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中國 朝鮮族이 즐겨 부른 勞動謠에 담긴 哀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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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민요|노동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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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대 중반 |
| 전승 지역 |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월청향 기신촌 |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노동 생활 현장에서 불러온 노래.
19세기 말부터 조선의 가난한 농민과 이재민들은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중국간도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주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고통은 똑같았다.
이주 초기 땅이 없던 가난한 조선의 농민들은 황무지 등을 열심히 개간하며 살았다. 피땀 흘려 1년 농사를 마치고 수확의 날을 고대하던 농민들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난데없이 중국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을 쳤다. 주인 없는 황무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계속 농사를 지으려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결국 조선 농민들은 자신이 힘들게 일군 땅을 떠나거나 소작인으로 전락해야만 했다. 이렇게 땅 없는 조선 농민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부치는 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살이는 지주에게 쌀, 농기구, 생활비 등을 빌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해 농사를 지어도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각종 명목의 잡세를 내고 나면 늘 적자였다. 할 수 없이 조선 농민들은 지주에게 높은 이율로 생계비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빌린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할 경우, 농민들의 아들, 딸들은 지주집에 머슴, 부엌데기로 팔려가야만 했다. 고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팡살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주 조선 농민들은 힘겨운 삶과 고된 노동 속에서도 노래를 잊지 않았다. 노동할 때 부르는 노래는 형식적으로 볼 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농산(農産) 노동요, 수산(水産) 노동요, 임산(林山) 노동요, 공산(工産) 노동요, 토건(土建) 노동요, 상업(商業) 노동요, 가사(家事) 노동요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리고 오래 전승되었던 노래는 농산 노동요이다.
조선족의 노동요는 이주 시기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였다. 이주 초기 노동요는 연길과 용정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이주민 다수가 함경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노동요가 유행했던 것이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이앙기 등을 이용한 기계화된 농사법이 도입되면서 자연스레 논농사 노동요가 사라졌다. 물레방아, 베짜기 등도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관련된 노동요도 점차 줄어들었다. 즉 노동요는 사회 환경과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 줄어든 것이다.
조선족의 노동요는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노동요는 북한 과 한국 음악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또한 노동 현장에서 불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대 음악 혹은 광장 음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전자음향에 의한 반주와 관람을 위한 무대 음악으로의 편곡 등으로 인해 노동요는 그 원형을 상실해갔다. 이는 노동요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왔지만, 보여주기 식의 노동요로 변화되지 못한 수많은 노동요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1. 새로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다지며 부르던 「다대기 메기는 소리」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이 연변에 정착하는 과정을 노래한 것이 ˂다대기 메기는 소리˃이다. 집터 다지기는 동일한 동작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노동이다. 농민들은 하루 종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다. 일을 하며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허여라 차하’라는 감탄사를 넣고, 이와 함께 ‘떼난봉 난다’는 가사로 웃음을 유발하였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한인들의 낙천성이 잘 드러난다.
2. 농사를 지을 때 부르던 「농사 타령」
연변의 안도현 지역에서 불렸던 노래이다.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작물의 종류를 이야기하고 농사의 희망을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농사 지을까’라는 공통 질문에 벼, 조, 콩, 참외 농사를 짓자고 하며, 각 작물의 종류를 해학적으로 나열하였다. 곡식을 나열한 후에는 농사에 필요한 우마(牛馬)를 노래하고, 풍년을 맞는 기쁨을 노래하였다.
3. 호미로 밭일을 하며 부르던 「호미 소리」
연변지역에서 주로 불렸던 노래로 봄에 압록강을 건너와 황무지를 개간하던 이주 초기의 한과 설움이 담겨있다. 노래 가사는 "호미 한 번에 손 세 번씩 긴 이랑밭을 잘 일구면 좋은 반찬을 줄까. 밭머리를 내다보니 뽕나무 꼭대기에 처자가 있네.", "부지런히 일해서 아버지 약값을 벌자."는 등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4. 바위를 깨는 노동을 할 때 부르던「남포질 소리」
도문시 월청향 기신촌에서 불려진 노래로 농민들이 바위를 깨는 노동을 하며 부르던 노래이다. 척박한 땅을 개척하여 옥토로 일구는 과정에서 불렀다. "산이야 산이야 산이로다."로 시작하는 이 소리에 맞춰서 "때려라 받아라, 받아라 때려라."라고 하며 정과 망치를 번갈아가며 내리쳤다. 생생한 노동의 모습에는 바위도 두려워 않는 한인들의 강인한 정신력이 드러난다.
5. 고기잡이를 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던「어부의 노래」
연변은 바다에 접해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현장을 떠나 구송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한인들이 갖는 이주 민족으로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어촌에서 생활하던 한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며 함께 전해진 것이다.
어업 시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을 하며 "망망대해에 배를 띄워라. 바닷속 보물들을 배에 넘치게 담아서 만선기 달고 돌아오자."라는 선창에 "어야디야 에헤야 어긔야뒤여차 에헤야."라는 후렴을 붙여 박자를 맞추었다. 만선을 이뤄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노동의 희망을 힘찬 선율로 노래하고 있다.
6. 엿 장사가 엿을 팔며 부르던「엿장수 타령」
길림시에서 연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전하고 있는 상업 노동요이다. "정말 싸고 잘 늘인 감자엿, 사탕엿, 찹쌀엿, 호박엿을 팔고 있으니 어서 와서 사시오."라는 노래이다. 노래를 부르며 낙천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조선 민족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7.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자고 부르던「항일 민요」
만주에 이주하여 살던 조선 농민들에게 일제는 공포의 대상이자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들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부터 해방되는 일이야말로 전체 조선 농민의 기쁨이었다.
1)「항일 전가」
"조중 인민이 단결하여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인민 혁명 정부를 수립하자.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니 반일 전 소리가 곳곳에서 울린다. 적들은 겁을 내고 반역자는 쩔쩔맨다,"
2)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이천만 동포야 총과 칼을 잡아 권리를 되찾자. 온 세상을 붉은 기로 물들게 하여 무산자 혁명에 나가 싸우자. 초목과 송장까지도 나가 싸우자."
3)「승전가」
"만주에서 전쟁 준비를 끝내니 조국에 자유종 운다. 벌판에서 왜놈을 물리치는 고함소리 울리며 우리가 진격하니 조국 광복 되리라."
조선 혁명군의 사령관은 이웅(李雄), 이진탁(李辰卓), 현익철 등을 거쳐 1932년에 양세봉이 맡았다. 조선 혁명군은 이 노래를 조직 초기부터 불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노래는 조국을 광복시키겠다는 열망과 확신을 담고 있다. 곡조는 일본 군가인 「일본 해군」이다. 일제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담 없이 쉽게 부르며 항일의 의지를 다질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군가가 항일 투쟁의 노래에 상당수 차용되었다.
4)「동북 인민 혁명 군가」
"우리는 동북 인민 혁명군이다. 강령에 따라 싸우자. 일제가 무수한 군사시설을 만들고 있다. 민중을 도살하는 일제의 시설을 때려부수자. 만주국은 군대를 조직하여 인민을 진압한다. 병사들이 병변을 일으켜 나오게 하자. 일제는 세금을 거둬 민중을 도살하는 비용으로 쓰고, 마약과 일어를 퍼뜨린다. 군중에 호소하여 일제에 반대하게 하자."
일제의 만주 지배에 맞서 유격대 등을 통합하여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의 노래다. 안도현에서 안영철(安永哲)이 가창한 것을 김원창(金元昌)이 기록하였다. 동북 인민 혁명군이 1933년 결성된 이후 1935년 동북 항일 연군으로 전환하기까지 짧은 기가 불려진 노래이지만, 여전히 민간에 구전되고 있다.
5)「반일가」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왜놈들이 중국을 점령하려 한다. 조중 인민이 단결하여 최후에 승리하여 기쁜 노래 부르자."
6)「9.18 사변가」
"9.18 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여 중한 민중이 종이 되었다. 만주 군벌과 남경 정부 같은 반혁명자들은 일제에 굴복하여 민족을 팔아먹었다. 반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제를 물리치고 새정부를 건립하자."
7)「국치 기념가」
"경술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기고 종이 되었다. 조상이 지킨 땅을 빼앗기고 사방으로 떠다닌다. 어디를 가건 망국노라는 치욕을 당하니, 후순을 위해 눈물 흘리자. 이제 슬픔을 품고 총칼을 들어 지옥의 쇠문을 깨뜨리자."
8)「황천가」
"첩첩 산중에 어느 길을 홀로 가는가. 이렇게 가면 가는 사람이야 다 잊고 가지만 남은 사람은 아무리 통곡해도 못 만나네. 나는 죽어도 그대를 못 잊겠네. 보고 싶은 사람아."
9)「용진가」
"파도치는 애국의 기백으로 나아가자. 천하무적 우리 군대."(김좌진 작사)
"영웅들이 만주벌판을 엄숙히 나아간다. 두려움 없는 영웅의 돌격에 적들이 쓰러진다. 모든 적들을 쓰러버리고 삼천리 강산에 독립기 휘날리자."(작자 미상)
만주지역 항일투쟁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단결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노래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 노래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있다. 왕청현에서 김정옥(金貞玉)이 가창한 것을 이황훈(李黃勛)이 기록하였다. 곡조는 일본군가인 「일본해군」의 것을 사용하였다.
1930년대 이주한 조선인 중에는 땅 넓고 살기 좋은 곳에 간다는 만주 개척단의 유혹과 일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일제가 건설한 집단 부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안도현 장흥향 도안골 신촌에 이주한 이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경남 합천과 밀양에 살았던 이들은 1938년 3월 25일 정든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몇날 며칠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
집단 부락 생활은 일제가 선전한 것과는 달리 녹록지 않았다. 이들은 낮에는 감자 농사, 보리 농사, 강냉이 농사 등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집단 부락에 갇힌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농악을 울리며 피로를 풀고 망향의 설움을 달랬다. 특히 설이면 집집마다 탁주 한 동이씩을 담그고 농악을 울리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당시 마을에서 집을 짓고 주인 양반이 고향에서 가지고 온 소반에 탁주를 받쳐 들고 나와 술을 권하고는 농악대 일행을 마당으로 이끌어 지신밟기를 하였다. 이어 솥 위에 엎어놓은 솥뚜껑에는 쌀과 팥을 담아놓고 거기에 촛대를 세워 성주굿까지 했다.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된 농악은 이집 저집을 돌며 정월 대보름날까지 이어지다가 2월 초 하루날 쑥떡을 해먹고 서야 그만두었다. 이런 행위는 집단 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지켜주기도 했다.
오늘날 아리랑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리랑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Homer. B. Hubert는 『Korean Repository』[1896]에 따르면, 아리랑은 19세기 중기에 불렸다고 한다. 20세기 초에는 〈아라렁〉, 〈아령타령〉 또는 〈아리랑 타령〉이란 노래 제목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26년에는 나운규의 영화 주제곡으로 탄생한 영화주제곡 아리랑이 편사 편곡되면서 부터이다. 나운규의 영화 주제곡 아리랑은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은 민요풍의 유행가로 현존하는 아리랑 노래 가운데 가장 대표적 아리랑으로 재구성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후 다양한 기록에 나타난 아리랑 노래의 가사, 선율 구조, 리듬, 박자와 부점의 유무 분석을 통해 시대별 지역별 아리랑 노래의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아리랑 노래의 음악적 변천 연구가 시도되었다. 아리랑의 변천 과정과 계보를 구성하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아리랑과 고려인, 그리고 북한 아리랑 노래를 중심으로 연구, 조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아리랑의 시대적 변천사를 사회적 변화 구조에서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주제곡의 아리랑까지를 전기 아리랑 시대로, 1926년에서부터 그 이후의 아리랑은 후기 아리랑 시대로 나누고 있다. 노동요, 유희요의 성격을 지녔던 전기 아리랑과 비교할 때 후기 아리랑은 독립과 애국이라는 사회적 욕구를 표출하는 두 단어가 가사의 주된 주제라는 점이 그 특징으로 꼽힌다. 지금은 한반도의 분단 이후 중국,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아가게 된 한국인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채보하고 분석함으로써 다아스포라 음악으로서 변천한 아리랑을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존하는 다양한 아리랑 노래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을 음악 인류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전기 아리랑 시대에는 어떻게 전통 선율과 리듬이 서양음악과 접목 되었나를 밝히고, 후기 아리랑 시대에는 서로 다른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 변화한 아리랑의 음악이 어떻게 한민족의 정체성에 진화를 가져왔는가를 살펴보았다. 또한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경상도 아리랑의 한 종류로 알려진 〈영천아리랑〉이 전라도 지역 아리랑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선율 분석을 통해서 밝혀내었다. 즉 〈영천 아리랑〉은 〈진도 아리랑〉의 원형에 가깝다는 것을 밝혔다. 아리랑이란 노래 연구는 음악사적 연구 가치 이외에 민속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