海의 歷代에 언제든지 根本部的趣味를 가젓든 郡縣地이얏스니 이들에는 先民의 어루만진 자리가잇고 이흙에는 先民의 흘린 ᄯᅡᆷ이 심여잇슬 것이다. 아득한 녯일ᄲᅮᆫ일가 近代의 滿洲封禁期에 千山을 踏遍하야 그 擧石最工로 하야금 항상 現實界와 因緣을 가지게한者는 鴨綠江方面으로부터 山蔘을 캐러 다니는 우리의 『심뫼ᄭᅮᆫ』들이얏다하니 말하자면 千山의 開發은 朝鮮人으로 더부러 서로 終始하얏다 할 것이다. 無量觀境內에 康熙十四年建立 『重修觀音閣羅漢洞姓名碑記』가 잇서 그中에 『千山天地之鍾秀 三韓之巨觀』이란 句가 잇고 客堂의 扁額에도 『三韓丁鶴年書』를 署한것이 잇스니 이러케 千山을 三韓地視함이 진실로 偶然한일이라 할수업다. 내 이제 千山의 一峰頂에 서서 홈ᄲᅡᆨ滿洲를 이저버ᄅퟄ고 슬며시 故土의 생각을품움을 누가 구태탓할者이냐.(최남선, 「천산유기(千山遊記)」2)

천산은 장백산맥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요동 반도 역시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백두산의 한 기슭이다. 역사적으로 천산 지역은 고조선의 중요한 성역이었으며 고구려, 발해의 중요한 군현지였고 근대의 청조 봉금기에 천산을 개발한 사람들은 조선의 ‘심마니’들이었다. 그리고 천산이 삼한의 지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만주는 조선의 고토였기 때문에 조선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여 그는 “쾌쾌히 천산을 구경하얏다고하기는 좀 염체업지마는 ...(중략)... 천산이 경관으로나 역사로나 완전히 조선의 일부임을 실증한 것은 이번 길의 유쾌한 소득아님이 아니엿다.”라고 쓰고 있다.

만주에서 조선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고토로서의 만주를 강조하고 있는 이는 최남선에 그치지 않는다. 함석창의 「길림영춘기」 역시 비슷한 글이다. 길림의 송화강과 소백산의 망제전(望祭殿)에 대한 역사적 증언은 이 지역이 고구려, 부여, 발해 등 조선의 고토였고 백두산은 만주족들이 영산으로 숭앙하였던 산이며 장백 산신은 그들이 민족신으로 봉사하였던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주는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흔적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괴뢰 국가 만주국이 세워지고 '오족 협화(五族協和)'와 '왕도 낙토(王道樂土)'가 슬로건으로 제시되면서 조선인들은 만주국에서 선계(鮮系)라는 독특한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만주의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조선을 의식하고 기억해 냈으며 부단히 조선을 호출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재의 조선은 절망의 대상이었지만 『동의보감(東醫寶鑑)』[김두종의 「문화사상의 동의보감」]과 같은 세계적인 위대한 의서를 가지고 있고 만주에서 실업가이자 소장가로 성공하여 유명세를 떨친 안의주(安儀周)[박석윤의 「안의주와 고개지」]와 같은 인재를 품은 나라 조선은 조선인들의 자부심이었다. 괴뢰 국가 만주국에서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과거의 조선을 호출하면서 고토로서의 만주를 각인시키고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조선을 소환하고 있었다. 최영(崔瑩), 김종서(金宗瑞), 남이(南怡) 등의 우국 충절을 노래한 고시조를 삽입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한다.

또 다른 만주, 제국의 도시 모던 신경(新京)

만주국은 협화의 나라, 개척민의 나라만이 아닌 근대 도시 국가이기도 했다. 『만주 조선 문예선』의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박팔양의 「밤 신경의 인상」은 유일하게 만주의 색다른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어 흥미롭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시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법한 「밤 신경의 인상」은 여타의 그 어떤 글들과도 다른 근대적인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어 돋보인다. 「밤 신경의 인상」은 밤 10시 신경 시내의 3번 버스를 타고 흥안대로(興安大路)에서 출발하여 대동대가(大同大街)를 경유하는 과정의 연변의 풍경을 이색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밤 10시의 흥안대로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공차(空車)’라는 빨간 불을 켠 택시들만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고,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은 그들만의 향연을 베풀고 있으며, 밤바람은 외투 깃을 스치며 화자에게 장난을 걸어온다. 이십분 만에 나타난 3번 버스는 “도야지 같은 큰 체구”에 승객 두 명만을 태운 채 대동대가에 들어선다.

신경의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대동대가는 중앙의 대동 광장을 중심으로 제국의 수도 신경을 새롭게 개발 중에 있다. 원형의 대동 광장 둘레에는 중앙 은행, 수도 병원 등과 같은 도시의 주요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조일통(朝日通)으로 향하는 길에는 미나카이 백화점을 비롯하여 강덕 회관, 아옥(兒玉) 공원, 중앙우정국, 대화 호텔, 만철지사 등이 대로 양옆에 자리잡고 있다. 청홍색의 네온이 반짝이는 신경의 밤거리는 청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몬테카르로로 비유된다. 하지만 밤에 바라본 미나카이와 강덕 회관은 어딘가 공포스럽다. 불 꺼진 미나카이는 최후를 맞은 폼베이의 폐허에 비견되고 어두컴컴한 진열장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기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인지된다. 우중충한 강덕 회관은 오래된 중세의 성처럼 거대하게 거리를 뒤덮고 있다. 밤의 모습, 어둠 속의 적막은 낮 동안의 흥성거림과 대조되면서 이 도시의 화려함의 이면을 은유적으로 부각시킨다.

자본의 논리와 제국의 이데올로기가 상부상조하는 만주의 수도 신경, 그곳에서 백화점과 강덕 회관은 이제 더 이상 근대적인 문명과 향수, 제도의 상징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는 시적 화자에 의해 “환상의 거리”로 불린다. 지금까지의 서술과는 상반되는 표현이지만 시인은 서둘러 자신의 위와 같은 발언을 “부즈럽슨 환각(幻覺)의 세계”라고 일축해 버리면서 신경을 환상의 도시, 고향과 같은 아늑한 느낌을 주는 도시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박팔양의 「밤 신경의 인상」은 화려한 근대 도시 신경의 야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신경의 모습이었고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이었으며 제국의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만주, 조선, 그리고 향수

신영철은 『만주 조선 문예선』 서문에서 철저한 현지주의 원칙에 따라 만주에서 쓰이고 발표된 글들만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고 밝히면서 “만주의 색채가 흐르고 있는 것만은 자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대 현지인들의 글이다 보니 이보다 더 만주적일 수 없다. 오족 협화, 개척, 개발, 도시국가, 제국의 이데올로기, 어느 하나 만주답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만주 조선 문예선』이 만주의 모습만을 부각시켰던 것은 아니다. 만주와 함께 조선을 병치시키면서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고, 여기에 또 하나, 향수를 덧붙이고 있다.

『만주 조선 문예선』에는 봄을 그리는 수필이 대부분이다. 이들 글은 봄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을 전한다. 현경준의 「봄을 파는 손」은 봄 구경을 기록한 소박한 글이고 전몽수의 「춘심(春心)」에서는 봄눈을 밟으면서 조선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한다. 함석창의 「길림 영춘기」 역시 송화강의 개빙(開氷)의 장관을 수려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봄을 구경하거나 기다리면서 누구 하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 없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신영철의 「신경편언(新京片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림형(啞林兄)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싸구려 사진사」, 「살구꽃 필 때면」, 「제비와 꾀고리」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싸구려 사진사'는 신경의 봄을 알리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들로서 사진기를 메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 흔히 20~30전이면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었는데 겨울 사이에 가격이 두세 배로 뛰어 50~60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모든 물가가 한겨울 사이에 세 배로 뛰어오르고 보니 살기 어려운 것은 자신과 같은 샐러리맨들뿐이라고 한탄한다. 어려운 살림에 남쪽 고향에서는 살구꽃이 피고 제비가 돌아오는 4월 하순임에도 불구하고 만주에는 아직도 함박눈이 쏟아진다. 만주의 봄이라는 것이 이처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고 보니 자연 고향 생각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물가의 급등과 기후의 부적응에서 오는 생활의 어려움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절절한 향수가 더욱 가슴을 울린다.

이와 같은 맥락에 염상섭의 「우중행로기(雨中行路記)」가 놓인다. 삼십년 전 형과 함께 낙향한 종친을 찾아가던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다. 이 글에서 화자는 서울에서 김천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으나 김천부터는 말을 타고 유삼(油衫) 을 쓰고 가던 그 풍경이 장마철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대하니 불현듯 생각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인가? 염상섭은 다음과 같이 감상을 토로한다. “문명과 진보는 이러한 추억과 꿈을 뒷발길로 거더차고 다라난다. 여름철이 되면 생각나는 옛생활 한토막, 다만 문채(文債)를 가플ᄲᅮᆫ이고...(하략)” 문명과 진보로 대표되는 기차가 통하기 시작하면서 말에 올라 유삼 쓰고 길을 가던 시절은 말 그대로 전근대적인 옛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기차와 말은 기차로 사통팔달한 만주와 말을 타고 길 가는 조선에 대비된다. 그렇다고 조선이 그렇게 전근대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의 요지는 “뒷발길로 걷어차고 다라난다.”에 있다. 즉 만주의 성장이 그만큼 급속하게 빠르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작자는 급성장하는 만주를 대하면서 조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문채(文債)를 갚기 위해 여름철 옛 생활 한 토막을 꺼내 적었을 뿐이라고 가볍게 언급하고 있지만 「우중행로기」야말로 만주에 몸을 담은 채 조선을 향하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는 깊은 향수 그 자체이다.

만주는 타향일 뿐이고 선계(鮮系)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었다. 만주국의 현실을 정시하면서 조선을 기억하고 조선을 우려하며 나라도 고향도 없는 신세라고 한탄하면서도 조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만주의 조선인들이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말

『만주 조선 문예선』은 한편으로 친일적이고 만주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만주국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그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시각에서 만주 고토론을 제시하고, 민족사의 공간으로서의 만주를 환원시키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다. 지나치게 도식적인 듯해 보이지만 모든 글들이 명확하게 이 이분법에 의해 분류되고 있지는 않다. 신영철의 「남만평야(南滿平野)의 아침」과 같은 작품들은 만주의 풍경을 사실대로 전달하고 있다. 신경-봉천-부산의 일로에서 보고 들은 단편적 생각을 적고 있는 이 글은 급박하게 변해가는 만주의 정세를 기차 속의 달라진 '벤또'와 포화된 남만의 경작지, 그리고 가격 통제의 실시로 날로 줄어들고 있는 담배 재배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협화의 나라 만주국은 강성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현실의 만주를 살아가고 의식하고 그것을 기록하면서도 조선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이는 작자의 고심이 아니면 절대 이룩할 수 없는 성과이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만주 조선인들의 무의식의 표출이기도 하다. 만주국의 선계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했지만 『만주 조선 문예선』에서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의식한 바 없으며 오히려 조선을 더 많이 의식하면서 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만주 조선 문예선』의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향수는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김윤식, 『염상섭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 박팔양, 『태양을 등진 거리』(미래사, 1991)
  • 박팔양, 『박팔양 시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오양호 엮음, 『만주 조선 문예선』(역락, 2012)
  • 신동한, 「망명 문단과 작품집 ‘싹트는 대지’」(『문단 주유기』, 해돋이, 1991)
  • 안수길, 「용정·신경시대」(『한국 문단 이면사』, 깊은샘, 1999)
  • 오양호, 「마도강 문학 연구」,(『만주 이민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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