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귀화한 재중 동포의 사회적 삶과 정체성

한자 韓國人으로 歸化한 在中 同胞의 社會的 삶과 正體性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한민국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인물|조선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12월 3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7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6년-201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4년 12월
재중 동포의 한국 이주, 친척 방문과 국제 결혼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부의 창출’이 모든 가정의 중대사로 떠오르던 시대에 대부분 농경 생활에 종사해 오던 조선족들은 ‘부의 창출’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족들은 외화 벌이를 목적으로 한국, 미국, 일본, 사이판, 아르헨티나, 호주, 프랑스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992년 한·중 수교는 조선족들의 한국으로의 이주를 용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한·중 수교 이전에도 한국에 입국하는 경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86년 조선족 이산 가족 찾기 프로젝트였다. 친족 확인이 되면 간단한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을 방문한 조선족들은 서울 지하철역에서 약장사를 하여 거액의 돈을 손에 쥐게 되었으며, 고향에 있는 조선족들에게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부’에 대한 욕망이 생긴 조선족들은 친척 방문, 산업 연수, 한국 유학, 국제 결혼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한국 바람’은 조선족 사회에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상황을 놓고 보면, 한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노동력 송출국에서 유입국으로 전환하게 되며,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들을 수용하는 제도로 산업 연수 제도를 실시하게 된다. 당시 산업 연수 제도는 연수생 허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연수 기간도 2년에 한정되어 있었고 최대한 1년만 연장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들의 한국 이주는 정책과 제도를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구도 속에 놓이게 되며, 그들은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수단이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활용하게 된다.

가장 흔한 이동의 패턴은 친척 방문, 국제 결혼, 위장 결혼, 밀항, 여권 위조를 통한 것이었다. 가장 많이 동원된 보편적 경로가 가짜 친척 방문이며, 밀항은 아무런 입국 경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돈마저 마련할 방도가 없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길이었다. 그 외 국제 결혼, 위장 결혼도 조선족 여성들이 가장 많이 동원하는 수단의 하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간의 교류가 급증하면서 정부의 지원 하에 조선족 여성과 한국 남성의 국제 결혼이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 한국 여성들과 결혼할 수 없는 한국 남성들에게 조선족 여성과의 결혼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한국 정부는 노동력 이주를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가장 손쉽고 유리한 입국 통로로써 결혼을 통한 이주를 허용하고 지원하는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 정책은 오히려 이주의 ‘불법성’만 증가시켰고, 위장 결혼으로 인한 조선족 여성들의 한국 이주를 증가시켰다. 이주 경로가 없는 대부분 조선족 여성들은 ‘국제 결혼’ 이주의 방식으로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정상적인 ‘결혼이주’라는 입국 통로가 없는 기혼 여성들은 브로커들이 알선한 ‘위장 결혼’, ‘사기 결혼’의 방식을 통해 약 6만 위안 내지 8만 위안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방문 취업 제도와 기술 연수 제도를 통한 조선족 입국

그러던 것이 2007년 방문 취업 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1992년부터 2006년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어 오던 조선족들의 한국 이주의 경로는 변화하게 된다. 방문취업제도를 실시 이후 무연고 조선족들은 한국어 시험, 추첨을 통해 4년 10개월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며, 조선족들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7월부터는 또 기술 연수 제도를 통해 중국에서 한국행을 희망하는 조선족은 450위안을 내고 C-3 비자로 한국에 입국한다. 그렇게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들은 9개월 동안 한 달에 25~30만원씩 200만원이 넘는 학비를 학원에 내고 주말마다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딴 뒤 4년 10개월의 비자를 받게 된다. 그 후 기술 연수의 기한은 초기 9개월로부터 6개월, 6주로 점차 단축되었다. 그 형태는 3개월 동안 학비 75만원을 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해 국가 자격증을 따게 되면 F-4 비자를 주는 제도로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이주의 경로를 통해, 조선족들은 한국에 이주하게 되며 조선족들의 한국 이주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약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통계에 따르면 2014년 12월까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 인구수는 총 375,572명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의 이주 과정에서 독립운동 유공자 자손 혹은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한국에 귀화하게 된다. 출입국 외국인 정책 본부에서 발행한 『국적별 유형별 국적 취득 현황』,『2013년 출입국 통계 연보』등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에 귀화한 중국인 귀화자 수는 총 77,083명에 달한다.

친척 방문자에서 불법 체류자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및 귀화한 조선족들은 한국의 생활에 새롭게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법적·제도적, 사회·문화적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먼저 재중 동포를 둘러싼 법적·제도적 현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한국은 북방 정책을 염두에 두면서 소련과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는데, 이 시기 조선족들은 간단한 여행 증명서 발급만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또한 외무부에서 조선족들 중 독립 유공자 후손 등에 대한 귀국 대책의 일환으로 그들의 영주 귀국과 친인척 방문을 추진하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 여행 증명서만으로 한국 입국을 가능케 하였기 때문에 조선족들은 당시 출입국 관리법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초기 ‘동포’로 인정되었던 조선족 친척 방문자들이 한약재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그것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됨에 따라 많은 조선족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증가하는 한약재 판매가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한국 정부는 ‘동포’를 ‘외국인’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포’로서의 초기 혜택은 사라지고 조선족들은 1990년부터 중국 국적으로 사증을 발급 받아 한국으로 입국해야 했다. 또한 새로운 사증 발급 지침에 따라 조선족의 친척 방문은 55세 이상인 사람으로 제한되었다. 이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단기 비자에도 적용되었다. 법무부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출입국 체류 관리와 불법 체류자 단속을 강화하였다. 출입국 관리법 위반 조선족들을 외국인과 동일하게 처벌하였다. 이러한 제한은 한국이 조선족들을 ‘동포’가 아닌, ‘불법 체류 가능성이 높은 외국인 노동자’로 간주하면서 출입국상 많은 제한을 가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조선족들은 출입국 관리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면서 외국인들과 똑같이 1991년 11월 1일부터 시행한 산업 연수 제도에 의해 입국하게 되며, 2년 동안 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시기 산업 연수 제도로 입국한 조선족들은 대부분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재외 동포법 제정과 조선족의 지위

조선족들의 출입국과 체류를 통제하기 위해 법무부는 또 1998년 6월 14일 국적법을 개정하여, 그동안 조선족 여성이 한국인과 결혼하게 되면 즉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어 위장 결혼과 불법 체류의 빌미를 제공하였던 국적 취득 조건을 수정했다. 혼인 후 2년간 동거 기간을 거친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위장 결혼을 줄이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1999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재외 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하 재외 동포법]을 제정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동포는 ‘재외 동포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족과 고려인이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재외 동포법 개정 운동을 거쳐 헌법 재판소 전원 재판부는 2001년 11월 9일 ‘재외 동포법’ 제2조 제2호 ‘재외 동포법 시행령’ 제3조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렸다. “해외로 진출한 동포를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차별하는 것은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 후 2004년 3월 5일 ‘재외 동포법’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출입국 관리 시행령으로 이동을 제한하였다. 2008년까지 재외 동포 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이주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조선족의 제도적, 사회문화적 차별

현재에도 한국 정부가 조선족에게 부여한 법적 지위는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출신의 ‘동포’와는 구별되는 출입국과 체류 자격이 제한된 ‘동포’이다. 결국 조선족들은 한국 사회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명분하에, 외국인 노동자를 포섭하는 다문화 정책에서도 배제되고 또 ‘동포’로서의 지위도 확보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법적·제도적 차별뿐만 아니라 조선족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사회·문화적 차별의 경험을 겪게 된다. 우선 연변 말과 한국어라는 언어적 차이로 인해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의해 다른 하나의 집단으로 분류된다. 또한 한국인의 무시, 편견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들은 ‘한국어를 습득’하기도 하고, ‘신분을 감추기’도 한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중국어로 대화하기’도 하며, 연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조선족들끼리 어울리기도 한다. 조선족들의 음식, 대중 음악 등에서도 차별의 낙인에 의해 문명과 야만이라는 2분법적 구분 속에서 ‘낙후한 집단’으로 자리매김되기도 한다.

1995년도에 한국에 입국한 박용문씨는 자신들의 일상적 음식 문화가 어떻게 한국인들에 의해 ‘미개한 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래의 구술에서 계란을 소금에 찍어먹느냐 간장에 찍어먹느냐, 파를 썰어서 먹느냐 고추장에 찍어먹느냐에 따라서, 문명·야만의 구분이 지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먹는다 하면은 예를 들어서 중국에서 우리는 삶은 계란을 간장에 찍어 먹잖아. 근데 얘네는 소금에 찍어먹는 거야. 이런 것들은 동포라 하면은 백프로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거든. 근게 걔네는 웃는 거야. 왜 웃어. 얕잡아 보니까 웃는 거지. 얘네는 소금에다가 찍어먹어야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네들 것만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간장에 찍어먹으니까 이상한 거지. 우리는 파를 고추장에 그냥 찍어먹을 때도 있잖아. 이 사람들은 썰어서 먹는데. 그니까 이해를 못하더라니까. 이상하게 먹는다고 그러는 거야.”

한국인 집단에 의한 문명의 배치는 음식 문화에서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 차원에서도 진행된다. 박용문 씨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도 음악을 좋아해서 당시 자신의 고향에서 유통되는 한국 노래 테이프를 많이 사서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들어왔고 불러왔던 노래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우스운 행위로 취급되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문화가 우선은 틀리잖아요. 알게 모르게. 문화가 틀리니까 예를 들어서 노래방에서 노래를 한다고 하면 나이에 맞지 않는 노래를 한다고 말을 들었거든. 그때 나는 ‘안해’라든가 머 감성적인 노래를 불렀는데 걔네는 뭐 ‘룰라’라든가 머 ‘1/2’ 이런 노래를 불러라고 그랬거든. 힙합 같은 거나 해야 하고. 나는 그런 문화를 모르고 들어왔거든. 대신 나는 팝송을 잘했어요. 음악을 했으니까. 니 나이에 맞게 투투 노래랑 부르라고 그랬거든. 그 사람들이. 뭐 김건모 ‘핑계’라든가 이런 노래들. 근데 우리는 모르는 거야. 우리는 집에서 테이프를 듣고 한국에서 들어온 CD라든가 이런 걸 겨우 해가지고 나훈아 뭐 이런 가수들만 알았잖아. 이 자체 문화가 틀리니까 그 사람들 눈에 보기엔 우스운 거야. 기본적으로 김건모나 투투 노래를 해야 하는데 나훈아 노래를 막 하고 있고. 나훈아 노래는 우리가 해야 하고 넌 이런 노래를 하란 말이야. 이러는 거야. 문화적 충돌인 거지.”

이와 같이 언어, 음식, 대중 음악 등 문화적 차이에 의해 조선족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차별의 경험을 겪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위계 질서 속에서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하층 계급’으로 간주되는 현실 속에서 조선족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생존 전략들을 구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삶과 정체성, 여러 유형들

한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은 여러 차원의 차별을 몸으로 겪어 왔으며 점차 이주 초기의 '같은 민족', '동포'라는 상상에서 점차 벗어나 스스로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실천 전략들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다양하게 분화되며 재구성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사회적 삶의 전략들은 중국에서 형성해온 ‘조선족’이라는 ‘소수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지, 혹은 한국 주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것을 원하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실천 전략을 보인다. 즉 기존의 ‘조선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자 하거나 주류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유형, 기존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되기를 원하는 유형, ‘조선족’임을 숨기고 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유형, ‘조선족’임을 부정하며 ‘국제인’으로 살아가는 유형 등이 그것이다.

첫째, 기존의 ‘조선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자 하거나 주류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유형이다. 먼저 한국에서 ‘동포’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사회적 위치를 변화시킴으로써 한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자 하는 사례가 있다. 이 사례의 경우, 단체 결성을 통해 형성되는 힘들을 자신들의 사회적 자본으로 확보함으로써 주류 사회의 사회적 배제를 보완하고자 하며, 영등포 구청에 등록하여 전체 한국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자원 봉사를 진행함으로써 자신들도 한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주류 사회 구성원과 똑같은 시민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천을 통해 한국 사회에 통합됨으로써 진정한 한국의 주류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 중국 동포 한마음 협회에 참가하여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김국철 씨, 박용문 씨, 김은희 씨가 이 사례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법적으로 ‘한국인’이 되었기에 당당하게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신화영 씨는 스스로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직장에서는 ‘중국인’임을 강조한다. 그는 중국어를 허용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과 원어민 강사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국인들 앞에서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보하고 일종의 사회적 기대감을 얻고자 한다. 즉, 같은 직장의 한국인 강사들을 중국어 영역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온 ‘원어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중 언어의 장점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그들과 대칭적인 사회적 위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둘째, 기존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한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를 거부하는 유형이다. 구체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제도를 개선하고 자유 왕래를 실현하며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하는 사례이다. 이러한 실천을 수행하는 행위 주체가 바로 조선족 연합회 운영 위원 김화자 씨다. 그는 자신을 비록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자신을 ‘중국 조선족’으로 규정하면서 ‘재외 동포법’ 개정을 위한 집단 농성, 신용 호조부 설립, 문화 공연 등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책과 제도를 개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동원된 자원은 과거 조상들의 동북 이주와 정착, 독립운동, 해방 전쟁 및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무명 영웅과 모범적 역할, 민족 영웅 및 자치주 창립 등 자신들의 과거 영광과 관련되는 집합적 기억들이다.

셋째, 기존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한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려고 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행위 주체들은 ‘조선족’이라는 기존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한국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려고 한다. 강미옥 씨가 이 유형에 속한다. 2000년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한 강미옥 씨는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저급한 행동거지나 촌스러운 옷차림, 분수에 어긋나는 발언들을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고 인식하면서 ‘조선족’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한국에서의 삶은 그로 하여금 점점 중국과 멀어지는 느낌을 받도록 하였으며 문화적으로 한국에 적응한 그는 더 이상 중국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규정하며 한국 국민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완전한 ‘한국인’이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인과의 첫 만남에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불편한 점으로서 그는 절대 조선족임을 밝히려고 하지 않으며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기존 정체성도 거부하고 한국 주류 사회의 진입도 거부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에 속한 사례가 바로 한국의 모 유명한 회사에 취직한 정금화 씨다. 그는 앞의 첫 두 유형과는 달리, “한족들의 5,000년 역사에는 조선족이라는 존재가 없고, 또 조선의 500년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적 기원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한탄한다. 따라서 회사의 미국 혹은 유럽의 서양인들과의 경쟁에서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그것을 ‘조선족’이라는 민족의 운명과 연결 짓는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가리봉동, 대림동의 ‘조선족 타운’은 문화적 충격의 장소로서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이와 같이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실체를 완전히 부정함과 동시에, 그는 자신을 “3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국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국인으로 귀화한 재중 동포들의 사회적 삶의 실천 양상과 정체성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귀속 의식에 따라 다양화되고 분화되고 있다. 재중 동포들의 실천이 다양하다는 것은 과거에 형성했던 정체성이 그대로 실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의 귀속 의식 역시 구조적 차원에서 단일한 요소로 획일화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금 현재의 공간과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되며 유동하는 모습을 띤다.

참고문헌
  • 방미화, 『이동과 정착의 경계에서 : 재한 조선족의 실천 전략과 정체성』(이담 Books, 2013)
  • 박광성, 「한국의 조선족 노동자의 유입과 정착, 적응에 관한 연구 」(서울 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3)
  • 손은록, 「국제 결혼 가정의 부부 갈등 요인과 갈등 대처 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 조선족 여성을 중심으로」(강남 대학교 사회 복지 전문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4)
  • 윤영도, 「조선족 초국적 역/이주와 포스트 국민 국가적 규제 국가 장치에 관한 연구」(『중어 중문학』 50, 한국 중어 중문 학회, 2011)
  • 출입국 외국인 정책 본부, 『2013년 출입국 통계 연보』(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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