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延邊에 남겨진 敎育의 遺跡地-잊혀져 가는 延邊의 敎育 遺跡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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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유적지 | 일제 강점기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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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일제 강점기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
과거의 북간도가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북간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인들의 가장 집중적이고 대표적인 이주 본산지였다. 그들의 이주 목적은 대개 세 가지, 생계를 위한 이주, 새로운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 확보를 위한 이주, 구국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었다. 이상과 목적은 달랐지만 그들이 선택했던 그 이상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모두 한 가지, 바로 교육이었다. 생계를 위한 삶으로부터 변화와 향상을 꾀했던 그들,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 독립운동 및 구국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 다른 것 같지만 그들 모두가 교육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은 아이러니다.
북간도는 결국 조선인 교육의 본산지가 되었고 조선인들의 교육열은 매우 드높았다. 수백 개의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고 심지어 중국 관립 학교와 일본인 학교에서도 조선인 학생 확보 쟁탈전을 진행할 정도였다. 어찌되었건 이주 조선인들의 노력은 수많은 조선인 학교들을 산생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에도 조선족 마을마다 하나의 학교가 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한인[조선족]들의 열의는 대단하였다. 북간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히 교육에 대한 열의가 아니라 오늘날의 조선족 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과거의 북간도에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날 학교 유적지가 많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흔적이 남겨져 있는 유적지도 적지 않다. 북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런 의식적인 기록 작업에 그리 민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유적지들이 역사에 묻히기도, 또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련히 사라져 가기도 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북간도의 교육 유적지 하면 적어도 이 몇 곳만큼은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몇 개 학교의 역사적 현장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기록해보고자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용정시(龍井市)에 들어서서 용정 실험 소학교를 찾으면 바로 서전 서숙의 옛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용정 실험 소학교는 용정의 시장통을 끼고 시내 중심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누구에게 묻던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용정 사람들에게 서전 서숙의 옛터가 어디 있는지 물으면 아마도 특별히 유의했거나 전공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답해 주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대한 관찰에 매우 인색한 것 같다.
다행인 것은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이곳은 용정을 답사할 때 꼭 들리는 명소로 인식된 곳이다. 관광 명소까지는 아니지만 그나마 갈 때마다 이곳은 더욱 깨끗해지고 서전 서숙 비석이 더욱 반짝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더 많은 일반인들 또는 한인[조선족], 나아가 한민족들이 이곳을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곳을 찾아주고 알아봐주는 사람은 보통 연구를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서전 서숙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이상설(李相卨)이 설립하였다. 이상설은 왜 서전 서숙을 설립하였던 것일까?
이상설은 어린시절 이용우(李龍雨)의 양자였다. 이용우는 조선 왕조의 부승지(副承旨)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사람이다. 이상설은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여조현(呂祖鉉)[여준(呂準)] 등과 함께 이제촌(李齊村)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또한 유인석에게서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종(高宗)의 고문이었던 헐버트(Homer Hulbert) 박사와 친하게 지냈다. 영어와 프랑스어, 서양의 문화 등 많은 내용을 헐버트에게서 배워 이 분야에서는 학계의 권위자가 되었다. 이상설은 승정원, 성균관 등 여러 부서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일제 침략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 황제가 훌륭하게 여겼다는 말까지 전해지는 투철한 반일 의사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상설은 이회영 등 민족 독립 의사들과 함께 민족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바로 북간도 용정이었다. 당시의 용정은 조선인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이주한 지역이기도 하였거니와 이미 수십만의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집거지역이었다. 모든 비용은 모두 이상설이 부담하였다.
지금 용정 실험 소학교의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서전 서숙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옛날 서전 서숙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마치 서전 서숙에서 진행했던 반일 교육의 목소리가 그대로 재생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이야 우리가 돌비석 하나만을 놓고 무언가를 논하겠지만 가만히 그 느낌을 되살려본다면 그때 이상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그대로 목도한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마치 수렁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누군가의 손끝을 붙잡는 것과 같은 애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인들 못했으랴! 그의 선택은 새로운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서전 서숙을 이런 마음에서 설립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서전 서숙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일 년 만에 문을 닫긴 했지만 서전 서숙의 민족적인 빛은 간도 전체 내지는 연해주 등 수많은 지역에 알려져 민족 교육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 이르면 지금도 “불함산이 높이 있고 두만강이 둘렀는데 서전 서숙 창립하니...”라는 서전 서숙의 교가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다행히 서전 서숙의 맥을 이어 용정 실험 소학교는 오늘도 한민족의 후대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전 서숙을 찾으면 이런 위로를 안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서전 서숙 옛터 용정 실험 소학교를 나와 차로 5분 정도만 이동하면 곧 용정 중학교가 보인다. 용정 중학교 대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옛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인터넷이나 그동안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용정대성 중학교 건물이다. 과거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건물만 있었는데 지금은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함께 있고 또 많이 변해 있어서 얼핏 보면 옛 건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확실히 1921년 7월 용정에 설립된 대성 중학교 건물이다.
대성 중학교는 대성 유교의 공교회가 설립한 학교이다. 개교 초기 주로 공맹(孔孟) 사상을 전수하였기 때문에 사서 오경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기본 교육 내용으로 하였다. 또한 공자의 위패를 모시면서 매달 초하루에는 존공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교육의 취지와 내용은 민족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열풍이 고조되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와 위배되는 것이었다.
1922년부터 대성 중학교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학생들은 광명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을 조직하였다. 점차 용정의 은진중학교나 동흥 중학교의 학생들도 가담하면서 이 연구 모임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공교회를 반대하여 투쟁을 일으켰고 결국 공교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새로운 사상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학생들은 젊었던 만큼 열정과 희망이 가득했다. 대성 중학교는 서서히 반일 투쟁의 주력군 양성 기지로 되어 갔고 학생들의 반일 사상은 무르익어 갔으며 졸업생들의 활약 또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지금의 대성 중학교 옛 건물에 들어가면 20세기 초 한민족이 북간도에서 살았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의 공간이 펼쳐진다. 한 장 또 한 장의 사진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교육 이야기, 투쟁 이야기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마치 그 시대로 들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돌아서 내려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교실이 만들어져 있다. 사실 윤동주는 대성 중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없고 당시 용정에 있었던 또 다른 중학교인 은진중학교의 학생이었다. 현재의 대성 중학교는 그야말로 1920년대 용정 중학교들의 현대판 통합체 내지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때의 학교들은 모두 유적지만 남았지만 대성 중학교만큼은 아직도 옛 자리에 옛 건물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것이 산 증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때 당시 가장 대표적인 민족주의 학생이었던 윤동주의 교실을 여기 대성 중학교에 설치하여 기리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이나 기타 지역의 한인[조선족]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본다. 정말 1920년대 용정의 조선인들 교육의 현장을 그대로 보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정의 육도하(六道河)를 따라 삼합(三合)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 약 30리쯤 가다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동촌(明東村)에 도착한다. 명동촌은 그야말로 북간도 관광의 명소이다. 거기는 명동 교회 옛 건물과 명동 학교(明東學校) 옛 건물, 명동 학교 옛 자리 비석, 윤동주 생가가 함께 모여 있어 그대로가 20세기 초 북간도 역사이다.
명동 교회에서는 당시 명동의 주역들과 대표적인 인물들의 사진을 걸어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윤동주 생가에는 아직도 윤동주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빈소를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간혹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누구나 거기에 가면 그런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는 간도의 조선인들에게나 지금의 한인[조선족]과 한민족 누구에게나 위대한 인물이다. 또한 북간도 교육이 만들어낸 훌륭한 인물이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면 밭 한가운데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명동 학교 터라는 비석이 옥수수 밭머리 명동 학교 건물 바로 앞 10m 발치에 있다. 명동 학교는 1910년대 명동 학교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2010년 새로 건축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그리고는 옛 교실도 재현하였고 그 속에 작은 전시관도 꾸며져 있다. 명동 사람들과 명동 학교의 옛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내용들로 차있다.
윤동주 시인 덕분에 일 년에도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지만 정작 명동 학교는 잊혀지고 있는 명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제 명동 학교 건물도 멋지게 재현해 놓았으니 사람들에게 이곳이 더욱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는 메시지가 전달될 필요가 있다. 명동 학교는 서전 서숙의 맥을 이어 북간도 교육의 선두주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명동 학교의 정신은 중국의 한인[조선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준다.
명동에서 계속 삼합[회령(會寧) 북안의 중국 변경 진]쪽으로 끝까지 가서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개산둔(開山屯)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혹은 다른 길도 있다. 다시 용정으로 들어와서 개산둔 방향으로 틀어 들어가도 개산둔에 도착할 수 있다. 개산둔은 함경북도(咸鏡北道) 종성(鍾城)의 상삼봉(上三峯) 북쪽에 있는 중국 변경의 작은 진(鎭)이다. 개산둔진에 들어서서 다시 강물을 거슬러 약 10㎞ 정도 가면 곧 자동(子洞)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이 바로 옛날 자동 학교(子洞學校)가 있던 곳이고 또 중국의 의화단 운동으로 난리가 났을 때 명동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왔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현 일가가 함경북도에서 이주하여 처음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마을 주민들이 거의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 몇 분만 마을을 의연히 지키고 있는 매우 황량한 곳이 되어 버렸다. 특히 겨울에 가면 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자동 학교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었을까?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는데 마을에서 약 200m 떨어진 산비탈 숲속에 그냥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이곳은 일부러 알고 찾지 않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곳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비석도 2008년 정동 학교(正東學校) 설립 100주년에 용정의 노장들이 주도해서 세웠다고 한다.
너무나 황량한 나무숲 한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비석이라서 사진을 찍고 돌아올 때 괜히 여러 번이고 뒤돌아 보았다. 하나는 위치를 잘 기억하고 싶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비석의 뿌리가 깊지 않아 넘어지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마을 주민들도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시에 있어 그렇게 유명했던 이 학교에 대해 전혀 느낌이 없는 눈치였다. 정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잊혀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곳을 답사하면 유난히 무언가 적고 싶고 기록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이곳은 앞에서 보아 왔던 서전 서숙, 대성 중학교나 명동 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다. 조금만 신경을 써도 그곳을 알릴 수도 있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면서 정동 학교를 떠나 다시 용정과 연길 방향으로 오다보니 회경을 거치고 덕신이라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곳은 길이 한 갈래이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기 때문에 헛갈리기 쉬운 곳이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겨우 마을을 찾아 창동 학교(彰東學校)를 물으니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또 모르고 있었다.
겨우 노인 한분에게 물어서 옛날 창동[彰東: 혹은 장동] 마을을 찾아 다시 방향을 틀었다. 그야말로 돌고 돌아 끝내 마을을 찾았는데 마을의 이름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몇 개 마을을 통합한 결과라고 한다. 지금은 남영촌(南营村)이라 불리는 이곳은 과거 조선인들이 밀집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우리가 정말 잘 알고 있었던 창동 학교 옛 터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창동 학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마을에서 제일 큰 건물이 곧 학교라는 상식에 의해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아본 결과 크고 학교 같은 건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주택으로 되어 있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윗집 아랫집을 분간하는 울타리가 설치되었으며, 운동장이었던 곳은 그 울타리 속 텃밭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이 곳은 창동 학교가 광복 이후 새로 건물을 세우면서 옮긴 자리라고 한다. 창동 학교는 1910년 가을 마을의 세 서당을 합쳐 여덟 칸 집 아래 윗방과 사랑 칸을 내어 신학을 꾸렸다. 그리고 1910년 11월 말에 새로 4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정식 개학식을 하게 되면서 창동 학교는 세상에 알려진다. 그후에는 그 어떤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민족의식 교육을 진행해왔다.
과거에는 한족이 3세대 밖에 없었다던 창동 마을이 현재는 거꾸로 한인[조선족]이 그정도로 되어버려 이곳의 촌장도 한족으로 바뀐 터라 창동 학교에 대해 인터뷰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촌장의 도움으로 어렵게 창동 학교에 대해 알 수 있다. 현재 학교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50m쯤이 옛날 창동 학교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민가였고 이제 몇 안 되는 노인들까지 안 계시면 그곳이 옛 창동 학교 자리였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냥 역사 속으로 파묻혀버릴 것이다. 그나마 자동의 정동 학교는 비석이라도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비석조차 없어 도대체 학교가 있었던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옛 창동 학교 관련된 문헌들을 보면 너무나 휘황하고 한민족의 뿌리가 깊었고 또 한때 북간도를 들썩였던 학교였는데 지금은 그 위치조차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니 참 아쉬운 노릇이다. 그냥 느껴만 보아도 낭랑한 글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말이다.
아쉽게 창동 학교를 뒤로 하고 연길로 들어와 도시의 서쪽 끝머리쯤 이화동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약 10리 정도 들어가면 한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현재 연길시소영향 민흥촌이었는데 과거 이곳을 와룡동이라 불렀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창동 학원(昌東學院)이 있던 곳이다.
창동 학원은 명동 학교, 광성 학교와 더불어 1910년대 북간도 교육의 선봉에 있으면서 민족 독립운동 인재들을 키워낸 반일 민족 운동의 요람지였다. 마을 입구에서 동쪽 비탈로 한참 올라가면 비석하나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다. 바로 창동 학원 학생들이 은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1935년에 세운 사은기념비이다. 실제 학교 위치는 맞은 켠 산중턱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현재 과수원으로 되어 있다. 그곳 역시 비석 하나 없는 상황이다.
창동 학원은 대표적인 민족 독립운동 인재 양성 기지였다. 간도 국민회의 외곽 단체인 간도 대한 청년회의 조직 본부가 창동 학원에 있었고 이곳 사생들 중에는 반일 무장 단체인 철혈 광복단의 구성원이 많았다. 그런가하면 간도를 들썩였던 15만원 탈취 사건의 조직자 가운데 세 명이 창동 학원 교사였다. 그들은 교가에서 말한바와 같이 '정신은 자유, 이상은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 틀림없다.
연길(延吉) 동쪽 끝으로 내려오면 소영자(小營子)라는 곳인데 이곳에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교가 있었다. 바로 1911년 이종호(李鍾浩)와 김립(金立)이 이곳에 있던 자그마한 서숙을 바꾸어 ‘광복 성공’의 줄임말인 '광성(光成)'이라 이름하고 독립군 학교를 설립했다. 광성 학교(光成學校)는 처음 길동 기독 학당이라고 했었는데 1914년 12월 교사와 학생 일부가 나자구 사관 학교로 가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광성 학교로 부른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위로는 산성자산(山城子山)이 솟아 있고 아래로는 해란강(海蘭江)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에 자리 잡은 광성 학교는 현재 그 옛 터의 위치를 정확히 밝히기 힘들다. 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대충의 자리를 짐작하긴 하지만 그곳에는 비석 같은 것이 없다. 이 역시 잊히고 있는 교육 유적지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광성 학교는 민족 독립 인재 양성을 취지로 하였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독립군 학교라고도 불렀다. 이동춘(李同春), 김립, 계봉우(桂奉瑀), 구춘선(具春先) 등 당대 북간도의 유명한 인사들이 주로 관여했던 학교이기도 하다. 특히 계봉우의 노력으로 역사 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던 학교이기도 하다. 계봉우는 이곳에서 직접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후 북간도조선 역사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설립 초기부터 반일 교육을 강화한 광성 학교는 간도에서 가장 과격한 배일 학교라는 지목을 받아 늘 일제의 감시를 받았던 곳이다. 지금은 그 위치마저 흐릿해져 아무런 흔적이 없이 사라졌지만 대충 짐작하여 해란강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 근처에 가면 조선인들의 뜨거운 피와 들끓는 애국 애족의 정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또 익히 알고 있는 교육 유적지이다. 북간도 민족 교육의 효시로 지목되고 있는 서전 서숙의 옛터, 연변조선족자치주용정의 실험 소학교 운동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서전 서숙 옛터 비석, 1920년대 용정 사립 중학교의 중견 역할을 했던 용정대성 중학교 옛 건물 등이 그것이다. 현재 용정시 용정 중학교 운동장 옆에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용정에서 15㎞쯤 떨어져 있는 명동촌에는 명동 학교 옛 터 비석과 명동 학교 옛 건물 모양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그곳 역시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 연변의 교육 유적지는 겨우 비석이 있거나 심지어 비석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많다. 그러한 유적지들은 점차 우리들의 시선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곳들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알아야 하는 역사의 현장, 살아있는 현재 진행형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으로라도 이를 남겨야 할 것이다. 창동 학원, 정동 학교, 창동 학교, 광성 학교 등은 당대에는 쟁쟁하게 이름을 드날렸던 학교지만 현재 그 위치와 유적지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북간도 교육의 흔적은 용정과 연길에만 있은 것이 아니다. 북간도를 당대에 크게 연길, 왕청(汪淸), 혼춘(琿春), 화룡(和龍)으로 나누었지만 안도(安圖) 지역과 돈화(敦化) 지역까지 하면 모두 여덟 개의 시현(市縣)이다. 여기서 용정과 도문(圖們)은 당시 각기 연길과 혼춘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북간도 지역에 교육의 흔적은 무수히 많았다. 우리가 그동안 기록해 온 역사서와 문헌들에 보이는 학교 유적지만 해도 수백 곳은 훨씬 넘는다. 거기에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서당이나 기타 사회 교육 기관 등을 합하면 수천 곳도 될 것이다. 마을에 십 수 호만 모여져도 서당을 꾸려 후학을 양성했다던 조선인들의 습성을 보면 얼마나 교육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교육의 유적지들이 모두 역사 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몇 안 남은 대표적인 유적지마저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마을 이름이나 지역 이름마저 바뀌면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