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중국 조선족의 독일 이주와 유럽 진출 과정

한자 中國 朝鮮族의 獨逸 移住와 유럽 進出 過程
분야 지리/인문 지리|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대 중반
중국조선족 이주지 독일슈투트가르트(Stuttgart)와 튀빙겐(TübiNgen)
조선족은 왜 독일까지 왔을까

조선족의 해외 이주는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이 주된 목적지였으나 그 이후 점차 다른 나라로 확대되었다. 조선족의 독일 이주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전 유럽으로 넓어졌다. 독일 남부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비롯되었다.

이렇게 조선족이 독일 등 유럽으로 이주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다. 조선족이 중국을 떠난 것은 보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곳을 찾으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자신들의 경제적 조건이 앞으로 보장되지 않거나 더 이상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 중국을 떠났다. 둘째는 자유에 대한 추구이다. 자유로움은 정부의 통제나 사상으로부터 어떤 강요도 받지 않은 자기 자신을 느낄 때 가능하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 비록 자신들이 법적 신분을 제약당하고 있지만, 독일 사회체제에서 선택의 자유를 가장 좋은 점으로 꼽았다. 특히 조선족이 독일 사회에서 중요하게 갖게 되는 사회의식은 안정감과 자유, 사회복지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조선족을 만난 이유

필자는 조선족 각자의 이주 동기, 노동 형태, 조선족 또는 한인 공동체와 관계, 각종 의례와 독일 사회 적응 과정, 정체성, 독일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와 인식 등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사전 조사를 한 결과, 독일슈투트가르트(Stuttgart)와 튀빙겐(Tübingen) 지역에 다수의 조선족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지역에 거주하거나 일하고 있는 조선족 20여 명을 상대로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중국 조선족이 가장 먼저 이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대상자에 대한 인터뷰는 개인별로 차이는 있으나, 평균 2회 실시했으며 많은 경우 5회까지 진행했다. 인터뷰를 주선한 이OO에 따르면, 1996년 5월경 조선족 남자 20여 명이 슈투트가르트에 이주했다고 한다. 1980년 결혼과 동시에 독일 남부에 거주한 그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한인교회를 통해 이들에 대한 난민 심사와 관련한 도움을 요청하여 이주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는 초기에 주로 통역을 해주었는데, 조선족의 이주 초기 정착단계에서부터 신변의 일상까지 봐주는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참여관찰은 조선족이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한나절이나 하루씩 머무르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 가운데 독일인 접촉과 응대, 일상생활, 가족 간의 대화, 시사, 교육 문제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관찰대상자로 집중한 이들 중에서 김00(T1, 40대 중반)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주여성(T3, 40대 중반)과 동거 상태에 있고, 10살 난 딸아이를 두고 있다. 그 식당에서 주방 일을 맡고 있는 남성(T2, 50대 중반)과 홀,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는 여성(T4, 50대)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했다.

심층 면접은 각자의 이주 동기, 노동과정과 그 형태, 조선족 또는 한인 공동체와 관계, 독일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와 인식 등 이었다. 인터뷰는 이주국 사회문화 적응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이들 각자에게 독일의 사회복지, 의료서비스와 교육, 사회활동 등을 포함하고 참여관찰에서 각종 의례와 독일사회 적응 과정, 정체성 등을 살펴보았다.

이주의 세기, 국제이주와 조선족 이주

중국 조선족의 이주는 국제적 현상이다. 세계 이주 현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대표적인 유동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주국 노동시장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초국가적 이주계급이다. 이주계급은 단순하고 육체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도록 허가를 받은 이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제한되어 있고 일자리는 이주국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막노동과 서비스 업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이주한 역사만 하더라도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들 중 상당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영국과 독일 등 유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조선족의 글로벌 이주 현상은 첫째, 노동력의 국제 이동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보편적인 현상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둘째, 중국내 노동이동이나 경제발전과 관련되어 있으며, 끝으로 중국 조선족 공동체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조선족은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집단거주지를 형성해 민족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1990년대 들어 이루어진 조선족의 이동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 동북 3성 내의 농촌에서 인근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다. 둘째, 동북 3성 이외 북경이나 상해와 같은 대도시와 청도, 위해 등 연해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셋째, 한국 등 외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다. 조선족의 해외 이동을 살펴보면, 2008년 당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단연 한국이었다. 당시 약 37만 명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 미국, 러시아 순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해외 90여 개국에 진출한 조선족은 대략 5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수치는 중국 조선족 총 인구의 25%에 해당한다.

유럽에 이주한 조선족은 정확한 인구통계학적 자료는 없지만, 독일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소규모로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000년 ‘조선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2004년 ‘재불조선족협회’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정부에 공식 단체로 등록했다. 영국의 경우, 한인 거주지인 런던 뉴몰든을 중심으로 조선족 이주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한인을 상대로 상업 활동을 하거나, 한인 공동체와 연관된 이주계급으로서 노동시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북한 난민인가 아닌가, 합법과 불법의 사이

조선족은 거주하는 나라에서 노동 허가와 장기 거주, 궁극적으로 시민권을 얻기 위해 힘썼다. 초기에 독일로 이주한 조선족들은 북한 출신의 난민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실제 이주민 중에는 북한을 벗어나 중국에 몇 년 거주한 후 독일로 옮겨간 이들도 있다. 독일에서 조선족이 스스로 밝히는 지위는 이중국적이었다. 그런데 실제 북한에서 이주한 사람이라 해도 독일 난민당국에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 중에 일부는 '북한' 출신으로 가공된 자신을 내세우기도 했다. 1990년대 말 독일로 이주한 50대 초반의 S3과 S4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집을 수리하는 일을 하였는데, 처음 인터뷰에서 이들은 조선족이 아니라 난민 심사 때 밝힌 북한 출신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얘기했다. 그들은 연변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북한 사람들과 접촉이 잦아 전해들은 얘기만으로도 자기들을 북한 난민으로 쉽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층 면접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그들은 차츰 자신들 본래 삶, 조선족의 중국 생활에 광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난민 심사를 받기 위한 과정에서 제2의 자아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주민들이 난민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한국출신의 통역을 맡는 사람이었다. 인터뷰하면서 통역의 말 한마디에 따라 심사결과가 바뀐 경우를 종종 있었다. 심사 과정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조선족을 북한출신이라고 한마디만 해도 난민 인정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증언에 따르면,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조선족 사이에 큰 불화가 있었고 여전히 앙금을 가진 이주민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2002년경 최00은 한국 유학생이었는데, 독일 측의 요청으로 조선족 난민 심사 과정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조선족의 난민 심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는 T2는 최00 때문에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와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밝혔다. S4는 더욱 충격적인 진술을 했는데, 그녀는 몇 차례에 걸친 심사 과정에서 최00이 돈을 요구했고 자신이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최00가 자신이 참여한 통역 경험을 바탕으로 심사 과정에서 오고가는 질문을 정리해 자료를 제작했고, 이를 난민 심사 신청하는 조선족에게 팔았다고도 했다.

난민 심사 과정에서 독일 정부가 이주민들이 북한 출신인지 아닌지 판명하기 위해 물어보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의 역사인 한반도 고대/중세/근현대사, 김일성 가계와 그 일대기, 수도 평양, 경제, 당 관련 등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명절과 체육 등 문화와 공민증 등 생활환경, 군대와 기업소, 음식, 명승지, 지리 그리고 노동당 약사 등이었다. 이처럼 난민 심사 내용은 북한 역사,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상황과 생활물가, 개별 물품에 대한 가격까지 묻는 것이었다. 실제 북한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떠난 지 수년이 지난 이탈 주민에게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조선족이 독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합법적으로 독일 시민이 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런 신분으로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 등 제3국으로 가는 것이 자유롭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한국행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둘째, 한국 사회 적응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이주하면 문화와 정서적으로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는 있지만, 그동안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의 대우를 고려하면 독일에 계속 거주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에 대해 갖고 있는 차별과 편견은 이들이 제3국에서 자신들의 북한 난민으로 신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1990년 이전까지 동독과 북한이 좋은 외교 관계를 유지한 것도 조선족에게는 독일에서 자신들을 북한 난민으로 주장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조선족 중 난민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난민으로 등록하면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기 때문이었다. 거주지를 벗어나 일자리를 구하거나 장기간 머물 때는 해당 지역 관청에 신고해야 하는 법률 규제는 난민들의 거주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였다. 인터뷰에서 S6는 일자리를 따라 이동하는데, 신고가 불편해 난민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신청하지 않아도 거주지를 제공받고 매월 일정한 금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3개월에 한 번씩 비자”를 연장했다고 밝혔다. 2002년 이후 난민 신청 숫자는 감소하는 추세다.

독일 조선족은 무슨 일을 주로 합니까?

조선족이 하는 일은 대부분 단순 서비스직이다. 노동시장에서 이들은 생산직에 근무하거나 하위 서비스 업종에 종사한다. 조선족 여자는 가사일과 공장(두부 공장), 식당, 배추 농사, 아기 돌보미로 일하고, 남자는 집수리, 식당, 농장, 막노동 등을 한다. 이들 중에는 독일로 이주하기 전 한국에 몇 년씩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층계급으로서 숙련된 기술이 없어도 쉽게 할 수 있는 종류의 일들은 언제든지 다른 노동자로 대체 가능하고 한시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쉽게 일터를 바꿀 수 있다. 그만큼 신분과 주거가 불안전하다. 이들은 설문과 인터뷰에서 “정당하게 일하고, 노동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해서 세금 내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은 그들의 타자화된 지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많은 이들이 ‘떳떳하게 일해서 세금 내고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내비쳤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독일인처럼 대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싶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적절한 노동 없이 지원만 받는 사람들에게 ‘3등 국민, 시민’이라는 자의식을 갖게끔 한다는 것이다. 1등 시민은 독일인이고 2등은 한국인 등 다른 민족이며, 자신들은 세 번째 시민이라는 의미다. 10년 넘게 독일에 거주한 T2는 자신들은 독일사회에서 ‘그림자’라고 말했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빗댄 말이다. 독일사회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교류나 사회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은 항상 누군가의 지원이나 교회와 같은 단체, 정부의 사회보장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독일 한인사회와 조선족

먼저 독일에 이주한 한인은 조선족 이주민에게는 양면적인 존재이다. 조선족의 초기 현지 정착을 돕는 것은 한인교회인데 이는 신앙공동체를 넘어서 친목과 클럽의 기능을 수행한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본주의 관점에서 조선족을 돌보고 지원함으로써 그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많은 조선족이 이주 초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의 도움을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조선족이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교회의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연결망이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슈투트가르트 도심 아시안 식당에서 주방 일을 보조하는 S6는 50대 후반인데 주말이면 꼭 교회에 나간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그녀에게 한국인을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녀가 다른 조선족들도 자신처럼 교회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고 일자리와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며, 자기와 친한 몇몇 사람이 그렇게 해서 뮌헨으로 일을 구해 옮겨간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일자리를 구하거나 거주지를 옮길 때 한인교회는 매우 중요한 정보망 구실을 한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만난 S10의 경우, 한국에서 이주한 간호사들이 만든 모임과 접촉하면서 독일 사회에 적응한 경우다. 그녀는 기차역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데 교회에서 한인 간호사 모임을 소개받고 거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독일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파독 간호사 모임은 50대 중반인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자연스레 한국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족의 기초 관계망이 한인교회인 것은 여기에 속한 한인들이 이들의 정착에 가장 큰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와 연결된 조선족들은 신앙을 종교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조선족에 편견이 덜한 한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한인교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말조차 섞지 않는 예도 있었는데, T1은 한국 사람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었다. 그는 한국에도 거주한 경험이 있지만,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자신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족들은 이주 초기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작업장에서 일한 경험이 많은데, 대부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T4는 “독일인보다 한국인이 더 지독하다”라며 자신이 옮겨 다닌 식당이나 농장에서 받은 부당한 처사 즉 임금 체불과 휴가, 노동시간, 욕설 등을 털어놓았다. 그는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처음에 약속한 임금보다 적은 보수를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월급을 제때 받은 경우도 드물었다고 한다.

슈투트가르트 인근지역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T7은 2000년 초반 독일로 이주해 한인교회를 찾게 되었는데, 자신을 대하는 한인들이 매우 부정적인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교회로 안내한 김00 외에 누구도 자기와 인사를 나누거나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한인 식당에서 일할 때, 그는 “휴가는 물론 몸이 아파도 쉴 수”가 없었고, “같은 일을 해도 (자신들은) 한국인의 절반 밖에 돈(임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그것도 몇 개월 뒤에 받았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지만 한인사회에서 타자화되는 이들은 한국 사회 자체가 재중 조선족에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들도 해외 한인 동포로부터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독일 한인으로 제한된 조선족의 교류와 생활방식은 독일 사회에서 이들이 타자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노동시장 진입 초기에 한인으로부터 차별당한 경험은 이들의 타자화를 더욱 부추긴다.

독일어 할 줄 아세요!

이주민의 사회 적응 과정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모국어와는 다른 이주국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경우다. 노동시장과 지역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첫째 조건 역시 현지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언어의 소통이 없는 경우 이주민에게 문화 차이는 차별의 배경이 될 수 있다.

조선족 또한 독일 사회에 정착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 무엇보다 언어를 익히는 일이다. 이는 조선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는 독일인 내부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문제이다. S4는 중국말과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간단한 독일어 회화는 가능했지만, 글을 읽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말’을 하는데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독일인과 기초적인 대화는 나누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이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T1은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독일어 인사말을 건네지만 대개는 중국어를 사용했다. T1과 T3는 한국어[조선어]도 구사할 수 있지만, 자녀가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중국어로 자녀와 의사소통했다. 이들에게도 이OO의 도움이 없었다면 식당을 개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정절차를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했지만, 사업에 필요한 전문용어는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참여관찰에서 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사실은 10살 된 아이의 교육에서 부모[T1과 T3]가 독일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어서 갖는 한계였다. 교육에 필요한 절차와 독일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와 견학 등에 대한 자문 역시 이OO의 몫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T2는 홀에서 서빙을 하는 T4와 대화를 나눌 때, 중국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했고 독일어는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T2가 독일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운 과정이었다. 그가 공짜로 배울 기회는 많았지만, “하루 몇 시간씩 강의를 들어도 돌아서면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사람의 인식과 사고체계를 구성하고 언어의 기능적 본질을 생각해 볼 때, 40~50대 조선족들이 독일어를 습득하기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일 조선족의 통과의례와 정체성

의례와 명절은 국민/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환기하는 것이 의례이다. 의례는 인간이 전통적으로 행위를 해온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여기에는 집합적인 정서가 포함되어 있고 문화적 통합성을 높여주는 사회적 행위이다. 특히 통과의례는 일상적인 삶에 따라오는 것으로서 특정한 집단의 문화적 관습 아래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의 소속감을 환기하게 된다. 혈연이나 생활풍습들을 민족 정체성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의례는 중요하다.

독일 남부의 조선족은 한인 커뮤니티와 관련해서 한국 명절을 같이 지내고 있었다. 조선족 사이에서 작은 연결망 노릇을 하는 식당[T1과 T3 운영]에서 어느 모임을 관찰한 결과, 이들은 연변에서 잘 알려진 조선족 노래를 즐겨 불렀다. 조선족 사이에서 기념일이나 행사 때 열리는 소규모 모임은 그들이 집단 속의 자기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T1과 T3는 태어난 아이의 돌잔치에서 한복이나 새 옷을 입히고 돌상을 차리는 한민족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은 이OO의 도움으로 한복을 준비했고 상차림과 함께 돌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떡을 준비해 돌렸다고 한다.

프랑스의 민속학자 방 주네프(Arnold Van Gennep)가 적절하게 논증했듯이 통과의례는 분리, 전이, 통합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의례의 성격에 따라 각각의 단계는 부가되거나 약해진다. 그런데 독일의 조선족은 자신들의 이전 지위나 역할을 의례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재현하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족으로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의례와 공동체의 관점에서 가장 초보적인 분리 단계에도 도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들의 독일사회 적응은 고립과 주변화 과정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일사회와 유리된 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면서 주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독일 시민사회에 반하는 의식과 행동을 표출하거나 그런 양식을 내보이지는 않지만, 불안정한 신분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2003년 심양에서 이주한 50대 초반의 S8는, 독일사회와 단절된 채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녀는 2013년 초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조선족이 독일 시민들과 동일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타자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지역사회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로 과거의 기억만이 지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오는 원초적 재료인 셈이다.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발적 결사체를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티와 연결되고 사회적 참여 또한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독일 사회에서 어떤 정치적 실천과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주국 사회에 통합되거나 동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권태환/박광성, 「중국 조선족 대이동과 공동체의 변화-현지조사 지표를 중심으로」(『한국인구학』27-2, 2004)
  • 박명선, 「독일 이민법과 통합정책의 외국인 차별에 관한 연구」(『한국사회학』41-2, 2007)
  • 김현미, 「중국 조선족의 영국 이주 경험: 한인 타운 거주자의 사례를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41-2, 2008)
  • 박광성, 『세계화 시대 중국 조선족의 초국적 이동과 사회 변화』(한국 학술 정보, 2008)
  • 이승률, 『동북아시대와 조선족』(박영사, 2008)
  • 한성훈, 「중국 조선족의 독일 이주 연구」(『동방학지』제163집, 동방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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