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抗日 獨立 鬪士의 精神이 깃든 旅順 監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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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예술/교육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유적 | 안중근, 신채호 등 항일독립투사들이 갇혔던 여순 감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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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2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 박물관 | 중국 대련시 여순구구 원보방 향양가 139호 |
대련 시내에서 여순감옥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옛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노선을 따라서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 노면전차와 버스를 갈아타는 방법이 비교적 저렴하다. 승합차나 택시를 대절하여 가는 방법, 관광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대개 한국인 관광객은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여러 번 대련, 여순 지역을 답사한 필자는 이번에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여행 정보를 뒤져보니, 대련 기차역 뒤편 고속버스 터미널 참북(站北)광장에서 여순행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숙소를 나와 대련기차역 중간의 지하도로를 따라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였다. 지하도로를 나오니 각종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서울남대문시장이 복잡하다고는 하나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겨우 표를 끊고 버스에 오르니 솔솔 잠이 쏟아졌다. 약 1시간 30분 정도를 가니 여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이라고 해서 택시를 탔다. 버스(3번)로는 다섯 정거장 거리로 원보방에서 하차하면 된다고 한다.
택시를 내려 박물관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라는 현판이 붙은 하얀 색 몸체에 지붕은 검은 회색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정문 오른쪽에 여순일아감옥구지 박물관, 대련시 근대사 연구소 입간판이 보인다. 마침 관광버스에서 내린 한 무리의 한국인 관광객이 막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부모와 함께 온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정문에 있는 간판을 보고 “아빠, 박물관 제목이 왜 이렇게 길어? 이게 무슨 뜻이야?” 어린 학생의 수준에서는 이해가는 질문이다.
대련시 여순구구(旅順口區)에 있는 여순감옥은 현재 여순일아감옥구지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한자를 풀이하면 일본과 러시아의 감옥 옛터였다는 말이다. 왜 중국 땅에 일본과 러시아가 감옥을 건설하였을까? 그 사연을 역사에게 물어보자.
1894년 봄 조선에서는 전국적인 농민봉기 즉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다급했던 조선정부는 청나라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 역시 군대를 파견하여 급기야 한성의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일전쟁은 전쟁터가 한반도에서 대련시의 여순, 즉 요동반도를 거쳐 산동반도의 위해위(威海衛)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하고 요동반도, 대만 등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게 하였다. 이른바 삼국 간섭의 결과이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요동반도 반환 유공자로서 함대를 파견하여 여순을 점령하고 1898년 3월 27일 “여대조지조약(旅大租地條約)”을 체결하고 여순과 대련을 러시아 식민지로 만들었다. 1899년 러시아는 여순, 대련 행정 구역을 관동주(關東州)로 하였으며 주청(州廳)은 여순에 설립하였다. 당시 관동주 총독 알렉세프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허가를 받아 1902년부터 여순 원보방(元寶坊)에 감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할 무렵에는 감옥의 사무실과 85간 감방을 건축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전쟁시기는 야전병원과 기병대 병영으로 사용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여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여순은 관동주를 통치하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육 등 중심지가 되었다. 1906년 9월 1일에는 관동총독부민정부 산하에 감옥서를 설립하고 여순에는 본서, 대련에는 지서, 금주(錦州)에는 출장소를 세워 러시아가 건설한 감옥을 확장 건설하였다. 1906년 12월 15일부터 정식 감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중국 96명, 일본인 59명 총 155명을 처음으로 감금하였다.
감옥 총 부지는 22만 6천㎡이며 담장 이내의 면적은 2만 6천㎡, 벽의 높이는 4m, 길이는 725m이다. 감방구조는 1층에는 1사(舍)부터 5사까지 102개 감방, 2층에는 6사부터 10사까지 125개 감방, 그중 8사에는 1개 교수형실을 설치하였으며, 3층에는 11사 32개 감방으로서 총 감방수는 259개이다. 또한 그 외 4개의 암방(暗房), 18개 병방(病房)이 있어 동시에 2,000여 명을 수감할 수 있다. 1934년에는 감옥 동북쪽에 2층 비밀 살인장인 교수형실을 설립하였으며 감옥 내에는 피복, 방직, 세탁, 인쇄, 기계, 철공, 목공 등 15개 공장을 설치하였다.
여순감옥의 연혁을 보면 1906년 9월에는 ˂관동도독부감옥서˃, 1920년 8월에는 ˂관동청감옥˃, 1926년 10월에는 ˂관동청형무소˃, 1934년 12월에는 ˂관동형무소˃, 1939년 1월에는 ˂여순형무소˃로 하여 1945년 8월 23일 소련 홍군이 여순에 진입하여 24일 여순감옥을 접수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1971년 7월 재정비되어 ‘진열관’으로 활용되었다. 1988년 고건축 및 역사기념건축물 부분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한편 여순 일본 관동법원은 1906년 9월 1일 여순감옥과 동시에 설립하여 1906년부터 1935년까지 총 21,376건을 심판하였으며 그 중 고등법원에서는 8,062건을 심판하였으며 지방법원은 1906년부터 1923년까지 13,314건을 심판하였다.
건물 오른쪽에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보안 검사 통로를 통과하자 온통 붉은 색 벽돌의 건물이 나왔다. 간혹 검은 색 벽돌도 보였다. 검은 색 부분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색은 일본이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먼저 검신실(檢身室)로 들어섰다. 검신실은 수감자의 몸을 검사하던 곳이다. 수감자들이 공장에 가서 부역할 때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였다. 먼저 옷을 모두 벗고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번호를 외치며 나무 막대기를 뛰어 넘었다. 검신실을 통과하면 일반 감방을 볼 수 있다. 잠시 복도를 나오면 안중근 의사가 있었던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이 있다. 쇠창살 틈으로 들여다 본 안중근의사의 감방은 특별실로 왼편에는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 담요가 깔려있고, 오른편 책상에는 의자와 함께 안중근 의사가 쓰던 필기 도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금방이라도 인자한 미소를 띤 안중근의사가 뒤돌아볼 것 같았다. 안중근의사는 이 감방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유묵 200여점을 남겼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태형실, 암실 등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면 신채호, 이회영 선생이 투옥된 감방이 나온다.
신채호는 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등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높이고 한국 근대사회의 기초를 확립한 분이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하였으며, 이 선언에서 그는 무장항일투쟁을 주장했다. 1925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무정부사상을 선택하셨다. 1928년 체포되어 193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6년 2월 21일 병으로 순국하셨다.
이회영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자신의 6형제와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당시 이회영 가문은 명문후손으로 만주로 이주할 당시 전 재산을 매각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쳤지만, 형제 중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1명 정도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대표된다. 1932년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련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11월 16일 순국하셨다. 그러나 간악한 일제는 자살로 위장하여 발표하였다.
밖으로 나가면 감옥 제1공장이 나온다. 일본은 15개 공장을 증축하고 전문적으로 각종 군용품을 생산하였다. 다시 의료실에 들어가 의료 관련 기구를 살펴보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다.
일반적인 오르막길처럼 보이지만, 길 앞에 중국어로 된 안내비석에는 무서운 글이 적혀있고, 이 길의 아픔을 그리고 무서움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 당시 사형을 판결 받은 항일지사들이, 쇠고랑과 족쇄를 찬 상태로 간수의 호송 하에 이 길로 형장으로 올라간다.” 는 내용이다.
교형장 즉 사형장에 들어가니, 교수대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아래는 원통형의 나무통이 있었다. 사형당한 한국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사형당한 이들은 원통형의 나무통에 담아 감옥 안이나 뒷산에 버려지듯이 쓰레기처럼 매장되었다. 사형장을 빠져나오면 시체가 담긴 통을 매장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는 전시실을 볼 수 있다. 1971년 감옥 내 부지에서 발굴하여 복원한 이곳에서는 매장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간수들의 감독 하에 수감자들은 사형당한 시체를 묻기 위해 감옥 내 시체 매장하는 곳을 삽으로 파기 시작한다. 수감자들이 파놓은 땅에다가 시체통을 놓은 다음 매장하였다. 이 전시실에는 시체통에 해골상태로 발굴된 모형을 그대로 복원하고 있다. 정말로 끔찍하다. 복원된 전시실에서는 원통한 원혼이 울부짖는 듯하다. 제국주의 시대에 ‘인권’ 운운은 사치였다는 점을 알면서도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할 말을 잊었다.
당시 감옥의 의사(醫師)였던 일본인 고가 쇼이치(古賀初一)는 여순감옥의 잔혹함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간수는 사형수를 1㎡ 크기의 나무판에 끌고 와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후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로 목덜미를 단단히 묶는다. 경첩이 열리면 사형수가 이동식 나무판에서 떨어진다. 나는 계단 밑에서 대기하였다가 사형수의 심장박동을 검사하고 즉시 형무소장에게 보고한다. 제1구 시체가 통에 담아 이동하면 다음 것을 기다린다. 비참하다! 정말로 비참하다! 제1구, 제2구... 제5구까지 반드시 연속 검사해야 한다. 이런 사형수와 시체를 마주보면서 나는 내가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통절하게 느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교수형에 쓰이는 삼노끈은 아주 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빨았는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라며 당시 상황과 심경을 남겼다. 그도 인간인지라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이어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여순감옥에서의 국제지사들[國際戰士在旅順]” 전시관이다. 여기에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의 흉상과 관련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생소한 흉상도 있다. 한인애국단의 최흥식(崔興植), 유상근(柳相根)의 흉상이다. 이들을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
1955년 여대시(旅大市)는 만주국 당시의 여순법원 공문서 자료를 정리과정 중에 당시 여순감옥에 수감된 인원의 사진 금판 1,248매를 무더기로 발견하였다. 놀랍게도 그 사진 금판 속에는 신채호 선생님도 있었다. 사진 번호와 촬영 특성을 분석한 결과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한국과 중국의 이른바 정치범 즉 항일 애국지사로 밝혀졌다. 그 중에는 신채호를 포함하여 박씨 25명, 김씨 84명 등 많은 한국 독립투사가 있었다.
일본 관동군은 여순 대련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이 지역에 경찰 파출소 175개와 5,300여 명의 경찰을 풀어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1906년부터 1942년 37년간 92,000여 명을 여순감옥에 감금하였으며 그중 일본인 18,673명, 한국인 3,000여 명 이상이었다. 또한 관련 자료에 의하면 1943년부터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한국인이 약 1,000여 명 감금되었다. 일제는 중국 전역에서 체포한 한국 독립투사들을 여순감옥에 감금하였는데, 1930부터 1936년 7년간 중국 동북 지역의 하얼빈, 수분하, 길림, 봉천 등 13개 일본영사관과 군사법정에서 총 1,210명을 여순감옥에 위탁 수감하였다.
1906년~1936년간 사형한 한국인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하여 12명이고, 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신채호를 포함하여 37명이나 된다. 1942년~1945년 8월까지 700여 명의 항일투사가 교수형장에서 사형당하였으나, 일본이 투항 직전 감옥의 관련 자료를 소각하여 얼마나 많은 한국 항일 독립투사를 살해당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사건과 인물이 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1931년 11월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봉창 의거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은 의혈투쟁으로 대련에서는 유상근, 최흥식이 일본 관동군사령부, 관동청장관, 만철총재들을 처단하고자 계획한 사건을 들 수 있다. 1936년 5월 25일 간행된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 3호 “대련 작탄(炸彈)사건의 추억”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의거는 한인애국단의 3대 의거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민국 14년(1932년: 필자) 4월에 한인 애국단장 김구선생의 사명을 받아가지고 대련에 가서 국제연맹 조사단 ˂리튼˃경 일행이 통과하는 기회를 타서 중국 동북을 침략하는 일본의 원흉 본장(本莊) 관동군사령 및 산강(山岡) 관동청장관과 내전(內田) 만철총재 등을 도(屠)하려다가 불행히 밀(密)이 탈로되어 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이성원(李盛元)이성발(李盛發) 4인이 5월 24일과 25일에 적에게 잡힌 사건은 실로 동년 1월 8일에 동경작안(東京炸案-이봉창의거: 필자) 및 4월 29일의 홍구작안(虹口炸案-윤봉길 의거: 필자)과 아울러 한인 애국단 계획의 3대작안(三大炸案)이라는 것이니 이 대련 사건도 성공이 되었다면 그 성적(成績)이 (상해)홍구 작안만 못하지 않을 뻔하였다.”
특히 이 가운데 유상근은 여순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해방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처형 순국한 인물이었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건국하여 만주를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중국정부는 무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국제연맹에서는 리턴(Litton)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리턴 조사단은 1932년 5월 26일 만주 대련에 도착하여 조사활동을 하고 5월 30일 대련을 출발하여 타 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인 애국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리턴 조사단을 출영 나올 관동군사령관 등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단원인 유상근과 최흥식을 대련에 파견하여 현지의 이성원과 이성발의 도움을 받아 의거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김구는 그의 부하 가운데 제일 민첩한 최흥식을 4월 1일 바닷길로 대련에 잠입시켰다. 그후 최흥식은 대련 소재 조선인 어부조합 숙소 김정순(金正順) 방을 거점으로 비밀리 여순 대련의 경비상황과 봉천, 장춘, 하얼빈 등지에 잠행하여 각지의 경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상근은 4월 27일 운봉길의사가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위력을 가진 폭탄을 가지고 상해를 출발하였다. 5월 4일 대련에 도착, 이성원과 이성발의 도움을 받아 폭탄과 권총 등을 반입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국제연맹 조사단이 봉천에서 대련역에 도착하면 출영 나온 일본 고관들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1932년 5월 1일 사전 준비로 대련에 온 최흥식의 전보가 단서가 되어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5월 중순 자금이 부족하자 대련우체국에서 상해로 중국식 숫자 암호를 상해의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주소에 가공인물 곽윤(郭潤) 앞으로 “부족 70 전송하라”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대련경찰서의 추적 끝에 먼저 5월 24일 새벽에 최흥식이 김정순 방에서 체포되고, 이어서 5월 24일 유상근이 아옥정 만철기숙사 아옥료내 만철사원 한국인 모씨의 침실에서 체포되는 한편 권총과 폭탄도 압수당하였다. 그리고 이성원, 이성발 형제도 5월 25일 체포되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유상근은 관동주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 살인 예비, 총포 화약 취체 위반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최흥식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여순감옥에서 투옥되었는데, 유상근의 경우 해방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처형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 특별 기념관이 있다. 정중하게 헌화한 후 그의 유서를 읽어 본다.
안중근 최후의 유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하지만 안중근의 유해는 여태 찾지 못해 고국으로 반장하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유해 찾기는 해방 이후부터 민족적 관심사였다. 그동안 남북한 각계에서 여러 차례 안중근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 유해 발굴단을 현지에 보내 찾았으나 끝내 차지 못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의 주선으로 박선주충북대 박물관장을 단장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을 편성하여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발굴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여, 어디에 계시옵니까? 왜 저희들은 죄인으로 만들고 계십니까!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출구는 처음에 본 건물 즉 ‘여순일아감옥구지’가 있던 건물의 정문이다. 당시 한국 독립투사들도 이 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을까! 나의 귓가에는 안의사의 마지막 유언이 맴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우리는 정말 안중근 의사의 유언대로 그러한 삶을 살아왔던가? 떨어지는 빗줄기가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