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일생을 조선족 교육에 헌신하여 중국을 감동시킨 김죽화 선생

한자 一生을 朝鮮族 敎育에 獻身하여 中國을 感動시킨 金竹花 先生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무순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인물 교육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12월 1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7월
학교 요령성 무순시 경제 개발구 리석채진
정의

‘중국 농촌 교육 기적’을 만든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 교장 김죽화의 이야기.

한어 학습법의 개발과 보급

요령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이석채진(李石寨鎭) 중심 소학교 교장 겸 당 지부서기 김죽화, 지위도 명예도 탐내지 않고 근 30년을 민족의 교육 사업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인물이다. 김죽화는 1948년 12월 10일, 요령성 신빈현(新賓縣)에서 태어났다. 6형제 맏딸로 태어난 김죽화는 어려서부터 전교 우수생이었지만 가난한 가정 형편을 헤아려 대학 꿈을 접고 사범학교를 지망했다.

김죽화는 1968년 요령성 조선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살의 나이에 요령성 무순시에 있는 농촌의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는 농촌 애들에게 도시 애들 못지 않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처음 맡은 과목은 산수 과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저급 학년 한어 과목을 가르치도록 했다. 조선족 학교에서만 다녔던 그에게 한어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였다.

김죽화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혼자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족들에게 물어가면서, 라디오를 청취하면서, 『신화자전(新華字典)』을 찾아가면서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그의 집안의 벽에는 온통 한어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가 해어지도록 쓴 『신화자전』이 세 권이나 될 정도였다.

끈질긴 노력으로 김죽화는 마침내 한어과 교수에 필요한 415개 음절과 3천여 개의 한자를 숙달하였고 문장 유형들을 익혔다. 이로써 한어를 가르치기 위한 기본을 충분히 쌓게 된 것이다.

김죽화는 “교수는 예술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려면 그들의 특점에 알맞은 교수 방법이 따라가야 한다.”는 교육 철학으로 반복적인 탐색과 선택을 거쳐 조선족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수법을 도입하였다. 한어과 수업을 사회화하여 학생들의 한어 학습 흥미를 돋우었고 새로운 식자법, 단어 기억법, 문장 작성법 등으로 지식 전수에 온힘을 다하여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교수 과정에서 그는 한족 학교의 교수 방법을 본 딴 한어 수업이 조선족 어린이들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조선족 어린이의 특성에 맞게 ‘한어 학습 특수 법칙’을 모색하였다, 조선족 어린이들이 한어 학습을 어려워하는 4가지 이유를 찾아내어 「6가지를 끌어내는 방법」을 종합해 냈다. 이를 계기로 김죽화는 1978년, 29세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특급 교사가 되었다.

그 뒤 김죽화가 만든 한어과 교수법은 조선족 소학에 알맞은 과학적인 교수법으로 인정 받아 1982년 동북 3성에 전면 보급되었다. 그가 쓴 논문들은 20여 종의 신문과 잡지에 실렸고 그의 경험과 성적은 요령성 텔레비전 방송국과 중앙 텔레비전에서 방송되었다.

김죽화의 이석채 현상

김죽화는 1985년 요령성 무순시 교육 학원 중문 학부를 졸업한 뒤에 더 좋은 사업 환경을 마다하고 농촌 소학교로 돌아왔다. 1986년 학교의 교장 겸 당지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는 요령성에서 최고의 문명 학교를 꾸리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학교 지도부터 일반 교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학교 관리부터 교수 개혁에 이르기까지 여러 면에서 수칙을 세우고 전교를 단합시켜 학교 건설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였다.

김죽화는 교육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일로써 전 사회적인 동원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고 학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학교 건설을 위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는 주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회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주동적으로 촌민 위원회에 학교 사업 정황을 회보하고 건의를 제기하였으며 주동적으로 학부모 학교, 학부모 위원회, 새일대 관심 위원회 등을 만들어 학부모와 사회의 협력을 얻어냈다. 또한 주도적으로 촌의 여러 교육 조직 사업에 참가하여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의 사업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으며 주도적으로 학교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김죽화의 이러한 노력에 학부모와 촌민들은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담하게 꾸려지고 민족의 후대들이 학교에서 건실하게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학교의 일에 발벗고 나섰다. 학부모 회의와 공개 교수 시간에 참석하는 학부모는 보통 98% 이상이었으며 1984년도부터 1996년까지 촌에서 학교에 투자한 자금과 촌민들이 희사한 금액은 모두 60여 만 원이나 되었다. 이에 대해 교육학을 전공한 한 학자는 이 현상을 ‘김죽화의 이석채 현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시 교육위원회와 민족 사무 위원회는 연합 통지를 내어 그의 경험을 널리 알렸다.

피나는 노력은 보람 있는 결과를 안겨주는 법이다. 김죽화가 애쓴 보람으로 학교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1996년도까지 학교의 68% 교원이 상과 시습 우수과목 교원 수준에 이르렀고, 50% 이상의 교원이 국가급, 성급, 시급 회의에서 우수한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중국 교육과 민족 교육의 선양

김죽화는 1985년 11월 중국 청년 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 환영식 연회석에서 일중 우호 협회의 몇몇 재일본 동포들이 전국 청년 연합 위원회의 상무 위원으로 참가한 김죽화를 보고 그의 앞에 다가오더니 “일본에 있는 우리 70만명 재일 동포들은 정치적 지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10억 인구인 중국에서 파견한 대표단 가운데 조선족 여교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말 우리 전 세계 동포들의 자랑입니다!”하며 감격하였다.

1985년 이래 김죽화는 10여 차례 해외로 나가 고찰 방문과 학술 교류를 진행해 왔다. 그녀는 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방문할 때마다 매번 뛰어나게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는 그의 뛰어난 외교 능력과 지혜, 풍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수양으로 이룬 성과였으며,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기반이 된 결과였다.

2005년 11월, 김죽화는 일본 외무성에서 이 학교를 방문하자 그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였고 학교 새별 예술단의 장기를 선보이며 정성을 쏟았다. 김죽화는 “때론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이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뛰어난 공연은 중일 두 나라 학생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며 따라서 중일 친선을 강화하는 출발점으로 된다.”라고 역설했다. 이 말대로 어린이들의 공연은일본 방문단을 감화시켰다. 일본 외무성은 어린들을 일본에 초청해 일본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일본자민당다케베 쓰토무의 말에 따르면 일본 정부 측에서 대형 어린이 방문단을 초청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새별 예술단의 일본 방문 기간 중 다케베 쓰토무는 한 만찬회에서 “일중 친선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정부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민간적인 교류를 많이 가져야 하며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교류도 이루어져야 한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은 중일 친선 교류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자민당다케베 쓰토무는 이 학교의 ‘명예 교장’으로 초빙되었고 명예 교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학교에 후원금을 보냈으며 사천 문천 지진 때 가장 먼저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학교의 명예 교장이며 요령성 교육 기금회의 유일한 외국인 이사인 일본후지 계기 주식 회사이토 세이시 사장도 5년 동안 교육 사업에 200만원을 기증했고 많은 빈곤 학생들을 후원했으며 희망 소학교 3개소를 세워주었다.

선전부장 사직과 학교로의 복직

김죽화는 무순시 정부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1993년 7월, 중공 무순시위로부터 무순시 순성구위 상무 위원, 선전 부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런데 김죽화는 오전만 근무하고는 시위 서기에게 사직서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도 사업은 저에게 알맞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교원 사업이 적격입니다.” 시위 서기는 “잘 생각해보시오. 이는 김죽화 동무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택입니다. 조직에서는 동무가 당을 위해 더욱 큰 공헌을 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재삼 만류했지만 김죽화는 “나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단언했다.

농촌 소학교 교단에서 장장 41년을 보냈고, 25년간 교장을 맡았던 김죽화는 감회가 깊다. 도시로 진출할 기회도, 그곳에서 승진할 기회도 많았지만 어릴 때 가정이 어려웠던 탓으로 여러 번 학업을 포기할 뻔했던 그녀였기에 추호의 후회도 없이 농촌 학교에 뿌리를 박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왔다.

학교는 구, 시, 성급 문명 학교, 시 규범 학교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도에는 요령성 9년제 의무 교육 보급 검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촌 소학교는 10여 년간 요령성 문명 학교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시의 뇌봉(雷鋒) 학습 선진 단체, 시 덕육 교육 선진 단체, 시 교수 기능 우승 단체, 시 교수 개혁 선진 단체 등의 영예도 차지했다.

학생들의 성적도 전 시의 조선족 소학교 가운데 우수하여 시 지식 경연에서 단체 1등과 개인 1등을 휩쓸었다. 특히 전국 올림픽 수학 경연에서는 특등상을 받아 해당 학생이 한국에서 열린 세계 경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1993년 7월 중국 공산당 무순시 순성구 위원회의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녀는 30여 년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민족 교육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다.

김죽화가 전국 명문 학교로 만든,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

김죽화 교장을 따라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에 들어서니 '중국 명문 학교'라는 붉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학교 건물 외부와 건물 입구, 복도 등 빈틈없이 공간을 활용하여 세계 196개 나라의 국기, 56개 민족, 1040개의 성구, 39개 교통 표지, 『제자규(弟子規)』나 『삼자경(三字經)』 등의 내용, 좋은 행위 습관, 행위 방법에 대한 글귀 등으로 교정을 꾸몄다.

교정 전체에는 학생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글귀가 넘쳐났다. 특히 이러한 내용들은 유치원의 3살짜리 어린이로부터 소학교 1학년~6학년까지의 모든 학생들이 실천에 옮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원들, 심지어 60세인 교장까지도 예외 없이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죽화 교장은 “저는 교장으로서 ‘교원에게 요구하는 모든 일은 교장부터 실천해야 하고 학생에게 요구하는 모든 일은 교원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교육 원칙을 줄곧 견지해왔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원칙 아래 김죽화 교장은 그녀 자신부터 2주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삼자경』, 『제자규』를 다 외우고, 부교장에게 검사를 마친 다음 교원들에게 한 달 내에 다 외우도록 요구했다. 어떤 교원들이 중도에 포기하자 김죽화 교장은 외우는 방법까지 가르치면서 모두를 교내 시험에 합격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김죽화 교장은 방학이면 교원들을 이끌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조선어·수학·한어 등 18개 교재와 교수 요강을 연구한다. 그리고 교원마다 교수안을 작성토록 한 후 교원 한 사람씩 직접 대면하여 면담을 진행한다. 교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교과 지도 물품까지 연구하여 만들면서 지도한다.

또한 그녀는 혼동하기 쉬운 글자, 단어들을 전부 수집하여 『한어 보통말 기초 지식』 교재를 편찬했으며 교원들이 정확하게 빨리 습득할 수 있는 방법 하나하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교원이 한 글자, 한 문제를 틀리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단지 한 글자, 한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아 수십 명 학생들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항상 교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교수법을 갖추고 수업 효율을 높이도록 요구하곤 했다.

김죽화 교장부터 솔선수범하여 이끈 이 학교 교원들은 100%가 동북 3성, 성급, 시급의 모범교원이다. 모범 교원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지·덕·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훌륭한 학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45년에 설립된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에는 2004년 현재 재직 교원이 30명, 재교생이 435명이며 교수 청사와 종합 청사 부지 면적이 6,200㎡이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 훌륭한 교사들이 있으며 교사들의 자질이 아주 높다.

학교의 30여 명 교사 가운데 중특급 교사는 10명이고 중학교급의 고급 교사가 2명, 소학교급 고급 교사가 20명이다. 또한 단과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교사가 23명, 중등 사범 학교 학력을 가진 교사가 2명이다. 교사들의 평균 연령은 33세이며 90%이상의 교사들의 시급 이상의 우수 교수상을 받았고 성급 이상 신문, 간행물에 6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석채 조선족 소학교는 김죽화 교장을 비롯한 전체 교사들의 꾸준한 노력과 광범위한 학부모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의 민족 교육 발전에서 모범적인 역할을 다하여 중국 민족 교육 발전에 큰 기여를 함으로써 연속 10여 년 간 요령성 정부로부터 문명학교로 선정되었고 전국 600개 중국 유명 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2009년 10월 1일, 김죽화[61세]는 중국 국가 교육부의 요청으로 전국 1,600만 명 교원들을 대표하여[총 69명 교원 대표 중 일원]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돌 축제’에 참가하였다. 2013년 8월에는 김죽화의 일대기를 엮은 책 『김죽화』[한어문판]가 출판되었다. 2014년 12월 김죽화는 요령성 교육기금회 이사장으로 당선되었다. 요령성 교육 기금회는 요령성 AAAAA급 사회 단체로서 1988년에 설립되었는데, 그동안 1억 1000만 원의 기금을 모아 9만여 명의 빈곤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참고문헌
  • 황해암, 『김죽화』(요령성 교육청, 2013)
  • 「민족 교육계에 핀 탐스러운 꽃송이-요령성 무순시 리석채진 중심 소학교 교장 겸 당지 부서기 김죽화에 대한 이야기」(『중국 조선어문』 4, 1997)
  • 「김죽화, 요령성 교육 기금회 리사장으로」(『요령 신문』, 2014.12.30)
  • 「중국 조선족의 20명 "감동 중국 조선족 걸출 인물"-5 김죽화」(『연변 위성 방송』, 20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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