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연변의 음식 문화

한자 延邊의 飮食 文化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정의

길림성(吉林省)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에 있는 한인[조선족]들의 음식 문화.

개설

한인[조선족]의 음식 문화는 남한과 북한을 포함한 한민족의 선명하고도 풍부한 특색을 바탕으로 중국의 식문화 속에서 독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동북부 지역의 각 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통의 계승을 소중히 여기는 한민족의 민족성을 생각할 때, 전통 생활 풍습과 관습이 잘 보존·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한국 내에도 지역마다 독특한 음식 문화가 있듯이, 연변지역도 한인[조선족] 분포 지역 내에서 독특한 음식 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특히 연변 한인[조선족] 절반 이상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동안 자란 곳이 북한이다. 북한 지역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함경도에서 자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고향이 남한인 사람은 10% 이내이며, 대부분 고향은 경상도 지역이다. 따라서 연변지역의 음식 문화 기조는 함경도 음식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연변의 음식 문화도 주변 민족이나 한국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연변 지역 한인조선족 음식 문화의 변천 과정

이주 초기 대부분의 한인들은 빈곤 계층에 속해 있었고, 생활 수준이 매우 낮아 하루 세끼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한인[조선족]들은 중국의 한 소수 민족으로서 합법적 신분과 평등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집단 노동을 통해 대량의 수전을 개발하고, 이때로부터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음식 문화를 정착시켰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계획 경제 체제에서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한 이후, 한인[조선족] 음식 산업은 상업화와 전문화에 힘입어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지역마다 고유의 문화 전통과 주어진 환경을 기반으로 독특한 음식 문화를 만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주변 민족 및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음식 문화를 수용하고 혼합의 과정을 거쳐 자기화시켰다.

1. 이민과 음식 문화의 정착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대부분이 빈곤 계층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살 길을 찾아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타향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에 와서도 소작농 신세를 면치 못했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조리해 먹어야 맛과 영양을 두루 보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먼 나라의 일이고, 무엇이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었다.

이들은 동북 수전 개발의 주력군이었으나 쌀밥을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주식은 대체로 조·수수·보리·강냉이·콩·기장·감자가 주를 이루고, 부식으로는 배추·오이·가지·무·갓·영채 등 채소들로 만든 김치와 된장국, 도라지·더덕·고사리·취·두릅 등 산나물 무침이 전부였다.

많은 지역에서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기도 했다. 감자는 산이 많은 동북의 고랭지에서도 잘 자란다. 게다가 산출이 높고 얼거나 썩어도 음식으로 가공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변의 산간 지역에는 일 년 내내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감자 음식이 발달했는데, 감자밴새, 감자 국수, 감자 지지미, 감자 찰떡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설이 되면 함께 찰떡도 치고 돼지 고기국도 먹었다.

2. 계획 경제와 음식의 가정 중심화

1945년 일제가 투항하자 연변은 동북에서도 가장 먼저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 뒤 토지 개혁을 통해 한인[조선족]들은 처음으로 토지를 평균하여 분배 받고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건국 이후 추진된 사회주의 개조를 통해 토지가 다시 국가 소유로 넘어간 뒤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집단 노동을 전개했다. 집단 노동에 힘입어 한인[조선족] 집거구역에서는 수전 개발이 대거 진행되었다. 연변만 놓고 보더라도 1949년 건국 당시 수전의 총 면적은 40여 만 무(畝)에 달했으나, 1952년에는 54.2만 무, 1957년에는 76.9만 무에 이르렀다. 즉 현재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수전이 1950년대에 집중적으로 개발된 셈이다. 한인[조선족]이 쌀밥을 주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연변 음식의 특징

중국 내 한인[조선족]들의 출신 지역을 놓고 보면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초기 함경도 사람들은 연변과 흑룡강성 동부 지역에, 평안도 사람들은 심양을 포함한 요령성 동부지역에,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시하얼빈시 쪽으로 많이 이주했다. 따라서 중국 내 한인[조선족]들의 생활 습관을 놓고 보면 크게 이 세 가지 지역성을 띠고 있다. 즉 함경도풍의 연변 지역, 평안도풍의 요령 지역, 경상도풍의 길림·하얼빈 지역이다. 이 세 지역은 방언뿐만 아니라 음식의 조리나 보관 등의 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대표적인 전통 음식이 김치, 개장국 등이다.

1. 김치

김치를 만드는 방법은 한인[조선족]들 모두 비슷하다. 다만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변과 흑룡강성 동부 지역에서는 양념 재료로 소금·마늘·고춧가루·생강·무·부추·향채[고수] 씨·사과·배 등을 쓴다. 이 중에서 소금·마늘·고춧가루·생강·무는 필수 재료이며, 사과·배와 향채 씨는 각 가정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연변 사람들은 김치에 젓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간혹 동태 살을 으깨거나 발라서 양념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 역시 매우 드물었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연변 사람들은 젓갈이나 액젓이란 단어 자체를 알지 못했다. 대신 일부 가정에서는 소고기국을 끓여 그 국물을 양념장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연변의 배추김치는 상대적으로 맛이 담백하다. 게다가 소금과 고춧가루를 적게 써서 김치가 희고 싱거운 것이 특징이다. 날씨가 상대적으로 추운 지역이므로 김치를 너무 짜게 만들 필요가 없었고, 젓갈을 넣지 않으면 아삭아삭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건국 이후 연변지역에서 확보할 수 있었던 해산물은 조선에서 건너온 명태와 갈치가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연변에서, 특히 함경북도 출신의 가정에서는 향채 씨를 김치에 넣는 경우가 많다. 향채를 전라도에서는 고수라 부른다. 향채 씨는 타원형의 작은 알갱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조금 매운 맛이 난다. 우선 향채 씨를 솥에 넣고 약한 불에 볶은 뒤 빻아 가루를 낸다. 그것을 기타 양념에 섞어 배추에 버무려 주면 되는데, 많은 양을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향채 씨 대신에 참깨 혹은 들깨 가루를 넣기도 한다. 이외에도 연변 특산인 사과배나 사과를 김치에 넣는 가정이 많다. 연변과 가까운 흑룡강성 동부 지역에서도 연변의 사과배를 얻어 김치에 넣기도 했다. 다만 너무 많이 넣으면 김치가 쉽게 검은색을 띠기 때문에 다른 양념보다 적게 넣는다. 이와 달리 심양이나 하얼빈 지역의 한인들은 김치에 과일을 넣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장김치의 보관 방법을 보면, 연변이나 흑룡강성에서는 추운 날씨 때문에 김치를 움에 보관해 둔다. 늦가을 집 앞 채소밭에 2m 깊이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큰 나무로 들보를 놓고 사이사이 짚이나 수숫대로 지붕을 인다. 거기에 흙을 덮고 작은 문을 내면 낮은 봉분 모양의 김치 움이 완성된다. 그 안에 김칫독을 가지런히 들여 놓고 김장 김치를 보관한다. 김치 움의 한 모퉁이에는 무·감자·배추·파 등도 보관하는데, 무나 감자는 모래에 파묻어 둔다. 이런 김치 움은 해마다 파고 묻기를 반복한다. 여름이 되면 물이 차올라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3월이 지나면 기온 상승으로 김치가 물러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장철은 한인[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직장마다 질 좋은 가을 배추를 확보하기 위해 사전에 사람을 파견하여 예약해둔다. 그리고 수확기에는 사람과 트럭을 동원하여 배추를 직원들의 집까지 배송해 주는데, 예전에는 가장 중요한 직원 복리 중의 하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0월 말일이면 가을 배추를 실은 차가 연길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으나 그 이후로는 이런 정경을 볼 수가 없다. 주거 방식이 아파트로 변하면서 김치 움을 따로 만들지 않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어 대부분의 가정에서 그때그때 사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치냉장고가 연변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원래 김치에 젓갈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흑룡강성으로 이주한 뒤 해산물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민물고기를 대체용으로 사용했다. 하얼빈 근처의 아성(阿城)이나 탕원(湯原)의 한인들은 붕어 새끼를 김장용 젓갈로 사용했다. 가을철에 논두렁에 채발을 놓거나 강가에 나가 붕어나 버들치 같은 작은 물고기를 잡아 그것을 절구에 으깨어 다른 양념과 함께 김치에 사용했다. 이외에도 갈치 고기를 발라내 잘게 썬 뒤 다른 양념과 섞어 사용한 경우도 있다. 연변과 달리 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없었던 하얼빈 지역에서는 대련으로부터 들어온 갈치가 상대적으로 흔했기 때문이다. 경상도는 본래 더운 지역이라 김치를 짜고 맵게 담갔다. 추운 흑룡강성에 살면서 이들은 지금도 김치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는다. 그리고 연변과 마찬가지로 김치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배추김치 사이사이에 구운 빵 모양으로 무를 썰어 넣기도 한다.

평안도풍의 심양 한인들은 김치를 담글 때 조기를 젓갈로 사용했다. 무역이 발달한 대도시라서 중국산 조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조기를 골라 머리를 떼어낸 뒤 몸통을 갈아 장으로 만들고 그것을 마늘 생강 고춧가루와 섞어 양념으로 쓴다.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생활수준이 낮아 마늘조차 귀했기 때문에 마늘 대신 달래를 캐서 사용했다는 사람도 많다. 이외에도 드물게는 청국장을 날것으로 김치에 넣는 집도 있었다.

심양지역은 연변이나 흑룡강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이다. 그래서 연변처럼 김치 움을 깊이 파지 않는다. 우선 김칫독의 크기보다 약간 크게 지면에 구덩이를 판 후 김칫독을 땅에 묻는다. 그리고 땅과 김칫독 사이에 짚이나 톱밥으로 움직이지 않게 꽉 채우는데, 이렇게 하면 보온에도 유리하다. 독 아가리는 새끼줄로 꽉 조여 준다. 그리고 김치를 한 포기씩 다져 넣고 덮개를 덮는다. 그 주변에 4~5개의 긴 나무 막대기로 고깔 모양의 지지대를 세운 후 짚 포대로 사면을 덮는다. 즉 김칫독은 땅에 묻고 그 위에 원추형의 작은 집을 세운 셈이다. 김치를 꺼내기 위해서 물론 작은 문을 하나 달아 둔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인[조선족]들은 한국의 영향을 받아 김치를 담글 때 한국에서 수입한 액젓이나 새우젓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젓갈을 넣으면 움 속에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지금도 젓갈을 넣지 않는 집이 많다.

김치 가운데 영채 김치는 연변 지역으로 이주한 함경도 사람의 특산 음식으로 산갓으로 담근 김치를 말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영 갈채 김치’, ‘산갓 김치’라고도 한다. 해마다 가을에 오면 산갓의 잎을 따서 깨끗이 다듬어 따뜻한 방에서 노란색이 나게 띄운 다음 잘 씻어서 소금에 절인다. 초절임한 영채에 생강즙, 마늘, 파, 통고추, 사과, 배, 무 등을 잘 버무려 단지에 넣은 다음 영채를 절였던 물을 깨끗이 받아서 간을 맞추어 붓는다. 영채 김치는 귀한 손님이 오면 밥반찬으로 내놓곤 한다.

2. 개장국

연변 사람들은 개장국에 장을 넣지 않는다. 우선 맨 물에 개고기를 삶고 내장과 비계를 따로 꺼내 도마 위에 놓고 쌀알 크기로 잘게 썬다. 만약 비계의 양이 모자라면 가죽 고기를 보탠다. 썰어놓은 내장과 비계는 솥에 넣고 콩기름을 가득 부은 후 큰 불과 작은 불에 골고루 볶는다. 그때 파·마늘·고춧가루·소금·간장·생강·내기 등을 함께 섞어 볶아내면 연변식 ‘개즙[개장]’이 완성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내기’인데, 한국에서는 ‘방아’라고도 부른다. 내기 잎은 깻잎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나 그 향이 훨씬 강하다. 개즙에 내기가 빠지면 개즙이라 부를 수 없다. 연변 사람들은 개즙뿐만 아니라 민물고기 매운탕에도 반드시 내기를 넣는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가장 많이 판매하는 곳이 바로 성남의 모란시장인데 이곳의 주된 고객은 중국에서 온 한인[조선족]들이다. 이 때문에 모란시장에서는 개고기를 팔 때 반드시 마른 내기도 함께 판매한다. 연변 사람들은 개고기를 개즙에 찍어 먹거나 고깃국에 넣어 밥과 함께 먹기도 한다.

연변 사람들은 복날이나 비오는 날에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해마다 초복일이면 개를 잡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지금은 개 가격이 너무 올라 간혹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잔치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연길 시내 사람들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 오는 날에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쌀쌀한 날씨에는 백주(白酒)와 개고기가 제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연변의 개장국은 장을 쓰지 않기 때문에 개고기국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흑룡강성과 요령성의 한인[조선족]들은 개장국을 끓일 때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우선 개고기를 큰 가마에 넣고 푹 삶는다. 고기가 익으면 손으로 고기를 전부 발라내고 뼈는 다시 가마에 넣고 우려낸다. 그때 시래기와 고사리를 넣고 된장을 풀어 간을 맞춘다. 이들 지역에서는 개장국에 내기를 넣지 않고 대신 파를 크게 썰어 듬뿍 넣는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흑룡강성이나 요령성에서는 개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족들이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 동네의 한족들은 한인[조선족]들이 개를 요구하면 그냥 넘겨주고 가죽만 받아갔다. 가죽으로 털모자나 털옷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연변 사람들이 동북 3성을 다니면서 개를 대량으로 구입해 가기 시작하자 개가 귀하게 됐고,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어느 지역이든 가격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개고기 소비는 1990년대가 전성기였다. 개고기 거리가 따로 생길 정도였고 시내 곳곳에 대형 개장국집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개고기 소비가 점차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에는 몇몇 대형 음식점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개고기 이외에도 맛있는 음식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한국 요리뿐만 아니라 중국의 유명 요리도 연길에 대거 입점하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이와 동시에 백주에서 맥주로 음주 문화가 완전히 바뀐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동물보호단체들의 본격적인 반대 운동과 애완견의 보급으로 인해 개고기가 혐오 식품으로 인식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개고기 요리가 2009년에 길림성 비물질(非物質) 문화유산[무형 문화유산을 가리킴]으로 등록되었다는 점인데, 현재로서는 정부와 업계 모두 진퇴양난의 갈림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3. 냉면

고향이 함경도인 연변 사람들은 냉면을 즐겨 먹는다. 반면 하얼빈길림 지역의 경상도 사람들은 칼국수를 즐겨 먹는다. 흑룡강성의 한인들은 대체로 수전 농사에 종사했다. 그래서 쌀을 주고 밀가루를 바꾸어 손칼국수를 해먹었다고 한다. 1970년대 쌀 한 근에 밀가루 한 근 두 냥 정도를 교환할 수 있었다. 이들의 칼국수는 육수가 없는 자장면에 해당된다. 칼국수를 만들어 끓인 후 된장을 버무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채소를 곁들어 먹는데 이는 한족의 음식 습관과 비슷하다.

반면 고향이 전라도인 사람들은 냉면도 즐겨 먹고 밀가루 국수도 즐겨 먹었다. 이들은 설날이나 결혼식에 반드시 밀가루 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타 지역과 달리 ‘온반’을 즐겨 먹었다. 온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닭을 깨끗이 손질한 다음 토막 내어 가마에 넣고 푹 삶는다. 고기가 익으면 꺼내어 따로 놔두고 나머지 국물에 쌀을 넣고 죽을 쑨다. 익은 고기를 잘게 찢어 뒀다가 쌀 국을 그릇에 담을 때 닭고기와 양념을 함께 넣는다.

연변냉면은 그 맛과 향이 독특하여 중국 내지(內地)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국외까지 진출하고 있다. 함경도에 뿌리를 둔 연변 냉면은 그동안 시장경제와 정책적 호재 속에서 그 명성을 쌓아왔다. 이 과정에서 용정의 ‘군중 냉면옥’, 연길의 ‘연길 복무 대루’와 ‘진달래 냉면’ 등 유명 냉면집들이 등장하면서 연변의 냉면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들 중에서 용정의 ‘군중 냉면옥’은 1990년대 초에 폐업을 했고, ‘연길 복무 대루’는 재건축하면서 장소를 이전해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다. 1989년에 개업한 ‘진달래 냉면’은 지금까지 선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8년 ‘진달래 냉면’의 조리법은 길림성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연변냉면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소고기 육수이다. 소고기를 쓰지 않으면 시원한 육수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소고기 중에서도 반드시 품질이 좋은 연변 황소 고기를 육수 재료로 사용했다. 연변 황소는 중국에서도 5대 우량 품종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은 시장에 가면 누구든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개혁개방 이전에는 소 도축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달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 정부에서는 해마다 연변에 냉면 육수용 소고기를 따로 조달해 주었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연변 냉면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전승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은 냉면의 상품화를 가져왔고, 냉면집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냉면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외에도 생산 수준 향상으로 냉면조리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와 식품 재료들을 시장을 통해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냉면시장은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연변 냉면은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4. 명태

냉면이 일종의 주식이라면 명태는 한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반찬이고 술안주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후 동북 땅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었던 해산물은 조선에서 수입한 명태 밖에 없었다. 건국 이전에는 자유 무역으로 두만강압록강을 넘어 각종 해산물이 많이 들어왔으나, 그 이후에는 양국 사이에 국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자유 무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 정부에서는 소수 민족 자치 구역에 한해 풍속과 전통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각종 우대 정책을 펼쳤다.

한인[조선족]들이 해산물, 특히 명태를 즐겨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국가에서는 1954년부터 연변과 함경북도사이의 명태 무역을 추진시켰다. 당시 연변의 수출 품목으로는 식량, 종이, 겨울옷 등이 있었고, 수입 품목으로는 명태 등 해산물이 전부였다. 수입량을 보면 동태 800톤, 명란과 창란 100톤, 절임 문어 60톤, 새우와 젓갈 60톤, 절임 명태 등 600톤, 기타 해산물 600톤이었다. 이후 두 나라는 무역량을 점차 늘려갔고, ‘문화대혁명’이 한창인 1970년대 초반을 제외하면 명태 무역이 거의 단절되지 않았다. 이런 무역 정책으로 중국 한인[조선족], 특히 연변의 한인[조선족]들은 명태를 민족 음식의 하나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연변에서 명태는 많은 음식에 활용된다. 평소에는 국이나 조림을 해서 먹고, 술상에서는 마른 명태를 많이 먹는다. 연변에서는 본래 황태나 북어라 부르지 않고 이들을 통틀어 마른 명태라 불렀다. 1980년대까지 북한에서 마른 명태를 수입했으나, 1991년부터 조선과 러시아에서 동태를 수입해 마른 명태로 가공했다. 마른 명태는 1990년대 초 맥주가 보급되면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상점마다 한쪽에 술상을 차려놓고 맥주와 명태를 팔았으며, 일부 자금이 충족한 상점에서는 북한산 게나 조개를 술안주로 곁들여 팔기도 했다. 소스는 라면 양념에 고춧가루, 식초, 소금을 섞고 거기에 맥주를 부어 그 자리에서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생활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음식점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상점을 선호했다.

마른 명태와 더불어 소포장으로 된 도라지 무침과 소 힘줄 무침이 상점의 주된 메뉴였다. 백주 안주로는 한족식 볶음채가 어울릴 수 있겠지만, 맥주 안주로는 명태가 한인[조선족]들의 입맛에 훨씬 맞았던 것도 명태와 상점이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이다.

1991년부터 화룡시(和龍市) 두도진(頭道鎭)의 농민들은 부업으로 덕장을 설치하고 명태 가공업을 시작했다. 두도진의 명태 가공업은 얼마 뒤 외국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급성장 했으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부 가정에서는 한 해에 수백 톤에 달하는 동태를 사들여 마른 명태로 가공을 했다. 당시 두도진에는 국내외 바이어들이 무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명태 산업이 호황을 이루었다. 그때 마른 명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연길에까지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연길에는 ‘두도 명태’라는 이름으로 명태집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은 골목마다 명태집이 없는 곳이 없다. ‘맛고명태’라는 음식점만 보더라도 2013년 현재 연길시에만 51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명태집의 주된 메뉴는 명태 콩나물 찜이며, 이밖에도 명태 껍질 순대, 명태 머리 순대, 짝태 복음 등이 있다. 명태집 요리는 맵고 짠 것이 특징인데 맥주 안주로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연변 사람들의 1인당 맥주 소비량은 중국에서도 줄곧 앞자리를 차지해 왔다. 명태집의 성공은 결국 조선족의 입맛에 맞는 맥주 안주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연변 사람들은 동태로 식해(食醢)를 많이 해먹는다. 물론 연변에서는 '식해'란 말을 쓰지 않고 ‘명태 반찬’이라 부른다. 만드는 방법을 보면, 우선 동태를 녹여 껍질을 제거한 후 살을 발라낸다. 거기에 마늘 생강소금 고춧가루로 양념을 하면 완성된다. 발라낸 뼈와 머리도 함께 다져 넣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 명란젓과 명태 내장으로 만든 창란젓도 많이 소비된다.

5. 떡

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떡은 찰떡이다. 설이나 단오 등 명절에는 모두 찰떡을 만들어 먹는다. 고향이 경상도인 흑룡강 사람들도 설에는 떡국을 먹지 않고 찰떡을 먹는다. 집집마다 떡메 치는 소리로 새해의 첫 날을 맞이하는 것이 중국 내 한인[조선족]들의 풍속이다. 결혼식에도 찰떡은 빠지지 않았고, 이외에 쉰떡과 만두기[달떡]도 함께 올랐다. 연변에는 고등학교 입시 때 학교 대문에 찰떡을 붙이는 풍속이 있다. 자식이 원하는 고등학교 대문에 찰떡을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이다.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떡을 붙일 수 있는 칠판을 따로 만들어 대문 옆에 걸어두기도 한다. 매년 이날이 되면 찰떡 가게는 사람들로 붐비며, 아침시장 찰떡 매장 앞에는 새벽부터 몇 십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찰떡을 그릇에 담는 방법도 차이가 있다. 연변 일대에서는 찰떡을 친 다음 접시에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펴고 찰떡을 한 덩이씩 베어서 그 위에 서로 붙지 않도록 놓고, 경상도 사람들은 찰떡을 칼로 베 고물에 골고루 버무려서 접시에 담는다.

‘쉰떡’을 만드는 방법도 서로 다르다. 쉰떡을 한국에서는 ‘증편’이라 부른다. 연변의 쉰떡은 직경이 8㎝ 정도로 작으며 중심에 여러 가지색소를 첨가한 고명을 뿌린다. 반면 하얼빈 지역에서는 시루떡을 하듯이 한꺼번에 찐 후 칼로 두부모 베듯이 잘라 먹는다. 그리고 찰떡을 칠 때 연변은 나무 구유나 돌판을 쓰지만 하얼빈은 절구를 쓴다.

연변일대에서는 송편을 ‘만두기’ 혹은 ‘밴새’라고 한다. 팥을 소로 넣은 것은 ‘만두기’라 하고 야채를 소로 넣은 것은 ‘밴새’라고 한다. 가령 ‘감자 밴새’는 감자 앙금을 반죽하여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은 후 시루에 찐 떡이다. ‘감자 밴새’의 소는 무와 새우로 한다. 연변에서는 교자도 ‘밴새’라고 한다. 밀가루로 만든 밴새는 ‘밀가루 밴새’, 입쌀 가루로 만든 것은 ‘입쌀 밴새’라고 하며, 물에 삶은 것은 ‘물 밴새’, 시루에 찐 것은 ‘찐 밴새’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교자(餃子)를 밴스[扁食]라고 하였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변역하면 납작한 음식이란 뜻이다. 하지만 교자는 납작한 것이 아니라 반달 모양으로 되어있다. 밴스란 명칭은 만두나 월병처럼 떡의 형태에 의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고대 시기 밴스라는 음식의 명칭을 한자로 음역하여 표기한 것이다. 밴스를 명대에는 죠얼[餃餌]이라고 하다가 청나라에 이르러 죠즈[交子]라고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믐날 밤 묵은 해와 새해가 교접되는 시각에 그 떡을 먹기 때문이다. 밴스란 말은 고대시기 어느 북방 민족의 언어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데, 밴새는 한민족 고유의 음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6. 순대

연변의 별미 중 하나는 순대이다. 순대에는 고추 순대, 가지 순대, 돼지 순대 등이 있다. 고추 순대는 돼지 고기, 찹쌀, 파, 후춧가루, 고춧가루, 콩기름, 맛내기[조미료]를 고추 속에 넣고 시루에 찐 것이다. 가지 순대는 위의 것을 가지 속에 넣고 시루에 찐 것이다. 돼지 순대는 돼지 곱창과 돼지 고기를 잘게 썰어 찹쌀, 파, 고춧가루, 콩기름, 맛내기, 물을 섞은 뒤 소금으로 간을 맞춘 것을 돼지 창자에 넣어 일정한 크기에 따라 실로 양쪽 끝을 매고 물에 찐 것이다.

주변 민족과 한국의 음식 문화 전래

중국 내 한인[조선족]들은 전통 음식의 전승과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치와 장국은 물론, 냉면, 개장국, 찰떡은 중국에서도 한인[조선족] 전통 음식으로 널리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중국 한족이나 한국의 영향으로 연변의 음식 문화도 변화되었다.

1. 한족 등 주변 민족

한인[조선족]들이 한족식 볶음채를 먹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식당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부 정부기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인[조선족]들과 한족 사이에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서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식당이 생기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식당에서는 술안주의 대부분을 한족식 볶음채로 채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서 한인[조선족]들은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족식 볶음채에는 ‘달걀 토마토 볶음’이 있다. 한인[조선족]들은 이 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인들은 토마토는 물론 오이조차 익혀 먹는 습관이 없었다. 만일 토마토를 익혀서 먹으면 독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근심을 할 정도로 이들에게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맛을 보니 밥반찬으로 훌륭했다. 얼마 뒤 ‘달걀 토마토 볶음’은 한인[조선족]들이 가장 즐겨 먹는 한족식 요리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일이 바로 1990년 즈음 연길시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한족과 한인[조선족] 사이의 음식 교류는 식당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주변 민족의 음식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전통음식으로 승화시킨 가장 성공적인 예가 바로 연변식 양고기 꼬치구이다. 연변에서는 음식점 간판에 꼬치구이를 ‘뀀점’이라 표기하지만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따 ‘촬뗀[串店]’이라 부른다. 어느 누구도 ‘꼬치구이 집’ 또는 ‘뀀점’에 가자고 하는 경우가 없다. 반드시 '촬뗀' 혹은 '촬 먹으러' 가자고 한다.

연길에 양고기 꼬치구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처음에는 길옆에서 몇 개의 구이 가마를 설치해 놓고 꼬치구이를 팔다가 날씨가 추워지자 집안으로 옮겨갔다. 초기에는 배연시설이 없어 연기를 마시면서 먹었으나 얼마 뒤에 곧바로 해결책이 나왔다. 구이 가마 밑에 구멍을 뚫고 밀폐된 파이프로 연결한 뒤 배기시설을 이용하여 연기를 밖으로 배출 시켰던 것이다. 조선족들에 의해 발명된 배기시설 덕분에 양고기 꼬치구이는 신속하게 연변 각지에 전파되었다.

연길에는 차례로 유명한 꼬치구이점들이 많이 등장했다. ‘무적 뀀성’, ‘홍 태양 뀀점’, ‘풍무 뀀성’ 등이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그중에서도 ‘풍무 뀀성’의 규모가 가장 크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지키고 있다. ‘풍무 뀀성’은 1991년에 세워진 양고기 꼬치구이 전문점이다. 지난 20여 년간의 발전을 통해 풍무는 이미 거대한 음식업체로 성장했다. 2000년에 정식으로 ‘연길시 풍무 찬음 유한 공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에 한국서울에 분점을 개장했다. 그 뒤 연길시에 본점을 둔 후 연길시에 여섯 개의 대형 분점을, 용정시, 안도현 화룡시, 매하구시, 왕청현 도문시에 여섯 개의 가맹점을 설립하여 요식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고기 꼬치구이는 현재 연변 지역 한인[조선족]의 음식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변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제일 많이 보이는 음식점이 바로 뀀점이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업종의 하나로, 이는 결과적으로 업체들 사이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부추긴다. 그 덕분에 많은 기술 쇄신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메뉴들이 개발되었다. 웬만한 규모의 뀀점이라면 백여 가지의 메뉴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맞출 수 있다. 현재 연변식 뀀점은 중국 각 지역에 전파되고 있는데, 영향력에 있어서 위구르족의 양고기 꼬치구이를 능가하고 있다. 위그르족은 간식 혹은 주식으로 양고기 꼬치구이를 만들었으나, 한인[조선족]들은 맥주 안주로 재개발했기 때문에 이런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한족 음식인 월병은 이미 연변 사람들의 추석 제사상에 올라와 있고, 단오에 먹는 ‘종자(種子)’ 역시 조선족들도 즐겨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토가족의 ‘장향병(醬香餠)’, 사천의 ‘마랄향과(麻辣香鍋)’와 ‘샤브샤브’ 등도 즐겨 먹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2. 한국

중국 내 한인[조선족]의 음식 문화에 미치는 한국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인[조선족]들은 방문 취업, 유학 등 이유 때문에 한국에 대거 진출하였는데 그 규모가 놀랄 정도이다. 한국행정안전부의 2012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 [2012년 1월 1일 기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수는 총 1,409,577명이며 이중 중국에서 온 한인[조선족]의 수는 전체 외국인 주민의 40.4%인 570,158명에 달한다고 했다. 반면 2010년에 진행된 중화인민공화국 제6차 인구조사에 근거하면 중국 경내 한인[조선족] 인구수는 총 1,830,929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략 한인[조선족]의 30%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노인과 학생, 그리고 공무원 등 정규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말이 된다.

1996년에 이미 ‘전주 비빔밥’이란 식당이 한인[조선족]에 의해 연길에서 개업을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연변 사람들에게 비빔밥이란 이름은 매우 생소했다. 일상 생활에서 ‘비벼서 먹는다’는 말이 있어도 명사인 ‘비빔밥’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이 있다면, 닦은[볶은] 콩기름을 간장과 함께 밥에 비벼서 먹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을 ‘기름밥’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주 비빔밥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음식이었다.

‘전주 비빔밥’이 생길 당시, 연길에서는 노래방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밤 생활이 거의 없었던 연길 사람들에게 “2차, 3차를 간다.”는 말이 이때부터 유행을 했다. 보통 ‘3차’를 끝내고 나면 새벽이 되는데 출출한 배를 채울 곳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주 비빔밥’은 24시간 영업을 했기 때문에 점차 소문이 퍼지면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뒤 유명 음식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1999년에는 안도현에, 2001년에는 훈춘시에, 2003년에는 용정시도문시에, 2004년에는 도문시에 분점을 개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음식 뿐만 아니라 패스트푸드도 한국인에 의해 연길에 전파되었다. 1990년대 말 연길시 공원교 근처에 ‘롯디리아’라는 햄버거 가게가 들어섰다. 당시 삼겹살 한 근 가격이 약 4원 정도였는데, 햄버거 하나의 가격이 약 10원 정도였다. 매우 비쌌지만 아이들은 그 맛에 반해 자주 햄버거 가게를 찾았다. 이 가게의 인기는 거의 10여 년간 이어지다가, 2012년에 진짜 ‘롯데리아’가 같은 건물 1층에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장사를 그만두었다.

한국의 퓨전음식도 빠른 속도로 연길에 전파되고 있다. 그 예로 ‘류가네 닭갈비’를 들 수 있다. 이 가게의 주인은 한인[조선족]인데, 한국에 있는 ‘류가네 닭갈비’ 본점에 가서 일 년간 기술을 전수받고 돌아와 2012년 4월에 연길에 체인점을 개업했다. 닭갈비는 연길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인기는 연말까지도 쭉 이어졌는데, 매번 이 가게를 지날 때면 젊은 고객들이 대기표를 손에 쥐고 삼삼오오 기다리는 정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게에는 총 22개의 음식상이 있는데, 개업 초기 하루 평균 80상의 고객을 맞이했다. 한 달이 지난 후부터는 입소문이 나면서 하루에 최소 100상 이상의 고객이 찾는 음식점이 되었다. 수입도 많이 증가하여 2012년 5월 당시 하루 평균 매출이 7,000위안에 이른다고 했다. ‘류가네 닭갈비’가 성공을 거두자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연길시에는 네 곳에 닭갈비 가게가 더 생겼다.

이외에도 연변에 전파된 한국 음식을 예로 들자면 매우 많다. 이들 음식은 연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맛을 선사했고 동시에 연변의 음식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갔다. 한국 음식이 연변에서 자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맛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고, 설령 한국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한국음식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 음식 문화의 과도한 유입은 한인[조선족] 음식 문화의 정체성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음식 명칭이 점차 한국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 내 한인[조선족]들은 본래 ‘썩장’이란 말은 썼어도 ‘청국장’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점에 가면 메뉴에 전부 ‘청국장’으로 소개되어 있고, 젊은 세대들은 아예 ‘썩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본래 ‘막걸리’라는 말도 연변에서는 ‘감주’, 흑룡강성에서는 ‘탁주’라 썼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의 영향으로 어디에 가나 ‘막걸리’로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길림성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때에도 ‘막걸리’라는 명칭으로 등재되었다.

연변의 한인[조선족]들은 한국에서 말하는 만두를 모두 ‘밴새’라 불렀다. 물만두는 ‘물 밴새’로, 조금 큰 것으로는 ‘감자 밴새’와 ‘입쌀 밴새’ 등이 있다. 한자 ‘만두(饅頭)’라는 명칭은 현재 중국에서는 소가 없는 밀가루 찐빵을 가리키는데, 한인[조선족]들 역시 만두의 개념을 이같이 사용하고 있다. 반면 연변의 한인[조선족]들이 사용하고 있는 ‘밴새’는 한자어 ‘편식(扁食)’[중국어 발음은 ‘밴스’]과 같은 말이다. ‘편식’은 북방의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사용했던 언어로 소를 넣은 음식을 뜻한다. 언어사적 의미에서 볼 때 소를 넣은 가루음식을 ‘만두’보다는 ‘밴새’라 부르는 것이 더욱 합당할 수 있다.

한국 음식의 유입은 또 다른 풍속을 낳기도 했다. 연변에서는 여인이 아이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으나 생일에는 결코 먹지 않았다. 흑룡강성의 한인[조선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룡강성의 탕원이나 아성 지역의 한인[조선족]들은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낙제를 하거나 재수가 없다고 해서 평소에 즐겨 먹지 않았다. 더욱이 길을 떠날 때에는 불행을 초래한다고 해서 미역국을 절대 먹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지역을 막론하고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먹는 풍습이 일반화되고 있다.

참고문헌
  • 연변 조선족 민속 학회, 『조선족 민속 연구』 1(연변대학출판사, 1992)
  • 연변 조선족 민속 학회, 『조선족 민속 연구』 2(연변대학출판사, 1996)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족 문화사 대계』7-민속사(민족 출판사, 2000)
  • 연변 조선족 민속 학회, 『조선족 민속 연구』 3(연변대학출판사, 2001)
  • 천수산, 『중국 조선족 풍속』(민족 출판사, 2008)
  • 천수산, 『중국 조선족 풍속 백년』(요녕 민족 출판사, 2011)
  • 심영숙 편저, 『조선 민속 지식』(요녕 민족 출판사, 2012)
  • 박영선·정영숙, 「중국 연변 조선족의 고향별 한국 전통 명절 음식과 일상 음식의 선호도와 섭취빈도」(『동아시아 식생활 학회지』17-2, 동아시아 식생활 학회, 2007)
  • 최민호, 「고집과 전통-중국 조선족 음식 문화의 변천과 특징」(『한국학 연구』31, 인하대 한국학 연구소, 2013)
  • 許輝勳, 『中國朝鮮族民俗文化及中國特色』(延邊大學出版社, 2007)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