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마지막 조선인 기생, 명창 신옥화를 만나다

한자 -朝鮮人 妓生, 名唱 申玉花를 만나다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심양시 소가둔구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예술인 명창 신옥화의 삶에 대한 면담기
정의

마지막 조선인 기생이자 명창인 신옥화(申玉花) 면담기.

개설
우연한 데이트

요령성(遼寧省)의 주요 한인[조선족] 마을 답사를 마치고 심양(瀋陽)에서 귀국하는 날 오전 우리 팀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아침 일찍 짐정리를 마친 상태라 가져온 책을 뒤적이며 약간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연변대신광호 교수가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한인 소리계의 신화적 존재로 알려진 신옥화 선생이 계신데 한번 찾아가보자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장에서 생생한 자료를 만나는 것만큼 민속 전공자에게 더 큰 기쁨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 교수를 채근하여 길을 나섰다.

심양시 소가둔(蘇家屯)의 낡은 아파트에 들어서자 단아하게 머리망을 쓴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신옥화 선생이었다. 96세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고운 얼굴이지만, 작은 체구의 노인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기운에 눌려 방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선생은 한참 동안 우리 얼굴 하나하나를 훑어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더니, 갑자기 민속 음악을 전공한 신광호 교수에게 “오가전집이 뭔지 알아?”라고 질문을 던진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워하자, 신옥화 선생님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라고 하면서, “우리 조선 민족은 이걸 잊으면 안 되지.”라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잠깐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신옥화 선생은 한 많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녀의 장대한 소리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많은 어린 시절과 권번에서의 소리공부

신옥화는 1919년 전라북도 전주시 구이면 흑석골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송곳 꽂을 땅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의 딸로 자랐다. 신옥화의 나이 아홉 살 때 지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는 젖먹이 남동생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잠결에 깨어 엄마가 없는 것을 눈치 챈 신옥화는 울부짖으며 정신없이 찾아 나섰다.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길을 잃어버린 어린 신옥화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후 11살까지 여섯 차례 여러 집을 전전하며 온갖 서러움을 받으며,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13세가 되던 설날 우연히 이동백(1867~1950) 명창의 판소리 공연을 본 후 소리에 빠지게 된다. 13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조선의 명창들인 이동백, 김정이 등이 공연하러 왔다. 공연을 보고난 신옥화는 좀처럼 잠들 수가 없어 양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소리 할래.” “아이고 이년, 그건 기생이나 쌍놈이나 하는 거다. 다시 입 밖에 냈다가는 입을 찢어놓겠다.” 하지만 소리에 미친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 후로는 거지가 ‘장타령’을 부르면 거지를 따라다니며 ‘장타령’을 함께 불렀다. 또 엿장수가 ‘엿장수 타령’을 부르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엿장수 타령’을 함께 불렀다. 경기도 아리랑을 좋아해서 어디서든 부르고 다녔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리랑 계집애’라고 부를 정도였다.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신옥화의 바램을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양부모는 14살이 되던 해에 인천직업소개소를 통해 인천 인항권번(仁港券番)에 보내주었다.

당시 권번에는 36명의 기녀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 1년은 시조창을 배우고, 다음은 여창, 남창, 별곡, 잡가, 휘모리잡가 등 서도소리를 배운 후에 적벽가 등 판소리를 배웠다. 신옥화는 겨울에는 눈 위에 앉아, 봄부터 가을까지는 인천 앞바다 만곡공원에 올라가서 파도에 목소리를 비기면서 목에서 피나도록 목청을 틔우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소리 연습으로 풀곤 했다.

타고난 재능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다

당시 서울극단에서는 춘향역을 찾기 위해 전국의 권번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옥화가 그들의 눈에 들었다. 서울극단 소리꾼들은 신옥화의 소리를 듣고, ‘천재성’을 타고 났다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3개월간 춘향가를 연습한 후 창극 ‘춘향전’의 춘향역을 맡아서 전국 순회를 하며 20여 차례 공연을 했다.

18세가 되던 1936년에 뛰어난 성적으로 권번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청진(淸津)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에 남도소리와 가야금의 대가로 이름난 지만수 선생과 사제지간이 된다. 그때는 어린 기생들과 함께 수업할 수 없어서, 혼자 비싼 수업료를 내고 하루에 2시간씩 6개월간을 배웠다. 소리와 현란한 가야금 솜씨에 지만수 선생은 “귀하디 귀한 솜씨를 가졌다.”라는 평을 해주며 신옥화를 아껴주었다고 한다.

결혼, 이혼 그리고 가족사 이야기

신옥화는 당시 군대에서 운전수를 하던 총각과 몰래 만나곤 했는데 소리 공부를 하면서 진 빚을 갚기 위해서는 22세까지는 권번에 묶여 있어야 했으나, 남편 될 사람이 빚을 갚아줘서 19세에 결혼을 했다. 1944년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이주를 했고 광복을 맞으면서 한인 부녀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다가, 새롭게 창립된 ‘목단강시 조선인문공단’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 “탈선된 해방”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선생은 어릴 적 엄마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늘 한으로 남았었다. 결혼 후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작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공동 묘지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의 묘를 찾아 잔디를 새로 입히고 당시 돈으로 70전을 비석 위에 올려두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도 찾았는데 그때까지 그녀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을 버리고 간 엄마지만 어렵게 사는 모습이 불쌍해서 집을 사드리고, 돈 150원을 드리고 왔다. 당시 소고기 1근에 15전할 시절이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남동생 신동석은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는데 동생이 19세 되던 해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가 군대에서 사망했다. 데려올 때는 장가도 보내고 살 잘게 해주고 싶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생각만 하면 애간장이 닳고,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남아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평안도 사람으로 3대 독자였다. 그런데 신혼 초에 선생이 눈밭에 넘어져서 유산을 한 후 10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시댁의 눈총이 보통 사납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당신은 평양으로 가 새장가 들어 자식도 보고 살아라.” 하고 남편을 보내줬다. 그리고 서른이 되는 해에 두 번째 남편을 만나서 심양시 소가둔으로 이주하여 농사 지으며 소리와는 단절된 삶을 살았다. 두 번째 남편은 그녀가 소리를 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렇게 한동안을 소리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한인 사회에 소리의 씨를 뿌리다

연변가무단에서는 유명한 한인 민간예술인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신옥화의 거주지를 알아내어 1954년 방문을 하게 된다. 처음에 남편은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며 극구 반대를 했지만 가무단에서 수차례 방문하여 간곡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결국 따라나섰다. 당시 상황을 연변 다큐방송국의 '한에 얽힌 노래'를 통해서 알아보자.

12. 내레이션: 그때로부터 연변가무단에서 한 장 또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1953년 말경에 연변가무단에서 옥화를 모시러 심양에 찾아왔다.

단원: 편지를 무려 열 번이나 보냈어도 답장이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옥화: 편지를 10통이나 보냈다고요? 전 한통도 받은 적이 없는데요.

단원: 그럴 리가?

옥화: 당신은 연변가무단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남편: 내가 몽땅 받았소.

옥화: 그걸 어쨌어요?

남편: 몽땅 태워버렸소.

단원: 허참!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선생님의 소식만 기다렸습니다. 우린 정말 신옥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남편: 배울 게 있으면 이곳에 와 배우면 될 거 아니요? 왜 하필이면 남의 가정주부를 연변 에 불러가려는 거요? 남의 가정을 파괴하려 거든 다시는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 오!

13. 내레이션: 연변가무단에서는 계속하여 옥화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또 직접 일 곱번이나 사람을 보내 최옥화를 청하였다.

이듬해 여름, 논김을 다 매고 촌간부들이 신옥화네 집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우편배달부가 연변가무단에서 보낸 편지를 배달하였다.

촌장: 연변가무단에서 이 집 아주머니께 편지가 왔구먼. 이 집 아주머니가 예술에 장끼가 있는 모양이구먼.

옥화: 연변가무단에서 편지만도 20여 통 보내고 사람을 보낸 차수만도 일곱 번입니다.

촌장: 성의가 대단하군요.

옥화: 김을 다 매고 짬도 있으니 한 번 가서 나의 정황도 솔직히 말하고 죄송하다는 말도 드려야지요. 그들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면 그들이 날 건방지다고 욕할 것이 아닙니까?

촌장: 박 동무, 아주머니를 보내주시오. 당에서 수요하고 인민이 수요한다면 선뜻 나서야지 요. 왜 아주머니의 뒷다리를 잡아당깁니까?

남편: 그럼 일주일 말미를 줄 테니 일을 빨리 끝내고 돌아오오.

옥화: 기차를 타는 데만 이틀 걸리는데 일주일에 어떻게 갔다 올 수 있어요? 적어도 2주일 은 걸려야 합니다.

14. 가무단 단장실

단장: 기차 타고 오시느라 피곤하시겠는데 사흘간 푹 쉬시오.

옥화: 두 주일 말미 맡고 왔는데 사흘간 쉬고 나면 무슨 일 하겠습니까? 아무 일이나 맡겨 주십시오.

단장: 지금 연변가무단에는 음악조, 성악조, 무용조, 연극조가 있습니다. 우리 가무단에는 지금 배우들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가가 결핍합니다. 예술을 지도할 수 있는 선생님 들을 여러 번 물색했지만 그렇다할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무단에서는 선생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옥화: 제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단장: 선생님은 인천에 있을 때 창극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했다면서요?

옥화: 네, 그랬지요.

단장: 이번에 우리 가무단 연극조에서는 조선 고전명극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 창극 춘향의 역을 맡으면 어떻습니까?

옥화: 그건 안 되지요. 저에겐 두 주일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단장: 그럼 연극조 배우들에게 우리 민족의 풍속과 표현에 대해 지도해주십시오.

옥화: 여기에 왔던 바에 성악조, 음악조와 무용조의 배우들도 가르쳐 주려고 생각합니다.

단장: 그럼 우리야 더 좋지요. 음악조의 배우들에겐 장구 치는 것과 가야금을 타는 기예를 가르쳐주고 무용조의 배우들에겐 민속무용을 위주로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옥화: 그럼 매일 한 개조에 두 시간씩 배당하면 어떻습니까?

단장: 하루 8시간 가르치면 너무 무리하지 않습니까?

옥화: 우리 민족 예술사업을 일으켜 세우는 일인데 저도 한몫 해야지요.

연변가무단의 배우들에게 장고, 가야금, 무용, 민요, 판소리 등 하루에 10시간씩 지도를 하여 연길에서 ‘춘향전’을 시연회에 올렸는데 갈채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300여 차례의 전국 순회 공연을 펼쳤다.

1956년에는 신옥화 등이 가르친 농악무, 부채춤 등이 북경에서 찬사를 받고, 이어진 전국 순회 공연에서 한인 가무의 열풍을 일으킨다. 전국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신옥화는 한인 전통음악의 큰 스승으로 인정받게 된다.

심양으로 돌아와서 생활하던 중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면서 신옥화는 연변예술학교 민족성악교원이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200여 수의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을 정리하고 집필하여 한인 국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58년 연변예술학교는 당시 조선국립고전예술극장에 소속되어 있던 지만수 선생을 초청하였다. 지만수 선생은 연변예술학교 교장에게 “서도서리와 남도소리에 모두 능한 사람은 조선의 임소향과 중국의 신옥화 둘뿐인데 나를 초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라며 신옥화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리고 1년 동안 매일 아침을 거르지 않고 사과주스를 직접 짜서 드시게 하는 등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지만수 선생이 귀국할 시점에 신옥화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로 전국 순회 공연 중이어서 뵙지 못했는데, 만년필을 사두고서는 “날 본 듯이 사용하라.”라고 적어놓고 가셨다. 1962년과 1964년에는 연변창극연구소조에서 창극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잡귀신으로 몰리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잡귀신’으로 몰려 돈화(敦化) 쌍두대대에서 이른바 ‘노동개조’를 4년 동안 받았고 1974년 55세가 되던 해 풀려나 곧바로 연길로 돌아와서 2년 후 정년퇴직을 하였다. 현재 연길에서 국가 1급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선옥, 전화자, 강신자를 비롯해서 대학교와 문화단체에는 선생의 수많은 제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6년 도시생활에 신물이 났던 신옥화는 다사다난했던 연길에서의 생활을 접고 심양시 소가둔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옥화 선생이 정년으로 퇴직하고도 조직으로부터 퇴직금을 비롯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지금까지 30년째 20㎡도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에서 200원이라는 정부보조금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평생 150여 수의 잡가와 판소리, 시조를 불러 채록한 그녀의 노년이 이렇게 대접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한인 소리계의 전설이 되다

75세가 되던 1993년에는 ‘신옥화 여사 예술 생애 60돌 기념 가창 모임’에서 춘향전을 4시간에 걸쳐 1막~6막까지 부르기도 했다. 2000년 심양에서 ‘신옥화 음악회’를 열고 중국 중앙(CC)TV에도 출연했으며 2006년 심양시 우수 민간 연예인과 요령성 우수 민간 연예인 칭호를 받았다. 2007년에는 89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연변 춘제 완후이[春節晩會]에 출연,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 해에 연변TV방송국과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의 합작으로 된 다큐멘터리 『민간예인 신옥화』가 제작되었다.

선생은 95세가 되던 작년까지도 심양시 소가둔 노인회관에서 소리와 장구 등을 가르치며 믿기 어려운 열정을 쏟고 계셨다. 조국을 떠나 있지만 신옥화 선생의 삶은 한인 소리 역사 그 자체이며 그가 뿌린 소리의 씨앗이 풍성한 결실을 맺음으로써 한인 소리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다시 이어진 고향 전주의 인연

2010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김영배 부위원장이 신옥화 선생을 방문하여 그 동안의 업적을 기리며 성금을 전달하였다. 이 성금은 축제 조직위원장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과 조직위 고문 안숙선 명창 등이 축제 성공을 기념해 사비를 털어 마련한 기금 중 일부였다. 이 자리에서 김영배는 “전주세계소리축제 무대에 설 기회를 마련하겠다.”라고 약속하며 건강을 기원했다. 이에 신옥화는 “17살에 고향을 찾아본 뒤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잊지 않고 찾아준 데 감사드린다.”라며 “나도 기회가 되면 전주소리축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하고 싶다.”라고 희망하기도 했다.

2012년 한국 국악방송에서 신옥화 선생의 일생과 소리를 다룬 내용이 방송되었다. 국악방송(수도권 FM 99.1MHz)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은 연말 특집 ‘조선족 명인명창’을 2011년 12월 18일부터 4주간 일요일 오후 6시에 방송했다. 특집 진행은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장이 맡았다. 12월 18일에는 김인석 장구 명인과 이병창 명창을 소개했고 25일에는 김철호 퉁소 명인, 이명자 가야금 명인, 2012년 1월 1일에는 이교영 농악 명인, 박학철 해금 명인, 1월 8일에는 신옥화 명창의 인생과 음악을 방송했던 것이다. 제작진은 '특히 중국심양에 거주하는 신옥화 명창의 90년 인생 이야기는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오랜 시간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신옥화 선생의 마지막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운명은 나를 조롱하고 괴롭혔지만 전통 음악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지금껏 용케 버텨왔다. 사람들은 중국 한인[조선족]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나는 나대로 노래에 울고 웃으며 살고 있다.”

참고문헌
  • 「판소리에 울고 웃으며」(『연변일보』, 2008. 9. 4)
  • 「中조선족 명창 찾은 ‘전주소리축제’」(『연합뉴스』 2010. 10. 16)
  • 「우리 소리의 살아있는 전설-무형문화재」(『연변일보』, 2011. 8. 30)
  •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특집 조선족 명인명창」(『국악방송』,2012. 1. 8)
  • 인터뷰(요령성 심양시 소가둔 거주, 신옥화, 96세, 2008.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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