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獨立軍을 索出하라, 滿洲에서 惡名높던 間島 特設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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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친일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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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8년 12월 15일 |
| 간도 특설대활동지 | 안도현 명월구 |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만주국의 치안숙정(治安肅整)도 그 강도를 점점 높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북 항일 연군을 비롯한 만주지역의 항일단체들의 독립운동 양태도 바뀌어갔다. 전면전보다는 유격전을 택하거나 때에 따라 변칙적인 공격으로 만주국군 등과 투쟁하였다. 동북 항일 연군에 대한 만주군국의 대응은 아주 ‘유연하게’ 진행되었다. 그 이면에는 만주국군이 지닌 독특한 성격이 있다.
만주국 국군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정부가 아닌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만주국군은 초기 혼성여단, 보병단, 보병영으로 구성되었다. 군정부에서는 만주국군 정비를 위해 국군정비 방침을 3기로 나누어 설정하였다. 제1기는 사병의 동요를 방지하고 국군의 안정을 도모한다. 제2기 비적 토벌을 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든다. 제3기 확실한 국군으로 만든다. 이와 같은 정책 하에 만주국군은 대내외적 존재를 과시하였다.
만주국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시 되었다. 하나는 국가적 신인도이며, 다른 하나는 군대 본연의 임무이다. 후자의 경우 만주국 초기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 경찰과 함께 동원되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끊임없이 전개된 저항세력의 활동은 군대의 임무를 잠시 내적 문제의 ‘해결’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기존 군벌의 저항도 있었지만, 항일무장세력의 저항은 만주국 정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통한 탄압을 펼치게 된 것이다. 만주국 초기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하다는 것은 그 만큼 만주국 건국의 정당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간도 지역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동북 항일 연군은 만주국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전투 및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유격대를 모태로 성장했던 동북 항일 연군은 지역민에 대한 동조세력 확보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는데 필수 요였다. 따라서 이들은 노래책, 삐라 등을 통하여 대군중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은 열차습격이나 헌병대를 공격함으로써 일제 침략의 상징물에 대한 파괴를 그 목표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북 항일 연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렇듯 동북항일연군이 직접 전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만주국의 지속적인 ‘치안숙정’과 이를 통한 항일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따라서 간도 특설대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설립되었다. 첫째, 만주국 성립 이후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기치 속 한인 청년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데 ‘군대’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만주국과 일본의 저항 세력인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다.
1938년 9월 간도성(間島省) 성장(省長) 이범익(李範益)의 건의에 의해 간도 특설대가 설립되었다. 1938년 9월 15일 간도 특설대는 안도현 치안대, 훈춘국 경감시대, 연길현 청년 훈련소, 봉천 만군 군관학교 및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선발된 위관급 이상의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 조선인 하사관 9명으로 안도현 명월구에서 그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준비 과정에서 만주군은 간도 특설대의 건립 의의를 북간도 전역에 선전하였으며, 한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추동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1938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한인 청년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간도 특설대의 본부를 안도현 명월구에 설치한 것은 그곳이 집단부 락의 설치 구역이라는 점과 또 항일 무장 세력 즉 동북 항일 연군의 근거지이기 때문이었다. 간도 특설대는 설립 당시부터 대대적인 홍보 선전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모병 수의 많음에 초점을 맞추어 신문보도를 통해 지역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간도 지역 한인 청년들의 다수가 간도 특설대에 입대원서를 제출하였다는 사실은 만주국 입장에서 간도 특설대의 설립이 한인사회에 긍정적인 반응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도 특설대원을 국가 간성이라고 추켜세워 입대원들에게 ‘충량한 신민’이라는 인식과 함께 ‘국가적 충성심’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특히 교육과 신분 보장 및 국가관의 주입은 간도 특설대의 활동 기간 동안 한인 청년들을 유인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간도 특설대의 설립 당시 여건 조성을 위해 또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사회에서 위문금을 거두었다. 나아가 간도성에서는 간도 특설대 대원 위문금 모집을 특설 부대원 사기진작과 연관시켜 학교 및 종교 사회 단체로의 모금행위를 확대하였다.
드디어 1938년 12월 15일 200명의 청년들이 모인 가운데 제1기병 입대식이 거행되었다. 해방 때까지 7기병까지 모집하였으며, 총 인원은 약 690명 정도였다. 지원 자격은 1)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한인 남자로서 신체건강하고 품행 방정한 자, 2)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 학력을 가지고 일본어 독해 가능한 자, 3)보증인 2명 이상으로 전과가 없고 군경 근무 경력이 없는 자로 제한하였다. 즉 사상적으로 핵심적 인원을 선발하여 이들로 하여금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고 또 이주한인에 대한 적절한 통제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간도 특설대가 가장 적합하였다.
특히 제2기 모집 시에는 제1기생의 만군 군관 학교 입학과 이후 일본육사 유학이라는 달콤한 유혹도 있었다. 실제로 간도 특설대 출신 중 상당수가 만주 군관 학교에 입하였다. 다음은 간도 특설대 출신으로 만주 군관 학교에 입학한 대원의 입학 소감을 피력한 당시 신문 인터뷰이다.
우리들은 다만 교관의 교훈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중략) 군관학교에 입학한 다음의 결심입니다. 염일 부대의 명예를 욕되지 않게 하기에 노력하려고 한다.(만선일보, 1940년 1월 12, “조선인특설부대의 손, 윤 양군 군관학교후보에 합격”)
1기부터 7기생들이 모두 활동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퇴역하거나 일신상의 이유로 전직한 자들이 많이 발생하여 해방 때 간도 특설대의 인원은 약 300명 정도였다. 간도 특설대는 엄격한 훈련을 통해 구성원들을 만주국 각 기관의 교관으로 파견되었으며, 만주국 협화회 청년 훈련소의 조교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하사관 가운데 훈련성적이 우수한 자는 만군 군관 학교에 파견되어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다시 소위 직함을 달고 간도 특설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설립 초기 만주국 국무원 치안부 소속의 길림 제2군관구 사령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1939년부터는 목단강 제6군관구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간도 특설대는 지휘관의 이름에 의해 별칭을 통용되었다. 즉 1938년부터 1940년 3월까지 염천(染川) 부대라고 하였고, 1940년 3월부터 1942년까지는 원부(園部) 부대, 1942년부터 1943년 5월까지는 좌좌목(佐佐木) 부대, 1943년 5월부터 1944년 7월까지는 시전(柴田) 부대, 1944년 7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등정(藤井) 부대라고 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부관실, 의무실, 군수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보병과 기박(機迫) 두 개 연대를 설치하였고, 보병연대 아래 세 개의 내무반과, 기박 연대 아래 두 개의 내무반을 설치하였다. 다만 이것은 고정적인 편대라기보다는 임시적인 편대에 가까웠다. 항일무장세력과의 전투를 치루기 위해 각 내무반을 여러 개로 분할하여 조직의 융통성을 가미하였던 것이다. 1940년 12월 보병, 기박, 신병 세 개 연대를 조정하였으며, 영(營)의 편제로 구성되었다. 이후 간도 특설대가 열하(熱河)로 가기 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간도 특설대는 1944년 열하로 간 후 본부에 부관처를 설치하여 군수, 군기, 통신 등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전문적인 정보 관리를 두었다.
특히 간도 특설대는 지역적 범위를 벗어나 활동하면서 정보의 중요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간도 특설대의 지역적 이동은 ‘간도’라는 지역 군대라는 이미지 보다는 전 만주를 상대로 한 정예 부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반은 1944년 초 열하성 유수림자에서 성립되엇다. 그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각 지역의 민병대의 활동과 군중 동향을 파악하여 특설대의 활동울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정보반은 각 연에서 13명의 정예병을 뽑아 조직되었으며, 투항한 자 가운데에서도 충당하였다. 정보반의 임무는 첫째 정보수집, 둘째 반공선전, 셋째 체포된 항일연군을 직접 심문하고 살해하였다. 정보반에서 가장 남는 활동을 한 사람은 홍청파(洪淸波)이다. 이와 같이 정보는 간도 특설대에게는 활동의 바로미터로 작용하는 중요한 인자였다.
간도 특설대의 위관급 이상의 조선인은 약 130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간도지역에 그 토대를 두고 있었다. 외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 대부분의 주소가 간도에 집중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연령대는 1910년대에서 20년대 초반 출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자발적인 입대 이후 보다 새롭게 성공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애를 들면 1기생인 태용범, 손병일, 윤수현은 만군 군관 학교에 합격하여 앞날을 보장받았다. 해방 이후 행적은 한반도 즉 남북한으로 재이주하거나 심사 이후 현지 거주로 크게 구분된다. 북한으로 간 경우 생사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활동상을 파악하기 곤란하지만 한국의 경우 상당수는 국군 창립에 참여하여 한국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신봉균(申奉均), 윤수현(尹秀鉉), 송석하(宋錫夏), 백선엽(白善燁) 등이다.
신봉균은 만군 군관 학교 출신으로 간도 특설대 제1연 패장을 지냈다. 해방 이후 신현준(申鉉俊)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했다. 1946년 한국 해군 중위로 임관하여 1949년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등 한국 전쟁에서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1961년 국방차관보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다. 2007년 미국플로리다주에서 사망했다.
윤수현은 간도 특설대 1기생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추천 입학하여 졸업 후 간도 특설대 보병1련 소위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한국 육군에 들어가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송석하는 만주 군관 학교 출신으로 간도 특설대 기박연 연장을 지냈다. 해방 이후 한국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소장, 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 등을 역임했다. 1999년 사망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백선엽은 1941년 만주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다.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1950년 제1군단장을 지냈고, 휴전회담시 한국측 대표로 나가 휴전문서에 조인하기도 했다.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후 1960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과 동시에 주중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토고·세네갈·카메룬·차드·모리타니 주재대사를 겸임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했고,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하다가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이 되었다. 그밖에 여러 국가투자기관 및 기업체의 간부직을 역임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간도 특설대는 만주국의 삼광(三光)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간도 특설대 활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간도 특설대가 치중했던 것은 정보 분야의 확충이었다. 정보 역량의 강화만이 항일 무장 세력을 적절하게 감시하고 탄압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간도 특설대의 정보역량은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겠지만 관동군 및 만주국군이라는 상급기관의 보조를 통해서 가능하였다.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가혹한 탄압을 통한 적당한 회유로 정리할 수 있다.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크게 지역과 시기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편의상 지역적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1944년 이래 간도 특설대의 활동이 열하성(熱河省)과 하북성(河北省)에 치중되었다는 점은 간도 특설대의 활동이 단순히 간도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간도 특설대는 창립부터 1943년 말까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된 활동은 구성원의 능력 배양과 작전 능력의 제고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북 항일 연군을 비롯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 과정에서 간도 특설대는 편복대(便服隊)를 조직하여 농민으로 변장하고 각 마을에 파견하여 직접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민심의 동향도 파악하였다. 1939년 7월 1일 간도 특설대는 천보산 부근에서 항일 연군을 추격하여 두 차례 교전을 발였으며, 항일 연군의 피해가 컸다. 연변 지역에서 간도 특설대의 탄압으로 8명이 희생되었다.
한편 간도 지역에서 ‘특수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간도 특설대는 그 지역적 범위를 열하성과 하북성으로 확대하였다. 이는 간도 지역에서의 항일 연군의 활동이 점차 약화됨으로써 잘 훈련된 군인들인 간도 특설대를 전장지역인 이 일대로 파견하였던 것이었다. 먼저 열하성에서의 활동을 살펴보자. 간도 특설대는 1944년 초부터 가을까지 열하성 유수림자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유수림자 주위 약 60리 이내의 촌락에 대하여 정보반의 정보를 바탕으로 항일근거지를 공격하였다. 1944년 2월 간도 특설대 보병 2련 김송(金松) 중위는 한 소대를 거느리고 이영자(李營子)에 와서 그곳 담당자인 패장 고분산에게 팔로군과의 관계를 자백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이때 주난의(朱蘭義)가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송은 유수림자의 한인 김동근이 팔로군과 관련이 있다는 이류로 물고문으로 치사케 하였다. 그해 3월 6일 김송 중위는 정보반의 장춘(張春), 안삼룡(安三龍) 등을 파견하여 팔로군의 정황을 정찰하게 하였다. 특히 이들은 직접 팔로군으로 변장하여 직접 마을로가 탐방하였으며, 정보를 보고 받은 김송은 부대를 이끌고 직접 그 마을로 가 팔로군과 내통하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손요종, 손국동, 조청산을 권총으로 살해하였다. 1944년 6월에는 박봉학과 이풍근을 파견하여 팔로군의 존재 여부를 정탐하여 유수림자 서쪽 20리 마을을 수색한 끝에 팔로군 한명을 전재학이 살해하였다. 이처럼 간도 특설대가 열하성 일대에서 살해한 사람은 22명이며, 체포된 사람도 14명에 이르렀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1월가지 간도 특설대는 하북성 밀운현(密云縣) 석갑진(石匣鎭)과 평곡현(平谷縣)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석갑진에 주둔한 후 병력을 연을 단위로 편제하여 석갑진 주위 100리를 봉쇄하고 항일유격구를 습격하여 피난민을 추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국군과의 연합작전도 펼쳤다. 1944년 7월 간도 특설대는 회유현 대수욕에 주둔하면서 만주국군이 필로군 부대를 공격할 때 합동작전을 펼쳐 팔로군 지원마을로 의심되는 곳을 수색하여 팔로군 교통원 서복원 등 2명을 살해하였다. 같은 달 20일 서갑진 동남쪽 15리에서 간도 특설대 2연 상등병 이풍근이 마을 주민 이회정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진상춘을 구타한 후 우물에 처넣어 죽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마을 사람 21명을 석갑진으로 압송한 20여 일 동안 감금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전시 상태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금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과 병을 가리지 않았다. 1944년 8월 1일 간도 특설대는 석갑진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동장화(東庄禾)를 토벌할 때 피난 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으며,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집단 구타를 하기도 하였다. 그해 8월 5일에는 석갑진의 동남쪽에 위치한 동전각장(東田各庄)에서 군중들을 유항요 집에 모아놓고 팔로군의 행적 등에 대하여 탐문한 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을 주민 유몽재를 총으로 살해하였다. 8월 10일 간도 특설대가 석갑진 동쪽의 송수곡 일대를 공격하면서 군중을 붙잡은 후 심하게 구타하여 그 가운데 왕준신 등은 두 달 이상 치료를 필요로 하였다. 8월 중순 간도 특설대원 정호준(鄭浩俊), 이호일(李浩日), 이리순(李利淳) 등이 석갑진 서쪽 50리 떨어진 마을에서 노인을 취조하던 중 구타하여 죽였다. 특히 정호준은 그달 석갑진 부근 마을에서 40여 세의 민간인을 구타하여 죽였다. 이처럼 항일운동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일반 군중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거듭한 간도 특설대는 공격한 마을에서 식량도 탈취하였다.
이렇게 강력한 탄압으로 팔로군들의 투항도 이끌어 냈다. 1944년 8월 15일 간도 특설대는 석갑진 반성자(半城子) 일대에서 팔로군 공작원 주수길을 체포하였으며, 그는 곧바로 투항하였다. 1944년 8월 17일 간도 특설대는 석갑진 서북쪽 단산자(團山子)에서 팔로군진백학을 붙잡아 취조 끝에 진백학은 투항하여 일본 근무하였다. 투항하게 했던 간도 특설대의 탄압상은 고문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특히 팔로군과 연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1944년 9월 간도 특설대원 김동근(金東勤), 김태복(金泰福) 등은 석갑진 서북에 위치한 마을에서 팔로군 한명을 체포하여 고춧물로 고문을 한 후 다시 가죽띠로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또 같은 달 김동근은 김길룡, 이풍근과 함께 팔로군 관계자 2명을 총으로 여러 차례 찌르면서 고문한 후 살해하였다. 또한 아녀자에 대한 강간도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1944년 11월 간도 특설대 중사 김헌삼(金憲三)은 오경수, 최홍준과 함께 부녀자를 윤간하고 그 남편을 살해하였다.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무자비한 탄압과 보복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테러 행위가 잦았다. 이와 같이 간도 특설대가 하북성 석갑현 일대에서 34건의 토벌을 단행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일반 민중 39명이 살해되고 체포된 자가 62명이었다.
‘잔인한 탄압의 대명사였던 간도 특설대는 하북성 사집진(司集鎭) 일대에서도 그 잔학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1945년 1월부터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간도 특설대는 주로 하북성 사집진에서 활동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주로 민간인에 대한 구타와 고문, 살해를 자행하였다. 1945년 1월 사집진 동남쪽에 위치한 장장(張庄)이란 마을을 포위하고 군중들을 고문하였으며, 3월에는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아 죽였다. 1945년 4월 4일 사집진에서 북쪽으로 12리 떨어진 고사장(庫司庄)에서는 팔로군을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젊은이를 살해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문도 자행하였다. 같은 달 27일 사집진 동북쪽 동신장(東新庄)에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였으며, 개인 소유 재산도 강탈하였고, 젊은 여인을 강간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간도 특설대는 마을 전체를 소가하여 항일투쟁의 싹을 미리 제거하는 데 잔인한 행동 역시 서슴지 않았다. 1945년 3월 하북성 사갑진의 북쪽에 위치한 전자촌(甸子村)이란 마을에서 팔로군과 교전하면서 그 옆 마을인 임육장(任六庄)의 가옥 10여 채를 소각하였다. 같은 달 24일 감정장(邯井庄) 일대를 공격하면서 간도 특설대원 김남룡이 희생당하자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1945년 4월 23일 간도 특설대는 사집진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영각장(榮各庄)에서 팔로군 정보원이 있었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를 불 질러서 그 가운데 64채가 전소되었다. 사집진에서 간도 특설대의 활동으로 103명이 살해되었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
간도 특설대는 7년 여간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탄압과 민심동향 파악 및 무자비한 ‘토벌’ 등 이주 한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존재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일제의 패망 후 하북성에 주둔해 있던 간도 특설대는 연장 김찬규의 인솔 하에 심양으로 도망간 후 해산되었다. 일부는 남북한으로 귀환하고 일부는 중국에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