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中 反滿 抗日 運動의 代表적인 共同 作品, 大甸子嶺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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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사건|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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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11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2년 1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2년 9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0년 |
| 전투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과 동영현 사이의 고개 |
1930년 7월 홍진(洪震)·이청천·신숙(申肅)·남대관(南大觀) 등은 한족 자치 연합회를 기반으로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산하 무장 부대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북만주 일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한국 독립당은 1930년 11월 보통 학교를 졸업 정도의 우수한 인력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초기의 병력은 1개 소대에 50명씩 6개 소대, 2개 중대로 편성된 300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또한 한국 독립당은 결성 과정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조국의 절대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진영의 조직임을 분명히 하였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한 후 만주군과 합동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을 본격화했다. 당시 한국 독립군은 즉각 장병의 모집과 군사 훈련을 통해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중국군과 연합한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 하고자 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반만 항일(反滿抗日)의 기치를 든 많은 중국 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 독립당은 1931년 11월 길림성 대석하자에서 긴급 중앙 회의를 개최,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시키기로 하고 중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한국 독립당은 한중 연합 전선의 확대에 주력한 것은 우선 중국 군인들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만주 사변 이후 재만 한인들은 일제의 부당한 침탈과 중국군의 박해라는 이중의 곤경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독립군과 중국군의 연합은 효과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전개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였다.
한국 독립당은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장병 소집과 징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사 위원장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하여 한국 독립군의 편제를 강화하였다. 당시 한국 독립군은 징집 구역을 밀산(密山)·호림(虎林)·동녕(東寧)·왕청·목릉(穆稜)·영안(寧安)·무송·화룡(和龍)·혼춘(琿春)·연백(延白)·액목(額穆)·길림(吉林)·오상(五常)·서란(舒蘭)·아성(阿城)·쌍성(雙城)·돈화(敦化) 등으로 나누고, 각 현에 이응서(李應瑞)·왕덕삼(王德三)·허경삼(許敬三)·전성호(全盛鎬)·심양식(申良植)·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鮮)·권득수(權得守)·심만호(沈萬浩)·정남전·오종걸(吳宗杰)·김학유 등을 책임 징집 위원으로 파견하였다.
한국 독립당의 신숙(申肅)과 남대관(南大觀)은 이두·정초 등이 주도하고 있던 길림 자위군과 중국호로군 연합군 총부(護路軍聯合軍摠部)를 찾아가 한중 연합을 상의했고, 중국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그리고 1931년 12월 총사령관 이청천이 간부들과 함께 호로군 총부를 방문해 ‘한중 양군이 연합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한국 독립군이 중동선 철도의 동부 전선을 맡고, 중국 측은 그 대가로 군수 물자를 공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한국 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쳤다. 한중 연합 작전은 1932년 1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시작되었다. 서란현 일대에서 병력을 모집해 본부로 이동하던 조경한이 도중에 길림 자위군의 사복성(謝復成) 부대와 만나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고, 서란현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다. 서란현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와 길림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되었다. 이를 서란현 전투라 한다.
이어 1932년 2월에도 일본군과 대격전을 치렀다. 일본군이 이두(李杜)··정초(丁超) 등의 길림자위군과 중동 철도 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을 공격하자 총사령관 이청천이 한국 독립군을 이끌고 이들과 함께 위사하(葦沙河)·동빈(同賓)·방정(方正)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두·정초 등의 중국군 부대가 패해 행방이 두절되면서 식량과 탄약 보급이 끊기고, 비행기를 동원한 일본군의 적극적인 공세로 여러 곳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 독립군은 각지로 분산된 독립군을 재결집, 길림 자위군의 고봉림(考鳳林) 부대와 연합 전선을 펼쳤다. 대표적인 전투가 쌍성보(雙城堡) 전투였다. 1932년 9월 한국 독립군은 고봉림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만주군이 지키고 있던 쌍성보를 기습 공격해 이를 점령했다. 일본군과 만주군을 크게 패퇴시키고, 무기와 탄약·피복 등 수개월 동안 쓸 수 있는 물자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에도 한국 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만주군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승리를 거둔 경우도 많았고 패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32년 11월에 있었던 제2차 쌍성보 전투는 한국 독립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주었다. 고봉림 부대와 연합해 쌍성보를 공격했을 때, 일본군과 만주군이 대포와 비행기를 동원해 반격, 도피하는 한중 연합군을 4일에 걸쳐 추격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독립군과 고봉림 부대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특히 고봉림 부대는 인명 피해가 엄청난데다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군수 물자 또한 부족해 더 이상 항전을 포기하고 재기를 위한 방편으로 일단 적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한국 독립군은 투항을 거부하고 고봉림 부대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활동 방향을 모색했다.
그러나 만주의 정세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1932년 3월 수립된 만주국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일본군과 만주국의 군대가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위군·구국군 등 중국의 반만 항일군들이 항전을 계속했지만, 그들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하얼빈을 비롯해 북만주 일대가 점차 일본군과 만주국의 수중에 들어가자, 북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 독립군의 활동 여건과 공간 역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한중 연합군은 공격 목표를 ‘쌍성보’로 정했다. 쌍성보는 장춘(長春)과 하얼빈을 잇는 하창선 철도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물산이 모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만주국의 초비단 부대 3,000명과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군이 지키고 있어 수비가 견고했다. 1932년 9월 쌍성보 근처에 집결한 한중 연합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길림성 자위군 1군과 2군은 각각 동문과 남문으로, 한국 독립군과 자위군 산하의 고봉림 부대는 서문을 공격했다.
한국 독립군은 이미 1~2개월에 자위군 산하의 사복성 부대와 연합해 서란현 전투를 치른 바 있어 중국군과 호흡이 잘 맞았다. 2시간에 걸친 총공세로 만주군은 1,000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2,000명이 투항했다. 대신 독립군과 고봉림 군의 사상자는 30~40명에 불과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쌍성보는 서로 뺏고 뺏기는 혼전을 거듭하다 결국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 독립군은 제2차 쌍성보 전투를 치른 후, 1932년 11월 길림성(吉林省)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당과 군의 대표들이 참석한 당·군 연합 회의를 소집하여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때 근거지를 동만 지역으로 옮기고 그곳 한인들을 기반으로 중국군과 연합해 활동하기도 합의했다.
한국 독립군은 곧바로 부대의 이동을 시작하여, 오상현을 출발, 액목현을 거쳐 1933년 1월 영안현에 도착했다.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결행한 한 달 보름여에 걸친 고난의 행군이었다. 한국 독립군은 동만으로 이동하는 중에 중국군과의 연합을 시도했다.
당시 동만주 지역에는 왕덕림이 이끄는 길림 구국군이 있었다. 길림구국군의 왕덕림에게 한중간 연합을 타진하고자 했지만, 그가 부재 중이어서 액목현에 주둔하고 있던 왕덕림 휘하의 12단장인 채세영 부대와 연합을 이루었다. 당시 연합 부대의 명칭을 한중 연합 토군이라고 정했다.
1933년 2월, 한국 독립군은 경박호(鏡泊湖)를 지나던 중 일본군이 진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채세영 부대와 호수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급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경박호 전투로 동만으로 이동 후에 벌어진 첫 전투였다.
1933년 4월 중순경, 경박호 전투가 있은 지 한 달여 만에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또 다른 전투가 있었다. 한국 독립군은 사도하자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독립군의 승전 소식을 들은 동만의 많은 한인들이 합류하면서 세력이 커졌다. 이때 영안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만주군이 한국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사도하자 전투였다. 한중 연합군은 적의 공격 정보를 입수하고, 병력을 네 개로 나누어 일본군과 만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했다. 황가둔(黃家屯)·주가둔(周家屯) 등에서 20여 차례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과 만주군은 반 정도가 섬멸된 채 도주하고 말았다. 경박호에 이어 한중 연합군이 대승을 거둔 두 번째 전투였다.
이어 발해국의 문화재를 도굴하고 경박호의 보물을 훔치기 위해 150여 명의 일본군과 만주군이 발해진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황을 탐지한 한중 연합군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였다. 동경성은 발해의 고도(古都)로 영안현 서남쪽에 있었다. 동경성은 일본군과 만주군의 식량 보급 기지나 다름 없었고, 영안현을 장악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중 연합군은 부대를 3개 대로 편성하였다. 제1 부대는 기병대로 편성하여 동목단강(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하여 적의 후원 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 부대는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동경성의 중간 지점에 배치하여 교량과 전선을 끊어 적군 상호간의 연락을 저지하도록 하였으며, 제3 부대는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치게 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군은 참패한 채 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한중 연합군은 이를 추격해 거의 궤멸시키다시피 했다.
동만으로 이동한 후, 한국 독립군은 경박호·사도하자에 이어 동경성을 점령하는 승전을 거두었지만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영안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만주군의 대규모 부대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경성을 수비하기 어려웠고,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병력 손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급히 병력을 보충해야만 했다.
결국 한국 독립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역습이 있기 전에 이청천 사령관은 동경성에서 부대를 철수시켜 왕청현과 동녕현에 있는 삼림 지대로 이동했다. 한편 부사령관 황학수는 편의대 1대를 인솔하고 자신이 개척하고 활동했던 옛 신민부 관할 구역을 돌며 병력을 모집하였다. 조경한은 한국 독립군 선전 공작대 대장사령을 맡아 만주 각지에 흩어져있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모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중건(金中建)이 이끌던 원종 교도(元宗敎徒) 500여 명이 자진해서 합류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령관 이청천은 500여 명 가운데 100여 명을 선전대에 편입시켜 한국 독립군의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김중건이 한인 공산주의자 이광(李光)에게 살해된 이후, 원종 교도들은 반공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에 선전대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조경한은 선전대를 이끌고 한국 독립군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을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이청천·조경한 등의 한국 독립군과 길림 구국군시세영(柴世榮) 부대의 한중 연합군은 1933년 6월 25일 경,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를 이룬 노송령(老松嶺)을 넘어 동서검자(東西臉子)에 이르렀다. 이때 한중 연합군은 대전자, 일명 나자구(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연길현 방면으로 철수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였다. 일본군은 한국 주둔 제19사단에서 간도로 파견된 ‘간도 파견군’으로 지휘관은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였고 모두 1,600여 명 규모였다.
이 부대는 1932년 초 연변 지방에서 왕덕림이 지휘하는 ‘구국군’이 반만주국(反滿洲國)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만주국 군경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뒤 1933년 중반 이후, 간도 파견군과 만주국 당국의 계속된 탄압에 항일 의용군이 큰 타격을 받고 활동이 위축되자, 일제 당국은 연변 일대의 치안을 만주국 측과 관동군에 넘기고 간도 파견군을 한국으로 철수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한중 연합군은 일간 100여 ㎞를 강행군하여 6월 28일경 대전자 북방 4㎞ 지점인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나자구 근처의 주민들로부터 많은 우마차를 강제 징발하여 군수 물자를 싣고 오전 8시에 출발해 대전자에서 왕청-백초구(百草溝)-연길을 경유하는 도로를 이용하여 행군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매복하여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을 선정하여 부대를 배치하고자 하였다. 대전자령은 태평령(太平嶺)이라고도 하는데, 일본군이 왕청 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고개였다. 고개는 해발 800여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약 16~20㎞ 정도 되는 긴 협곡으로 마치 을(乙) 자 모양으로 굽어졌다. 양쪽은 높이가 800~1,000m나 되는 험준한 절벽과 울창한 산림 지대로 되어있어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한국 독립군은 주력 부대 약 500명, 구국군은 2,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한중 연합군은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녹림대[綠林隊 : 마적·토비(土匪) 등 지방 무장 세력]인 구세군(救世軍) 및 다른 녹림대 두령들과 협의하여 동참케 하였다. 이에 구세군과 다른 녹림대를 합하여 한 부대를 형성하였다.
한중 연합군은 5개 지대로 나눠 역할을 분담하며 일본군을 공격키로 결정했다. 제1대 한국 독립군, 제2대 시세영 부대, 제3대 구세군 등 녹림대, 제4대 한국 독립군, 제5대 시세영 부대로 편제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1933년 6월 28~29일경 일본군의 통과 예상 지점인 대전자령의 서쪽 양편 계곡에 매복하였다. 제4대로 편성된 조경한 등의 한국 독립군 부대는 노모저하(老母猪河) 남록을 거쳐 목표 지역의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한편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보충영’으로 하여 본영을 지키도록 했다.
한국 독립군은 전투 주력으로 300여 명이 제일 높은 고개에 배치되었고, 고개의 입구와 출구에는 독립군 100여 명씩과 구국군이 혼합 배치되었다. 이처럼 한중 연합군은 계곡 양편 산기슭에 구축되어 있는 참호 속에 매복·대기하여 일본군 습격 준비를 마쳤다. 한국 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일본군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아래와 같은 주의 사항을 장병들에게 하달하였다.
① 공격 개시는 적군의 후방이 태평령 고개 3분의 2 이상의 지점에 도달할 때 총사령의 신호에 의해 개시할 것.
② 일본군에게만 공격하고 적재된 군용품에는 손해가 없도록 극히 주의할 것.
③ 탄환은 풍부하니 각자 300발 이상을 준비하여 사격 개시 전에는 침묵을 지킬 것.
④ 적군의 전멸 후에 군용품 몰수에는 명에 따라 차례차례 정리에 착수할 것.
지시 시항을 통해 한국 독립군의 중요한 전투 목표 중의 하나가 군수 물자 획득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엄중한 군기를 유지하면서 한국 독립군은 출발 예정일인 7월 1일 아침에 일본군이 매복 지점을 통과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 날 아침 폭우가 계속 쏟아져 일본군 출발이 3일간 연기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던 한중 연합군은 폭우와 굶주림을 무릅쓰며 일본군의 통과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한중 연합군이 매복하고 있는 3일 동안 여름 소나기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이에 한국 독립군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참호 속에 빗물이 괴어 허리까지 올라오고 전투 식량인 건량(乾糧)이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아 매우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밤에는 참호에서 나와 숲 사이에서 눈을 잠깐 붙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건량마저 바닥나자 빗물에 젖은 몸은 추위와 배고픔에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이청천과 조경한 등은 참호를 돌며 군인들을 격려하고 용기와 인내심을 북돋워 주었다. 이때 군의관 신골(申矻)이 숲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대용 식품으로 활용하여 독립군 장병들의 굶주림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며 기다린 지 3일 후인 7월 3일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 차량을 앞세우고 본대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렬 선두는 화물 자동차 부대, 가운데는 우마 차대, 그리고 후방에는 다시 자동차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당시 간도 파견군은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가 인솔하는 주력 부대 500여 명으로 회령 주둔 보병 제75연대 소속 부대가 대부분이었다. 부대는 산포대(山砲隊) 본부 및 산포 2개, 중대포 4문, 함흥 주둔 보병 제74연대 보병 3개 중대, 그리고 기관총대 1개 중대와 야포 2개, 중대포 4문, 기병 1개 소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보·포·기·공병의 혼성 2개 대대 규모를 합친 약 1,300명가량이었다. 이들 부대 외에 회령에서 파견된 화물 호송대 병력과 화물 자동차 100대, 우마차 500여 대 등이 합류하여 철수하는 일본군 규모는 1,600여 명에 달했다.
일본군의 후미 부대가 한중 연합군이 매복한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이후에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길림 구국군의 일부 병력이 일본군의 후미 부대가 미처 들어서기 전에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한국 독립군도 총공격을 가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소총과 기관총으로 맹렬히 사격을 하는가 하면 바위를 굴려 일본군을 압사시키고 자동차와 우마차를 파괴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대전자령 전투는 4~5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대전자령 전투에서 최소 130여 명 이상이 살상되었고 다수의 병력이 사산·도주하였다. 일본군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일부 부대만이 골짜기를 빠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군수 물자를 한중 연합군에게 탈취당하여 큰 손실을 입었다.
대전자령 전투 당일 오후에 또 비가 내리고 날이 저물었다. 한중 연합군은 이튿날인 아침에 전장을 정리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步)·기(騎)·포(砲)·공(工)·치중병(輜重兵)이 가지고 있던 각종 무기·탄약·피복·식량 등 엄청난 물량의 군용품을 노획했음을 확인했다. 당시 전리품 내역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박격포와 각종 포 8문
경·중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수류탄 100상자[상자 당 50개]
권총 및 연발총 200자루, 도검 40자루
군용 비밀 지도: 만주 및 연해주 1/100,000지도 2,000여 매
만주 침략 관련 각종 비밀 문서와 군용 서류, 진중(陣中) 장부 300여 부
피복·담요·기타 군장비 부속품 등 2,000여 건
장갑차 2량, 탐조등 2가, 약품 50상자, 망원경 25개
1개 영[營, 대대]가 1년간 급양할 수 있는 식량
일본돈 30,000엔, 기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잡화 등
이처럼 막대한 군수 물자의 노획은 우리나라의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라고 할 수 있다. ‘대전자 대첩’이라 할만 했다. 전투에서 입은 한국 독립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투에 참가한 조경한은 1934년에 발표한 글에서는 모두 27명이 사상을 입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조경한은 자신의 바지와 저고리 세 군데에 총알이 뚫고 지나간 구멍이 나있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옷을 계속 보관해 오다가 6·25전쟁 때 분실하고 말았다.
대전자령 계곡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간 일본군의 일부 병력과 화물 자동차·우마차 등의 호송대 행렬은 이후에도 길림 구국군인지 한국 독립군인지 모를 부대와 전투를 치렀고, 다른 군소 반만 항일(反滿抗日) 부대의 수차례의 습격을 받아가며 7월 4~5일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백초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리품의 분배 문제로 한·중 간에 대립이 생겨 그 후의 한중 연합에 큰 지장을 주었다. 대전자령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 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차이스룽[蔡世榮] 부대 사이에 알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9월 1일 동녕현(東寧縣) 전투에서 중국군이 약속한 후속 부대를 파견하지 않아 독립군은 3일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은 독립군의 총사령관 이하 수십 명의 고급 간부를 구금하고 무장 해제 시켰다. 곧 화해가 되었으나, 독립군은 중국군과 관계를 끊고 남중국 방면으로 이동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중 연합군 합작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지만, 한국 독립군이 주력 부대로 활약하여 중국 동북 지역의 반만 항일전에서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군의 역사상 봉오동, 청산리 전투와 함께 만주 지역 독립군의 3대 대첩이라고 평가받는 대단한 전과였다.
대전자령 전투에 참여한 한국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은 1940년에 창립된 한국 광복군의 뿌리가 되었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일본 관동군이 증강되고, 국내 군자금 공급 루트가 차단되면서 무장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한국 광복군으로 이어진 것이다.
훗날 이청천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고 황학수·오광선·조경한·고운기 등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한국 광복군의 주요 리더로 크게 공헌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시 정부 계열로 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