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半島에서 中國 東北 3省까지 朝鮮人 移住 루트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사건|이주 |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세기 후반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2년 이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
근·현대 시기 한반도에서 중국의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조선족]의 이주 루트.
19세기 후반 한인들은 한반도의 접경 지역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거나 일부는 정착하기 시작했다. 압록강 루트는 평안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주로 이주, 정착하였다. 임강·통화 방면은 류하 → 동풍 → 해룡→ 휘남 → 반석 → 길림 → 서란 → 오장 등 북방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집안·환인 방면은 신빈 → 청원 → 무순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단동 방면은 봉성 → 수계 → 심양 → 철령 → 개원 → 창도 → 이수 → 회덕 → 장춘→ 유수 → 오장 → 하얼빈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외에도 평안도 사람들은 영구 → 해성 → 요양 → 심양 → 철령 → 개원 → 창도 → 이수 → 회덕 → 장춘 → 유수 →오장 → 하얼빈 등 흑룡강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두만강 루트는 함경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화룡, 용정, 연길, 훈춘, 도문, 왕청 등에 정착하였다. 이후 안도→돈화→교하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왕청 → 동경성 → 영안 → 해림 → 상지 → 연수 등 흑룡강성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영안에서는 목단강 → 림구 → 발리 → 가목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흑룡강성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러시아연해주를 거쳐 연변과 훈춘, 동녕, 밀산 등 흑룡강성의 동부 변강에 정착하였다. 훈춘에서는 왕청 → 동경성 → 영안 → 해림 → 상지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동녕 → 영안 → 목단강 → 림구 → 발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밀산에서는 호림 → 요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연해주에서는 나북 → 탄원 → 통하 → 목단 → 파언 → 호란 → 지동 → 안달 → 치치하얼 등 흑룡강성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호란에서는 수화 → 철력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림 1˃ 월강 이주 루트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주로 1905년 “을사 보호 조약”과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그리고 1919년 3·1 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이주하여 집중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 북부 지역뿐만 아니라 남부 지역의 한인들이 연길, 화룡, 용정, 왕청, 도문, 훈춘, 안도 등 간도 지역으로 집중 이주하였다. 일부는 요령성의 봉천, 철령, 길림성의 길림, 장춘, 흑룡강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거주하였다.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토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고 마을을 형성하고 주민을 조직하여 반일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민족 지사들은 한인들과 함께 학교를 건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무관 학교를 세워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그림 2˃ 간도 이주 루트
1931년 9·18 사변과 1932년 만주국의 수립은 중국 동북 지역으로 한인 이주의 양상과 성격을 전혀 다르게 하였다. 즉 만주국 수립 이전의 한인 이주는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 등 국경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논농사에 익숙한 한반도의 남부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이 시기 한인들의 이주는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만주국은 관동군과 함께 요령성의 심양과 단동 일대의 16개 현과 길림성의 연길, 화룡, 훈춘, 왕청, 안도, 반석, 목릉, 무순, 홍경, 청원, 유하, 해룡, 동풍, 금천, 휘남, 몽강, 관전, 환인, 집안, 임강, 돈화, 무송, 장백 등 23 개 현에 집중 배치했다. 또한 일본은 1932년 ‘통제와 안정’ 방침을 근거로 철령, 하동, 영구, 수화, 삼원포, 영흥 등에 안전 농촌을 건설하였다.
만주에로의 집단 이주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전 시기의 주민들과는 달리 한반도의 남부 지방, 즉 경기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 출신들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출신 지역별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경상도 마을은 길림성 길림시 아라디 마을, 길림성 서란 금성촌, 길림성 안도현 오봉 마을[합천]과 새마을[밀양], 흑룡강성 태래 서광촌, 군력 우의촌, 오상 일승촌, 상지 하동촌, 하얼빈의 홍신촌 등이 있다. 전라도 마을은 길림성 안도현 송강진 무주촌·남도촌·북도촌·정읍촌, 유하현 삼원포 광양촌, 교하현 천북향 영진촌, 교하현 청강진 홍풍촌, 요령성 신빈현 장령자촌 등이 있다.
충청도 마을은 대표적으로 길림성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이 있다. 정암촌은 1938년 일본의 만주 지역 식민지 정책에 의해 충북 청주, 청원, 충주, 보은 옥천의 농민 80가구가 강제로 집단 이주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강원도 마을은 길림성 안도현 신합향 서한촌, 안도현 만보진 고성촌·김화촌, 안도현 명월진 청구촌 등이 있다. 경기도 마을은 길림성 유하현 강가점 경기촌, 가평촌, 안성촌, 광주촌, 경광촌 등이 있다.
˂그림 3˃ 만주국 집단 이주 루트
1980~1990년대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자본주의화, 공업화, 도시화와 더불어 한국과 중국 간 국교 수립으로 조선족은 동북 3성 지역에서 중국의 연해·내륙의 대도시 및 공업 도시로 이주하거나 한국을 비롯한 미국, 일본, 러시아, 캐나다, 호주, 유럽 등 세계 곳곳으로 이동하여 삶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들은 베이징, 톈진, 다롄, 칭다오, 광저우, 심천과 같은 대도시로 이동하였다. 특히 이들 지역은 한국의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한 곳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던 동북 지역의 주요 도시인 선양, 창춘, 하얼빈, 옌지 등지에서도 인구수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조선족 사회 내에서 농촌과 도시 간 이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내륙 이주 루트
조선족의 세계 각국으로의 초국가적 이주는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적극적, 자발적으로 가족의 이산을 감수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 53만 명, 일본에 5~6만 명, 러시아에 5~8만 명, 미국에 7만 명, 중동에 4~5만 명 등 약 70여 만 명 이상이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삶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이주의 증가로 그들은 ‘중국 출신 또는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지만 더 이상 ‘중국 조선족’이 아닌, ‘재한 조선족’, ‘재일 조선족’, ‘재미 조선족’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림 5˃ 글로벌 이주 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