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日帝가 理想鄕이라 宣傳한 滿洲 安全 農村의 實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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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개념용어 | 일제가 선전하는 만주 농촌의 실상을 알리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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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농 농촌의 실상을 담은 이야기.
당시 『동아 일보』는 ˂만주 이재민 동포를 위하여 “안전 농촌” 건설 결정˃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만주의 조선인 안전 농촌 건설은 당본(堂本) 총독부만주 출장소장의 귀경으로 구체화하여 금년 중에 두 군데를 만들고 수전 경작[논농사-필자]을 시키기로 되었다. 장소는 토지 매수 관계로 아직 미정이나 이주시킬 농민은 만주 사변과 북만 수재 이재민으로 방금 피난하여 있는 3만인 중에서 선발하기로 되었는데 한 촌락에 5백호씩 1천호를 이주시킨다. 안전 농촌은 도회지로부터 교통이 불편하지 않고 경찰의 힘이 미치어 마적의 침습을 받지 않은 곳을 택하고 또 약간의 무기까지 내주어 자위케 하리라고 한다. 금년도 안에 우선 두 곳을 설정하고 매년 계속 사업으로 몇 군데씩을 만들어 우선 원주지에 돌아가지 못하는 농민을 경작시키리라고 한다.”
『동아 일보』(1933년 2월 16일자)
요약하자면 첫째 조선 총독부는 1931년 만주 사변의 피난민과 북만주 지방의 수재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등의 조선 농민을 위해 안전 농촌을 건설한다. 둘째 안전 농촌이 건설될 곳의 토지를 매수하고 촌락 당 500호의 농민을 이주시켜 논농사를 경작하게 한다. 셋째 안전 농촌의 건설 장소는 도회지에서 교통이 편리한 곳, 일본 경찰의 치안력이 확보되어 마적의 침입을 받지 않는 곳으로 한다. 넷째 안전 농촌에는 무기를 지급하여 마적 등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위 능력을 갖추게 한다.
이상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제는 만주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 농민들의 불상하고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이들을 위해 안전 지대를 마련해 주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전 농촌’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일제는 안전 농촌이야말로 농민들의 지상 낙원이라고 선전하였다.
1931년 9월 일제는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다. 전장터가 된 만주 지역은 한인 이주민의 삶의 터전이었는데, 이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일본 관동군은 물론 이들에게 패배한 봉천[지금의 심양] 주둔 중국군들은 각지로 도망가면서 한인 마을에 들어가 약탈, 방화, 강간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들은 수확기의 농작물을 그대로 둔 채 저들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이들은 교통이 편리한 봉천, 무순, 본계, 해룡, 안동, 영구, 장춘, 하얼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수는 1932년 1월 초 19,300여 명, 1933년 1월말에는 34,000여 명에 이르렀다. 설상가상 1933년 7월 북만주 지역의 대홍수로 송화강이 범람하고 하얼빈이 침수되면서 다수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일단 일제는 주요 거점 도시에 피난소를 설치하여 이들을 수용해 나갔다.
이어서 일제는 우선 피난민에 대해서 여비와 식비를 실비로 제공하고 원래 살았던 곳 즉 원적지로 귀환시키는 원적지 귀환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지원 액수가 최소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자, 아예 한반도로 역귀환하는 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반도로의 역귀환은 식민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제는 이 문제를 만주국 내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제는 국제 사회에 괴뢰 만주국의 성립을 공표하면서 ‘새로운 왕도낙토’라 선전했다.
그런데 만주국내 치안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이주 한인들이 한반도로 귀환한다면 만주국 입장이나 조선 총독부 입장 모두 난처한 처지에 놓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조선 총독부는 만주 사변 등으로 발생한 이주 한인 피난민에 대하여 외무성과 합동으로 직접적인 구제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만주 내 집단촌인 안전 농촌의 건립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안전 농촌의 건설을 통해 노린 두 번째 속셈은 만주지역의 안정적인 치안 확보에 있었다. 만주 지역은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의 근원지라고 부를 만큼 항일 무장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일제는 만주국을 건립한 이후 무엇보다도 ‘치안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정상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제는 관동군으로 하여금 항일 세력을 탄압하는 동시에 만주국을 창설하여 ‘공비’ 혹은 ‘마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한인 사회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만주는 한인 이주 초기부터 독립군과 한인 사회에 있어서 삶의 터전이자 전쟁터였다. 물자 보급과 인적 자원 지원 과정에서 독립군과 한인 사회는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항일 부대와 한인 사회의 연결 고리를 차단해야만 했다. 따라서 일제는 ‘독립군의 보급 창고’라고 할 수 있는 한인 사회를 직접적으로 통제/감시 관리하기 위해서 안전 농촌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일제의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들 수 있다. 일제는 만성적인 쌀 부족 국가였다. 때문에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서 끊임없는 쌀 증식 계획을 세웠으며 종자 개량, 비료 보급 등의 방법으로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는 미개간지가 많은 만주에 집단적 안전 농촌을 설립하여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만주 사변은 이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이주 한인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안정적인 식량 수급과 농업 생산력의 제고를 꾀했던 것이다.
끝으로 일제는 건설되기 시작한 안전 농촌에 몰락한 삼남 지방의 소작인을 이주시켰다.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 등으로 많은 자작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 갔다. 이 무렵부터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만주 사변 이후 일제는 만주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이른바 ‘이민 개척단’ 등을 만들어 몰락한 한인 농민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대거 이주시켰다. 특히 1934년 남부지방의 대홍수로 낙동강 등이 범람하여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삶의 터전을 잃은 경상도 지역의 농민들에게 만주의 안전 농촌을 선전하면서 이들에게 만주로 갈 것을 강요하였다. 이들에게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러한 숨은 목적 속에서 일제는 1932년부터 1935년에 걸쳐 만주 지역 5개소 즉 당시 봉천성(奉天省)의 영구(營口)/ 철령(鐵嶺)/삼원포(三源浦), 빈강성(賓江省)의 하동(河東)/수화(綏化)에 안전 농촌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안전 농촌에 수용된 가구수 및 인원은 4,100호, 20,500명이었고, 총 경지 면적은 11,300정보[水田 9,200정보, 1정보=3,000평]로 상당한 규모였다.
만주 지역 안전 농촌의 설치와 운영의 주체는 동아 권업 주식 회사(이하 동아 권업)였다. 동아 권업은 1921년에 남만주 철도 주식 회사,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의 출자로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 지역의 농산 자원 개발과 이주 한인의 생활 안정 및 일본인의 경제적 발전을 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20년대 이미 동아 권업은 ‘자작농 창정(自作農創定)’을 목적으로 간도 지역에 안전 농촌의 설치를 추진했지만 일본 경찰력 등 공권력의 부재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동아 권업의 존재는 조선 총독부의 안전 농촌 설립 목적과 부합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총독부는 봉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동아 권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고 안전 농촌 설치 운영권을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아 권업은 안전 농촌을 설치할 지역의 토지를 구입해가는 한편,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될 이주 일본인을 위한 선행 작업도 진행했다.
안전 농촌의 선정 요건은 1)일본과 만주국 군경이 주둔하고 있고 또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며 경비 가능 구역, 2)부근에 소작할 수 있는 경지 300정보 내지 400정보를 가지고 있는 지점, 3)연료 및 음료의 채취와 부락 구축에 필요한 재료 등 생활에 필요한 환경을 갖춘 곳, 4)앞으로 황무지 개발의 거점 및 인근에 마을수용 수 이상의 귀농 또는 새로운 이주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 5)교통이 편리한 지점 등이었다.
안전 농촌이 처음으로 설치된 곳은 1932년 철령[현재의 요령성 철령시 일대]이었다. 철령지역의 피난민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건립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한인 이주민 250호를 1부락에 30~40호로 하여 8개 부락을 창설하려했으나, 1932년 말 현재 190호 1,000명을 수용하는데 그쳤다. 이후 8개 부락이 완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하여 1936년 현재 가구수 428호, 인구 2,251명이 살고 있었다.
다음으로 1933년 하동[현재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주하현 및 하얼빈시 연수현 일대]과 영구[현재의 요령성 반금시 대와현 일대] 2곳에 안전 농촌이 건립되었다. 하동 안전 농촌은 1933년에 설치되었는데, 이미 이 지역은 1920년대 한인들이 이주하여 평야를 개척하고 수전농사를 시작하여 한인 사회가 형성된 곳이었다.
이러한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가 설립되어 활발하게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하동 마을은 일찍부터 일제의 주목을 받았던 곳으로, 일제는 이 지역의 토지를 매수해 나갔고 결국 1933년 3월 하얼빈 피난민 수용소의 630호 한인들을 이주시키면서 하동의 안전 농촌은 가동되었다. 하동 안전 농촌의 수용 호수는 1935년 현재 980호, 1938년 현재 1,000호로 집계되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영구 안전 농촌은 1933년에 영구 지역의 피난민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건립되었다. 그해 5월 안동[지금의 단동]의 피난민 135호, 652명을 시작으로 남만주 지역의 630호 3,000여 명을 수용했다. 1934년에는 조선 남부지방의 수해 이재민 465호, 2,455명을 수용하는 등 더욱 수용 인원이 증가했다. 1937년 3월말 현재 영구 안전 농촌의 수용인구는 1,492호, 7,532명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1934년 수화[현재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수하시 일대] 안전 농촌이 건립되었다.
마지막으로 1935년 삼원포[현재의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일대] 안전 농촌이 건립되었다. 안전 농촌이 설치될 당시 수용호수와 인원은 200호 약 1,000명 정도였다. 삼원포 지역은 경학사와 신흥 무관 학교가 설립된 곳으로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일제가 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안전 농촌을 설치한 목적은 독립운동 기지였던 삼원포를 친일적인 한인 사회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 독립운동의 상징인 이곳에 안전 농촌을 설치함으로써 항일 무장 세력을 탄압, 억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결국 일제가 설치한 안전 농촌은 두 가지 성격의 유형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철령, 영구, 수하 지역과 같이 피난민의 수용을 목적으로 한 ‘순수한’ 차원의 안전 농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삼원포, 하동과 같이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정지 작업을 목적으로 탄생한 안전 농촌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일제의 안전 농촌은 ‘피난’과 ‘독립운동의 근거지 정지’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괴뢰 만주국에 안전 농촌을 건립하고 이를 ‘이상향의 도래’라고 선전하며 다음과 같이 신국가 건설과 농업 정책의 방향을 홍보했다.
“평화의 이민이오 천의(天意)의 사도인 조선 민족이 거금 60여 년 전 몸에 촌철도 가지지 않고 압록강, 두만강 양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면서 목이 메이고 ... 가진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천의의 명한 바 왕도 만주국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으니 인위(人爲)가 어찌 천의를 좌우할 수 있으랴. 반세기를 넘은 우리의 만주 이민사를 보건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인들의 꾸준한 영전에 오늘 이 땅에 널린 동포의 축복받은 자태를 기록하여 한없이 기쁘도다.”
『재만 조선인 통신 2』[1936년 4월 ‘재만 조선인 안전 농촌 순회기 1’]
즉 안전 농촌에 대한 순방기에는 이주한인들에 대한 소속감 곧 만주국의 구성원으로서 누리고 있는 혜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안전 농촌이 설치되는 곳에는 반드시 통치/관리 기구를 설치하여 통제, 운영하고자 하였다. 즉 안전 농촌은 또 다른 형태의 행정 기구였던 것이다. 예컨대 하동 안전 농촌의 경우, 일제의 통치 기구로는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하동 영사 분서, 주하 경무과 하동 분주소, 하동 분주소 상무 자위단, 하동 권업 주식 회사, 하동 촌공서, 하동 협화 청년단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안전 농촌 내의 각 촌락단위에는 농무계(農務契)의 설치하여 한인을 통제했다. 보통 각 촌락에는 기초 단위로 계를 설치하고 각 계마다 책임자를 두었으며, 이들을 통해 한인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 농무계는 표면상 대중적 생산 조합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각 농무계를 바탕으로 농무계 연합회를 설립하여 각 계를 지도하면서 농장을 운영하였다. 연합회는 회장을 두고 산하 각계에는 계장을 두었는데, 회장, 계장은 모두 친일파로서 일본인을 위해 직권을 행사했다.
다음은 철령 안전 농촌의 농무계 연합회 회칙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제2조 본회는 철령 농촌 내 안전 농촌 8계(외 22계) 농무계로 조직한다.
제3조 본회는 농무계 상호의 연락통제를 도모하며 공동처리를 요하는 사무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4조 본회는 전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아래 사항을 처리한다.
(1) 농사의 지도개량 및 부업에 관한 사항
(2) 농경용품 및 일용품의 공동구입과 생산품의 공동판매
(3) 농산품 가공
(4) 농우개량번식
(5) 위의 사항 외에 공동처리에 필요한 사항
(홍종철의 ˂일제의 재만조선인 통제를 위한 철령안전 농촌에 대하여˃에서 재인용)
즉 농무계 연합회는 안전 농촌의 모든 업무를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농무계 연합회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농민의 대출금 회수였다. 일제는 안전 농촌으로 이주하는 농민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제공하고 자작농으로 자활할 수 있도록 저리의 대출금을 준다고 하였다. 대출금을 10년~15년 동안 연부[돈을 해마다 얼마씩 나누어서 내는 것]로 납부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토지와 가옥을 갖게 되어 자립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아무튼 이 대출금은 한인 농민을 구속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1934년 남부 지역의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만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경남 지역의 농민들이 영구 안전 농촌으로 가는 모습을 묘사한 『동아 일보』의 기사 일부분이다.
“정든 고향에 부모와 친척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산천을 눈물로 바라보며 삶을 찾아 만주 벌판 영구 안전 농촌[영구역에서 3리가량 밖에 있는 개척지]으로 가게 된 낙동강 수해 이재민 중 경남 도내의 200호, 1056명은 오는 18일에 총독부에서 특별히 운전하는 이민 수송열차로 떠나게 된다한다. 경남 도내 밀양, 창원, 김해, 함안 4군에서 선발된 200호 농민은 진영, 밀양 등 각역에서 승차시켜 경성까지는 경남 도청 직원이 감독, 수송하고 영구까지는 총독부에서 맡아 수송할 것인데 차비 기타 제반 비용은 총독부에서 지출하고 영구에 도착하면 설비해둔 집에 수용하여 겨울날 준비와 명년 농사준비를 시켜 주기에 150원을 매호에 지출하기로 작정하였으나 현금은 주지 아니하고 제반 비용을 써준다고 한다. 그곳에 가서 농사를 준비할 것은 동아 권업 공사 토지를 매호에 2정보 내지 2정보 반을 10년간 연부로 대부하여주어 10년 이후에는 자작농이 되게 할 방침이라는데 그곳으로 삶을 찾아가는 (중략) 떠나는 자의 심사! 보내는 친척의 안타까움은 정거장에서 일장비극을 연출할 것이다.”
『동아 일보』(1934년 10월 14일자)
이렇게 도착한 영구 안전 농촌은 농민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달랐다. 영구 안전 농촌은 요하와 맞닿는 곳이었다. 토지는 소금기를 머금고 있어 풀 하나 나무 하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이 토지를 아낙네가 빨래를 하듯이 흙을 물로 밟고 또 밟아 씻어내야만 했다. 아무리 단단히 옷을 입어도 바다 칼바람은 살을 애는 듯하였고, 발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비옥한 땅으로 개간하였으나, 이주 한민 농민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였다. 틈이 나면 부업으로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꼬았지만,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철령 안전 농촌의 한인들은 대개 쌀이나 조를 수수에 섞어 먹었지만,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초가 끝난 뒤 먹을 양식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이들의 생계비를 보면 1935년도 1호당 1년간 5인 가족을 기준으로 374원 30전, 매월 평균 1호당 32원, 1인당으로는 매월 6원 20전인데 그 가운데 식비가 약 75%인 282원이었다. 얼마나 한인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왜 이렇게 안전 농촌의 한인 농민은 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을까! 한인 농민들은 추수가 끝나면 관리비, 연합회비, 학교 조합비, 의료비 등 각종 공과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렇게 공과금을 납부하고 남은 돈은 다시 대출금을 갚아야 했다. 가장 이들을 괴롭혔던 것이 바로 대출금이었다. 이주 당시 대출받은 돈과 생활자금으로 빌린 대출금을 갚고 나면 남기는커녕 도리어 다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