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용정의 역사를 기록해 온 최근갑의 삶

한자 龍井의 歷史를 記錄해 온 崔勤甲의 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인물 용정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사적지발굴과 항일운동관련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4년 12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12월 10일
거주지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정의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용정시(龍井市)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발굴하고 기념 비석을 세운 최근갑(崔勤甲)의 삶.

개설

용정. 해란강(海蘭江)육도하(六道河)의 합수목에 위치한 풍요로운 땅, 한민족은 피와 땀을 흘려 이 땅을 개척하고 지켜왔다. 이렇게 유서 깊은 용정의 잠자던 땅을 깨운 사람이 있다. 자칫 먼지 속에 잊혀질 뻔한 역사와 음지에 묻힐 뻔한 역사의 주인공들을 천추만대 기릴 수 있도록 비석을 세워준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근갑이다. 2015년 그의 현재 나이는 88세이다.

사회에 환원하며 산 삶

최근갑은 1926년 12월 24일 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를 잃고 1941년부터 용정은진중학교에서 고학했다. 최근갑은 광복 전 일본인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머슴살이를 했다. 1944년 12월에 용정은진중학교 토목 건축과(4년제)를 졸업했다.

최근갑은 해방 후 화룡현(和龍縣) 정부 교통과장, 민정과장, 용정 대신저수지 기술 총지휘, 용정시 건설 위원회 부주임, 주임, 당위원회 서기로서 연변의 도시 건설과 저수지 건설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최근갑의 부친 최승영(또는 최청남)은 1931년 항일투쟁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화룡현에서 공산주의 선전을 하다가 체포되어 청진형무소를 거쳐 서울서대문형무소에까지 끌려가 혹형을 치른 항일 독립지사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가정의 영향 아래 반일 교육을 받아왔고 망국노의 설음을 목격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최근갑은 누구보다도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업터에서 열심히 일해 여러 차례 길림성 정부와 연변 주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1986년 퇴직 후에도 독립운동 지사의 아들로서 무언가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는 과거 은진중학교 동문들과 연락하여 외국 자본과 기업을 유치하는 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용정의 여러 중학교에 물리 실험 기계, 컴퓨터, 대량의 도서를 들여왔고 연변 지구 12개 농촌 마을에서 빈곤한 이웃돕기 활동을 전개했다. 용정시교에 800㎡ 되는 마을회관을 지었으며 용정에 있는 농학원에 영어 학습반을 개설하고 영어 강사 2명을 보내주었다. 그밖에도 용정에 장공장, 청수냉면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용정시와 한국 평택시의 자매 결연을 추진하기도 했다.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위한 위령제

“우리 민족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항일 투쟁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독립운동 시기 연변의 조선인 항일 열사는 3,026명입니다. 길림성 인구의 3% 밖에 안 되는 연변 한인[조선족] 인구가 길림성 항일 열사의 41%를 차지하며 연변 내 항일 열사 총 수의 97%나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을 지켜 싸운 이 땅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역사란 당대에 발굴하고 조명하지 않는다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발굴하여 역사책에 올리고 형식이 부동한 혁명 유적지를 복원하여 혁명 전통 교육의 기지로 만들고 관광유람지로서도 기능을 하도록 함으로써 세계만방의 벗들이 와서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잘 건설해야 합니다.”

최근갑은 이렇게 말하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다. 최근갑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역사 발자취를 더듬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기기 위한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6년 정년 퇴직 후 항일 유적지를 발굴하고 비석을 세움으로써 자기 민족의 역사를 알게 하고 자라나는 후대들이 자기 조상들의 애국 애족의 얼을 이어받도록 했다.

1987년 6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내 용정시 정부 등의 지원으로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는 한편, 1988년 9월에는 은진중학교 졸업생들을 소집하여 “은진중학동문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1989년 10월 최근갑은 용정 대외 경제 문화 교류 협회 회장으로 3·13 운동 70주년이 되는 해에 인하대학교의 윤병석 교수와 연변대학박창욱 교수 등과 만나 얘기를 하던 중 3·13 반일 시위에서 수난당한 의사들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가를 고증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최근갑은 "이 땅에서 반일투쟁을 위해 피흘린 영령들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한가, 오늘까지도 이름 모를 황야에 묻혀있다니, 참으로 우리가 부끄럽다."라며 사업을 전개하게 될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최근갑은 3·13 반일 의사들의 묘소 발굴 사업에 적극 나섰다. 때는 1989년 겨울, 칼바람이 쌩쌩 불어치는 한 겨울이었다. 그는 동료인 김규철, 박죽송 등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임원들과 함께 당년의 유지인사 32명을 방문하고 5차에 거쳐 현지 답사를 한 뒤, 1990년에 드디어 영령들이 묻혀있는 지점을 확인했다. 1990년 4월 17일 용정시 3·13 수난 의사 추념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최근갑이 회장에 추대되었다.

3·13 당시 목격자였던 방창화와 김응삼 두 노인은 70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 이곳을 '만세묘지'라고 했고,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비석을 세웠었는데 후에 일본인들이 그 비석을 뽑아버렸다고 증언했다. 이 유적지는 용정시 동남쪽 4㎞ 되는 합성리(合成里)에 위치해 있다.

70여 년의 무주고혼으로 쓸쓸히 묻혀 있는 반일지사들의 묘소는 비바람을 맞고 말이나 소로부터 짓밟혀서 볼품이 없었다. 그해 청명(淸明)은 이미 지나갔지만 위령제라도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최근갑은 1990년 5월 18일 용정 제5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묘소를 다듬은 나무 비석을 세우고 다음날인 5월 19일 각계 인사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를 지냈다. 이 소식은 재빨리 세계 각지에 알려져 한국, 미국, 일본의 보도 매체에 보도됐다. 그 뒤 1990년 9월 최근갑은 『용정삼일삼반일의사능(龍井三一三反日義士陵)』이란 책을 출판, 보급하였다.

역사 유적지 발굴 사업이 추진되면서 최근갑은 1998년 12월 10일 3·13반일의사묘수선위원회를 사단법인 용정 3·13기념 사업회로 개칭하고 이사회를 구성하였는데, 최근갑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혁명유적지 발굴 및 기념 비석 건립

용정은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제일 큰 한인 집거지여서 중국 한인 근대문화와 교육의 발상지이자 반일운동의 책원지였다. 또 한인 민속이 제일 잘 보존된 곳이자 연변에서 중국 공산당의 활동 역사가 제일 오랜 곳으로서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최근갑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유적지에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을 하나씩 추진해나갔다. 지금까지 최근갑은 ‘3·13 반일 의사릉’ 석비를 비롯하여 ‘3·13 반일 집회 유적 기념비’, ‘서전 서숙 유적 기념비’, ‘15만원 탈취 사건 기념비’, ‘장암동 참안 유지’ 기념비, ‘김약연 묘비’, ‘명동학교 유적지’ 기념비, ‘5·30 폭동 기념비’, ‘은진중학교 옛터 기념비’ 등 9개의 비석을 세우거나 동참하면서 용정의 ‘비석 아바이’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1993년 4월 최근갑은 3·13 반일 의사릉 앞에 한자로 ‘3·13 반일 의사릉’이라 새겨진 기념 석비를 세웠다. 석비 뒷면에는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인 인민 군중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중국침략정책에 저항하여 일떠나 민족 독립을 재취하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적 혁명투쟁이다. 동월 17일 용정 합성리 공동 묘지에서 순난 열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지방당국의 잔폭한 죄행에 항의하였다.”라는 비문과 함께 19명 열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13 반일 집회 유적 기념비’는 1995년 4월에 3·13일 반일 집회가 열렸던 곳에 세워졌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석비 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 인민 3만여 명이 이곳에서 회집(會集)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용정 3·13 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1995년 4월 ‘서전 서숙 유적 기념비’가 옛 서전 서숙 터(현재 용정실험소학)에 세워졌는데, "1906년 4월 반일지사 이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 서숙을 개숙하였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장암동 참안 유지’ 기념비는 1994년 7월 용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에 1920년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대표적인 한인 학살지에 세워졌다. 최근갑이 ‘장안동 참안 유적지’를 찾아 고증하고 유족들이 ‘1920년 10월 30일 일본군의 간장암동(間獐岩洞) 참안 사건 희생자 33명 추모비’를 세우도록 지원한 결과였다.

당시 1920년 말 연해주로부터 침입한 일본군 77명이 용정촌 동북 25㎞ 지점에 위치한 한인 기독교 마을인 장암동을 포위하여 전 주민을 기독교 교회 내에 집결시킨 후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지어 꿇어앉힌 다음 아직 타작하지도 않은 조 집단으로 교회당 안을 채워 넣고 석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 화염이 충천하였다. 일본군 대장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모두 찔러 죽여 결국 몰살시켰다.

최근갑은 1992년 10월 명동교회 옆에 파묻혀 있던 ‘김약연 기념비’를 발굴하여 그곳에 다시 건립하였다. 1942년 김약연 목사가 사망 한 후 1943년 당시 명동교회에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비석의 상당 부분이 잘려나갔고 남은 것도 심하게 훼손되어 비문을 읽을 수 없다. 장재촌의 묘비처럼 문화대혁명 때 당한 수난의 증표다. 명동교회를 복원하면서 깨뜨려 넘어져 있던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시멘트로 비석 기단을 만들면서 펼쳐놓은 성경책 모양으로 꾸민 것이 어색하면서도 애틋하다.

‘김약연 묘비’는 2006년 7월 김약연 묘소에 건립되었다. 묘비 앞면에 '규암전주김공약연지묘(圭巖全州金公躍淵之墓)'라고 씌여 있고, 뒷면엔 '민족교육의 선각자 규암김약연 선생'이라고 제목한 비문이 새겨져있다. 김약연의 묘소는 선생의 생가와 규암재가 있던 장재촌의 뒷산 기슭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김약연의 부인 안연 여사와 맏아들 김정근의 묘가 가지런히 모셔졌다.

‘명동학교 유적지’ 기념비는 명동학교 옛터에 세워졌다. 명동학교는 1908년 김약연 등이 북간도의 용정에 세운 근대적 민족 교육 기관이다. 하지만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야만적인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자행하며 명동학교에도 불을 질러 소실되고 말았다. 예전엔 옥수수 밭으로 변해있었지만 2009년 말 연변조선족자치주용정시가 130만 위안을 들여서 완벽하게 복원하였다.

‘은진중학교 옛터 기념비’는 1998년 9월 은진중학 옛터에 세워졌다. 은진중학은 1920년 김약연과 독립운동가 이동휘 등의 요청에 따라 캐나다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압박으로 민족의 중심지가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옮겨오던 때였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용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었던 것이다. 1946년에 은진중학교를 비롯하여 광명 중학교·대성중학교 등 용정 지역의 6개 학교가 통폐합하여 지금의 대성중학교가 세워졌다.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는 1999년 6월 용정시 명동촌에서 나와 버스로 잠시 달려 한적한 도로가 왼편 작은 언덕에 세워져 있다. 15만원 탈취 사건은 1919년 겨울 임국정최봉설 등이 철혈 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회령에서 용정으로 수송중인 마차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이다. 15만원 탈취사건 지점에 대해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용정 3·13기념사업회는 여러 사료를 종합, 분석한 토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한 정확한 위치라 할 수는 없으나 대략 범위는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2000년 5월에는 5·30 폭동 기념비를 세웠다. 5·30 폭동은 1930년 5월 30일 간도지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 하에 일어난 반일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당시 용정에서 황진연(黃珍淵)의 주도하에 일제의 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 출장소 등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조선인 지주의 가옥을 방화하고 철도·교량 등을 파괴했다. 이에 일제는 함경도 회령에 있는 75연대를 급거 출동시켜 7월까지 만주군벌군과 합동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김근 등 85명을 검거했다. 폭동은 당시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던 만주지방의 광범한 농민대중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준비도 미흡해 300~500여 명의 소규모 인원만이 참가하는데 그쳤다.

20여 년째 이어온 유적지 발굴, 정리, 기념 사업도 지난해에 드디어 용정시 당위와 정부의 지지를 얻어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로 차원을 높였다. 현재 3·13 반일 집회 유적지, 3·13 반일 의사릉, “서전 서숙” 유적지, 명동학교 유적지, 5·30 폭동 유적지 등 5개는 용정시 정부에서 명명한 용정시 중점 문물 보호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모두 ‘비석 아바이’의 끈질긴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최근갑의 주도로 세워진 9개의 비석은 연변 지역 항일 투쟁사의 주요한 부분을 반영하고있으며, 우리의 빛나는 항일 투쟁사의 현장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 비석들은 우리 후대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조상들의 얼과 넋을 기리는 거울이 되어 그들의 영혼을 환히 비춰줄 것이다.

대외 친선 교류 사업

최근갑은 1988년 한국 (주)종로서적 등의 지원으로 은진중학교에 도서 수 백권을 기증하였으며, 1989년에는 미국의 사업가가 독자 기업인 주보(珠寶) 공장을 용정에 설립하도록 주선하였다.

1986년에는 캐나다의 이상철 박사가 용정시 병원에 현미경 등 의료기재를 지원하도록 하였고, 1989년에는 서울청수 냉면 공장을 용정에 건립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밖에도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을 빛내는 수많은 대외 친선 교류 사업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참고문헌
  • 최근갑, 『시련의 열매』(최근갑 회억록)(요령민족출판사, 2013)
  • 「역사유적을 깨운 “비석 아바이” 최근갑옹」(『연변일보』 2010.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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