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在韓中國 同胞-集居地 擴散-追跡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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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지리/인문 지리|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대한민국 |
| 시대 | 현대/현대 |
| 재한중국동포집거지 | 서울의 가리봉동에서부터 확산되어 대림,신길, 신림, 광진구 건대부근 등 지하철 2호선을 따라 동포들의 주거지가 확산되는 추세임. 동포들만의 주거형태에서 한국인들과 혼거하는 형태를 띠는 방향으로 변화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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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2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5년~2007년 |
| 집단주거지 | 가리봉동.신길동.대림동. 신림동 등 |
중국 동북 3성[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재중 동포[조선족]들의 한국 이주와 집거지의 형성 및 확산 과정.
중국 정부의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은 조선족이 국내·외로 이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 이후 조선족의 이동 본격화하였다. 그 경향은 인근 도시지역, 북경·상해와 같은 거대 도시와 위해·연태 등 연해 지역, 한국·미국·일본 등 외국으로 이주해 갔다. 특히 조선족의 한국 이주는 1992년 한중수교 및 한국 정부의 정책 시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이뤄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내 노동 시장에서 3D 업종에 대한 인력난이 심화되자 정부는 조선족 동포가 여행사증만으로 3개월의 한국 체류가 가능한 조치를 취하면서 입국을 허용하였다. 또한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의 친척이 초청허가서를 보내주어 모국 방문이 증가하였다. 조선족의 초기 국내 유입은 노동력 유입과 친척방문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조선족 입국자 중 일부가 귀국하지 않고 불법 체류하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초청허가제도’를 폐지하고 조선족을 중국 국적의 외국인으로 재규정하여 사증을 발급하였다. 그리고 친척의 초청 대상도 ‘60세 이상, 친척 5촌 이내, 인척 4촌 이내’로 제한하는 입국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국내 노동시장의 인력 부족난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정부는 ‘산업 기술 연수생’ 제도를 도입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은 이 제도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장기 체류자가 많아졌다. 그런데 이 또한 직장 이탈, 연장체류, 임금체불 등의 문제가 파생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중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이 노동 이주를 위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를 촉진케 한 것은 노동을 통한 소득 증대, 동일한 언어 사용과 한민족이라는 문화의 공유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1990년 중반 이후, 조선족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일정한 체류 기간을 넘어서 귀국하지 않음으로써 불법체류자 사회문제로 부상하였다. 한국 정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맞아 자진신고자에 한해 출국을 2003년 3월 말까지 유예한다는 ‘자진신고유예정책’을 발표하였고, 10만 명의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이 혜택을 받았다. 이에 일시적으로 서울 가리봉동의 음식점·노래방·오락실 등이 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 정부의 재외동포에 대한 출입국정책의 변화 또한 조선족의 국내 유입을 촉진하였다.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 동포 초청 대상의 연령을 기존의 60세에서 50세로 낮췄다. 2002년 2월에는 단순노동 시장에서 조선족 우대 정책의 일환에서 취업관리제를 시행하였다. 2003년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를 제정했으며, 2004년부터 조선족을 재외동포로 분류하여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법적으로 분리하였다. 2005년과 2006년에 불법 체류자에 대한 ‘자진출국프로그램’ 시행, 2007년 ‘방문취업제’ 및 ‘재외동포사증’의 확대 적용으로 방문취업비자(H-2)를 취득한 무연고 조선족의 한국 체류가 허용되면서 조선족 동포들은 합법적인 신분으로 모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방문취업제의 도입 이후, 조선족의 한국 이주에 있어 이동의 자유 확대, 이주 시 저비용, 불법이나 미등록 체류 신분에서 탈피, 계절노동(seasonallabor)의 가능, 장기적인 체류 보장 등이 유용성으로 작용하였다. 또 다른 변화는 조선족의 방문 취업이 보편화하면서 먼저 입국하여 정착한 부모나 친척의 자식 세대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다. 젊은 세대는 유학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모국에 입국하였다. 가족이나 친척 등 혈연이 연결고리로 작용한 조선족의 한국으로의 연쇄 이주는 개인 단위의 이주에서 세대 간 이주로 바뀌었다.
중국에서 이주해 온 조선족들이 초기에 정착한 곳이 가리봉동이었다. 1960~1970년대에 걸쳐 설립된 공단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가리봉동은 1980~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경기의 불황, 외환 위기로 인한 기업의 부도 등으로 공장들이 이전 혹은 폐업함에 따라 공동화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도시의 주변인’으로 부르는 가출 10대 청소년, 일용직 노동자, 실직자, 노숙자, 독거노인 등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후 1990년 중반부터는 중국의 조선족들이 가리봉동의 쪽방을 채우면서 벌집촌이 조성되었다.
이처럼 조선족 동포들이 가리봉동에 집거지를 형성하면서 2000년 전후로 그곳은 조선족 최대의 집단 거류지로 변모하였다. 2014년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총 1,576,034명으로 이 가운데 약 1/3에 해당하는 553,949명의 조선족이 국내에 체류하였다.
2000년 초반, 조선족을 포함한 대다수 외국인은 거주 지역에 미등록 상태로 체류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잘 나타나지 않았다.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012년 서울시 주민 등록 인구 기준으로 6,691명으로 전체 가리봉동 인구의 약 43%를 차지하였다. 이들 연령대는 40~50대로 5년 미만의 단기 체류자가 대부분이었고 저임금 직종에 근무하는 비율이 높았다. 단기간에 돈을 벌고 중국으로 귀환하는 1인 세대가 많았기에 저렴한 주거비용 장소로 찾은 곳이 가리봉동이었다.
가리봉동은 이주한 조선족을 비롯하여 외국인들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가리봉동은 ‘쪽방’으로 부르는 저렴한 월세방이 많았다. 가리봉동은 서울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월등히 낮은 임대료로 거주할 수 있었기에 조선족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4.95㎡(1·5평) 크기의 쪽방 월세는 평균 15~20만 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생활환경은 열악하였다. 노후 주택이 많았으며, 쪽방 입주자는 공동 화장실 이용과 다가구 입주, 사생활 침해가 빈번하였다.
1개 단독주택의 쪽방 입주자는 적게는 20가구부터 많게는 40가구가 생활하였다.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80%는 개인 세대가 많은 관계로 ‘쪽방’으로 개조된 단독·다가구 주택에 거주하였다. 경제적으로 조금 사정이 나은 조선족의 경우에는 옥탑방이나 반지하에 거주하였다.
가리봉동은 경기도 안산시의 외국인 거주지와는 다른 특성을 보였다. 안산의 경우, ‘반월공단’을 중심으로 동남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제조업에 종사하는 산업 노동자들이 다수를 점하였다. 반면에 가리봉동은 친척 방문으로 유입된 조선족 노동자 외에도 중국의 한족들까지 추가적으로 유입되면서 중국 국적자의 집거지로 부상하였다.
둘째, 가리봉동에 조선족의 유입을 촉진한 또 다른 요인은 편리한 교통 여건이었다. 가리봉동에 일용직 인력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이동이 많고 계약기간이 일정하지 않은 직업적 특성상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편리한 교통의 접근성을 선호하였다. 타 외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중소도시의 산업단지 주변에 집거지를 형성한 것과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가리봉동의 조선족 동포들이 빈번하게 이용하는 장소는 중국식 상점이 밀집해 있는 가리봉 시장이다.
가리봉 시장은 지하철 1호선 가산 디지털 단지역과 7호선의 남구로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매우 용이하다. 이러한 교통의 편리성은 가리봉 시장 주변에서 생활하고 있는 많은 조선족이 구직하는데 있어 순기능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족 남성의 직업은 건축업종, 회사 경비, 목욕탕 등과 같은 서비스업 종사자가 많았다. 여성들은 요식업, 가사도우미, 간병인 종사자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조선족의 한국어 구사 능력과 한국 문화와의 친화성 때문이었다. 즉 조선족들이 의사소통이 필요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에 가리봉동은 이들에게 ‘고향’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었다.
서울시는 2003년 11월,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를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맞은편의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는 현대식 대형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리봉동 125번지는 30년 이상된 노후 건물과 기능이 불량한 많은 다세대 주택의 열악한 주거환경, 혼잡한 가로망, 기초생활시설 등이 부족하여 대조를 이뤘다.
2003년 서울시와 구로구의 가리봉동 재개발사업 발표는 조선족 집거지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다. 사업 추진으로 가리봉동에서 생활하고 있던 한국인 주민 일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고, 조선족 또한 재개발 사업에 따른 불안정한 주거환경을 이유로 구로동이나 대림동으로 이동하면서 이곳의 조선족 인구가 점차 감소하였다. 조선족은 영등포구 대림 2동의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를 조성하였다.
2005년부터 가리봉동 재개발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늘어났지만, 2007년 방문취업제도의 시행으로 가리봉동에서 불법 체류자는 상당수 감소하였고 합법 체류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더욱이 2010년 사업 시행사인 LH공사의 재개발 포기선언으로 가리봉동에는 기존 개인 단위의 이주에서 가족 단위의 조선족들로 채워졌다. 이렇듯 재개발사업이 표류하는 상황에서 구로구청은 2013년 사업 재추진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지역개발이 보상 문제와 연계되면서 상권의 슬럼화, 장기적 주거권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주변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두드러졌었다.
이러한 가리봉동의 변화는 조선족들이 대림동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재개발사업의 본격화로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지만, 조선족 상가의 임대가격은 하락하였다. 이는 재개발에 따른 주거의 불안정성, 한국 주민 및 조선족 주거자의 인근 지역으로의 이동으로 기존의 상주자 및 유동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리봉동의 재개발 변수는 조선족 집거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이는 또 다른 지역에 제2의 가리봉동이라는 조선족 집거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2000년대 초, 1만 명에 가까운 가리봉동 조선족 동포의 집거지는 재개발사업의 발표 이후, 낙후 지역으로 변모했지만 대림동은 2000년대 중반부터 조선족의 신흥 주거지와 상권으로 부상하였다. 지하철 2호선 및 7호선의 대림역 주변과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림동의 조선족 집거지는 좋은 주거환경, 가리봉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는 저렴한 임대료, 편리한 교통의 장점 등으로 조선족 동포들의 정주 비율을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가리봉동의 재개발은 조선족의 대림동 이주를 촉진시켰으며,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따라 신도림역, 구로디지털단지역, 신대방역, 신림역, 건국대역 주변까지로 조선족의 집거지가 확대되었다. 서울 거주 조선족의 약 50% 이상이 구로구,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관악구, 광진구 자양동 등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구로구의 경우 전체 중국국적자의 85% 이상이 가리봉동과 구로동에, 영등포구는 대림동을 중심으로 신길동, 도림동에 구 전체 인구의 70%가 거주하고 있다. 2008년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전체 중국 국적자는 평균 4만 5천 명에서 최대 5만 5천 명으로 추산되는데, 대략 90% 정도가 조선족이다. 특히 구로구와 영등포구 모두 2005년에 1만 명 정도가 되어, 불과 3, 4년 기간에 현재의 각각 3만여 명의 규모로 급증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전체 외국인이 점하는 인구가 2009년 기준 한국인의 2.4%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이 지역은 평균 두 배 이상이다. 이처럼 국내 입국 조선족이 증가하는 경향이 지속된다면, 그만큼 이 지역의 조선족 커뮤니티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대림동 일대 조선족 거리는2004년경부터 밀집되기 시작하여 여러 상가가 생겨났다. 2009년 12월 기준 대림역 주변 직업소개소만 90여 개에 달했다. 이곳은 2000년대 초부터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상가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2005년을 전후로 불과 5년 만에 많게는 100여 개에 달하는 조선족 상가 거리가 형성되었다.
대림역 인근에서 양꼬치 가게를 운영하는 이기민씨(가명, 남, 40세, 흑룡강성 출신, 중국국적, 2009. 10. 27 인터뷰)에 따르면, 2005년 즈음 그가 이곳에 가게를 열 당시만 해도 거리에 조선족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 전체가 쇠퇴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 거리는 조선족 상가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씨는 일대에 대략 100여 개의 조선족 대상의 상점이 있을 것으로 추산하였다. 그 결과 가리봉동과 대림동 일대와 구로일대는 물론 외형상 조선족의 대표적인 생활 공간으로 정착된 모습이다.
가리봉동과 대림동 주변에 생겨난 조선족 타운의 공간적인 특징은 기존의 한국인 타운(시장)과 혼재되어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현재 조선족 타운으로 형성된 거리는 애초 2000년 이전까지는 기존 한국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각각 가리봉시장과 중앙시장의 재래시장이 형성된 곳이었다. 이 지역 산업이 쇠퇴하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생겨난 빈 공간을 조선족이 채우면서 새로운 양양을 띠게 되었다. 현재는 기존 한국인 시장과 조선족 상점이 병존하고 있지만, 점차 조선족 대상 상점이 우세하게 자리하고 있다. 결국 주류 한국인들이 살던 구로지역 일부가 조선족에 의해 새롭게 변모해 가고 있다.
구로 및 영등포구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그 이유로 66%가 교통과 저렴한 주거비를 꼽았다. 반면에 ‘친척·친구가 있어서’라고 응답한 사람은 10.7%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런데 사회적 인프라의 항목과 이 지역으로 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혼재되어 있다. 지역적 조건과 연고는 상호 연관되어 유입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족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이미 가족·친척 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묻는 질문에 ‘가족·친척’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전체 215명의 66.5%인 143명이나 되었다. 가족·친척의 혈연관계 외에 모국 친구와 사는 경우를 포함하면 지인과 함께 사는 사람은 전체의 72.5%이다. 그런데 현재 혼자 산다고 대답한 사람 중에도 미래에 다른 가족과 합류할 가능성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60대 이상의 혼자 사는 노년층에서 부인이나 자녀를 한국에 초청하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듯 조선족의 지인에 의한 구로 지역으로 유입 경향은 다른 외국인과 비교해 보면 선명히 대비된다. 외국인의 경우 ‘가족·친척’과 함께 사는 사람은 21%에 불과한 반면, 조선족 58%는 ‘모국인 친구’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조선족은 다른 외국인과 비교하여도 한국에 먼저 이주하여 살고 있는 혈연관계로 이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사회 정책적인 배경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 정부가 조선족의 가족 초청 비자를 허가함으로써 중국 현지에서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였다. 2007년에 제한적이지만 무연고 동포에게 입국을 허가한 방문취업제의 시행 이전에, 무연고의 조선족 경우에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구로 지역 조선족 진출은 개인의 의사와 동시에 한국 정부의 입국허가 제도와 연동되어 나타난다.
이에 덧붙여 더 흥미로운 점은 세대 이동의 조선족 이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이주해 온 조선족들이 중국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을 초청하면서 세대에 걸쳐 이주가 이뤄지고 있다. 1990년대 입국 초기 조선족이 이주해 온 주요 통로는 친척 방문이나 여성의 경우 결혼 등이었다. 현재는 방문취업 형태가 가장 많은 조선족의 입국 경로이다. 2007년 3월부터 시행된 방문취업제로 인하여, 국내 체류하는 가장 많은 조선족의 자격은 방문취업(H-2 비자) 형태이다.
2007년 12월 말 기준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전체 장기 체류 조선족 31만 명 중에서 방문취업 자격은 221,819명으로, 전체의 71%의 수준이다. 전체 과반수가 체류 자격이 방문취업 비자이다.이에 반하여 여성의 위장결혼 이주는 급감하였다. 대신에 1990년대 이주하여 정착한 여성의 자식 세대가 한국으로 이주해 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연령으로는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세대이며, 유학이나 취업 등을 목적으로 어머니의 초청을 통해서 국내로 입국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구로 및 영등포구 일대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유입은 연고에 의한 연쇄이주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 중에서도 가족·친척의 혈연관계는 한국으로 입국하는 가장 큰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또 세대 간 이주 현상은 조선족의 국내 이주의 역사가 점차 새로운 세대로 이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실질적으로는 이주의 흐름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까지 지속되는 세대 간 이주의 한 흐름을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