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族 總聯合會 設立에 礎石을 다진 아나키즘의 行動家, 金宗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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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독립운동가 | 충남 홍성출신으로 만주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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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9월 하순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1년 |
| 김종진 수학지 | 운남성 |
| 김종진 활동지 | 만주 해림현 |
충남 홍성 출신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
시야(是也)김종진(金宗鎭)은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참봉을 지낸 영규(泳圭)이며, 청송 심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에 재당숙 학규(學圭)에게 출계하였는데 양모는 은진 송씨이다. 백야김좌진 장군의 6촌 동생이다.
김종진은 8세 때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된 1913년 봄에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순극(淳競)의 2녀인 16세의 종표(宗杓)와 결혼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인 반일 만세시위가 퍼질 무렵, 19세의 김종진은 홍성군 내 시위대의 선봉에 서다가 체포되었다.
김종진은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1919년 6월말 미성년이란 이유로 석방되었다. 귀가하자마자, 그는 상경을 결심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중학 속성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교내외 교우관계를 넓히는데 진력하였다. 시내 각 학교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비밀 출판 등의 활동을 전개하자,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 들어왔다.
때마침 그의 친척 형님뻘인 김연진(金淵鎭)이 중국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잠입하여 국내와의 연락책임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김종진은 중국으로의 탈출을 결심하였다. 1920년 4월 서울을 출발한 그는 봉천 교외에서 김여진을 만났다. 그는 국내로의 무기반입 계획이 발각되자, 북경에 있는 이회영을 찾아갔다.
도착 후부터 김종진은 심웅(沈雄)이라 이름을 바꾸고 북경에서 다양한 원로 독립지사를 만났다. 그 중에는 홍성 의병의 노장인 이천민(李天民, 일명 世永)을 비롯해 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박용만(朴容萬) 등 중장년층과 최용덕(崔用德)·박숭병(朴崇秉) 등 청년층도 있었다. 이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은 김종진은 일제와 대항할 수 있는 군사적 학식과 훈련을 쌓은 유능한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회영과 상의한 끝에 상해의 신규식을 소개받은 김종진은 1921년 1월말 상해로 출발하였다. 손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인들의 무관학교 입교에 적극적이었던 신규식은 운남성도군(雲南省督君)당계효(唐繼堯)에게 간곡한 편지를 써주어 운남 군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운남 군관학교는 1907년 8월 귀주성(貴州省)에 주둔 중인 청조 신군(新軍) 19진(鎭) 소속 군사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운남 육군 강무당으로 개교한 이래, ‘민주혁명 전사’를 양성하는 신식 군사학교를 표방하였다. 1912년 운남 강무학교로 개칭되었고, 19기에 걸쳐 약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규식은 1916년 이범석(李範奭)·배달무(裵達武) 등을 특별 입학시킨데 이어, 15기생에 많은 한인들을 입교시켰다. 16기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북항일연군의 창시자인 양림(楊林)이 있고, 17기생에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을 지낸 최용건(崔庸健) 등이 있다. 이처럼 명문 사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당계효는 그의 부관을 동행하도록 배려하였다.
1921년 2월말 상해에서 광동행선편에 올라 탄 두 사람은 안남국(安南國, 베트남)해당항(海防港)까지 배를 갈아탄 후 진월(瑱越) 철도편으로 하내(河內)를 경유하여 운남성 수도인 곤명(昆明)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곤명역에 도착한 때는 그해 4월 2일 밤이었다.
운남성도군당계효와 교장의 특별한 지도와 관심으로 운남 군관학교 교도대에 편입된 김종진은 개인교수와 같은 특별지도대장을 배속 받아 언어와 문장을 지도받았다. 불과 4·5주 만에 수강과 훈련에 지장이 없을 만큼 되니, 동료들이나 지도대장들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입대 후 1년이 지난 사이 완전한 중국 청년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그는 2년 후에는 주로 도서관을 찾아 수많은 양서를 탐독하였다.
교도대 2년 과정을 마친 김종진은 1923년 봄 운남 강무당(雲南 講武堂, 통칭 군관학교)에 16기생으로 입학하여 정식 사관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동기생인 대전출신 김노원(金魯源)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훈련을 거듭해 마침내 1925년 4월 강무당을 졸업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자는 당계효 도군의 권유에서 불구하고, 만주로 귀환하고자 한 김종진은 김노원과 함께 곤명을 떠나 광동을 거쳐 상해로 나갔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해 류자명 등 의열단 계열 청년들, 이을규·이정규·정화암 등과도 접촉하였다. 1926년 4월말 상해를 떠난 김종진과 김노원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남경(南京)-한구(漢口)-무창(武昌) 등을 여행하였다. 이 와중에 중국 국공내전에 휩싸여 훈련관이 되기도 하며, 민족차별과 배고픔 등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여비 부족으로 부득이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된 김종진은 1927년 9월 하순 북경-천진에 들러 이회영을 뵙고 수일에 걸쳐 유명한 사상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6년 전 북경에서 이회영에게 예관(睨觀)신규식(申圭植)을 소개받고, 그의 소개장을 휴대한 채 상해를 거쳐 홍콩과 베트남을 경유해 곤명에서 2년간 정식 사관 군사교육을 받은 전도양양한 청년이었다. 환갑을 넘긴 노혁명가는 빈민가인 남개구의 조그만 토만 세방에서 고아 아닌 고아 남매를 데리고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김종진은 ‘국파가망(國破家亡) 신기로(身旣老)’의 망국한(亡國恨)을 가슴 깊이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김종진의 손을 잡고 우당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소식은 때때로 들었는데 수년의 고초가 과연 어떠했는가? 고초는 고초일망정 이제는 분명 대장군이 되었구나.”
이회영은 북만주로 가겠다는 김종진의 구상에 근래에 처음 듣는 낭보라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지나간 이야기로 시작해 장차 앞으로 해야 할 모든 문제와 각지의 제반 사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다.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식사는 염죽(鹽粥)뿐이었다. 한때 삼한갑족(三韓甲族) 명문가(名門家)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은 재력가였던 우당이 한 그릇 죽에 소금 한 종기를 반찬 삼아 시장기를 때우는 모습을 보고 김종진의 눈에 저절로 안개가 서렸다.
그러나 이회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패권주의와 파벌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앞으로 북만주에 가거든 잘못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종진은 환갑이 넘은 이회영이 아나키스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회영의 태도는 당당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독립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그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럴 뿐이지,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노혁명가와 담화를 통해 김종진은 아나키스트가 어떤 사상과 행동을 가져야 하는지, 자유연합주의가 왜 독립운동에 가장 적절한 이론인지, 향후 건설될 독립 한국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가슴으로 새기게 된 계기였다. 이후 그는 천진역을 떠나 중동선 북만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1927년 10월 하순 목단강역에서 족형인 백야김좌진 장군을 만난 김종진은 독립 전쟁을 위해 둔전 양성의 계획을 서둘렀다. 그는 첫째 만주 전역을 수개 구역으로 분할 것, 둘째 지방 실정의 조사파악, 셋째 교포 조직화와 지도훈련 계획 등을 수립하였다.
당시 김좌진이 이끌고 있던 신민부는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었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인 김좌진은 이를 계기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주장하였고, 민사부 위원장 최경은 교육과 산업을 우선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좌진은 군정파의 강화를 위해 서로 군정서의 참모장 황학수(黃學秀)를 참모부 위원장에 임명하고 김종진을 군사부 위원에 참여시켰다. 이는 김좌진이 김종진의 아니키즘 이론을 부분 수용한 것이다.
그 뒤 김종진은 우선 신민부 영향 하에 있는 각 지방을 비롯해 북간도 일대를 답사한 다음 계획을 구체화하려 하였다. 그의 순방 지역은 해림(海林)을 출발해 목릉(穆稜)-밀산(密山)을 거쳐 영안(寧安)-오상(五常)-액목(額穆)을 경과하고, 이어 돈화(敦化)까지 왔다가 백두산 북방인 안도(安圖)-장백(長白)-무송(撫松)을 순방한 후 북간도인 연길(延吉)-왕청(汪淸) 등 간도 전역을 돌아오는 것이다.
1928년 1월초 여정에 올라 약 8개월 동안 만주 전역의 순방한 김종진은 만주개척의 선봉대인 교민들의 생활 실태를 조사하면서 김좌진 장군의 대변자로서 그들을 위무하였다.
귀환 후 김종진은 교민들의 참담한 생활실태는 물론 그 배후에 중국 토착 지주와 자본가, 일제와 국제 공산도당의 위협이 있음을 보고하였다. 또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제에 대한 항전 대책과 대공산당 행동 통일 및 독립운동 단체 상호간의 협동 등을 제안하였다.
김종진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유림과 1929년 3월 남경에서 도착한 이을규와 함께 해림에서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여 만주운동 전반에 걸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에서 김종진이 제시한 ‘만주의 독립운동 계획안’이 주요한 토의 주제로 선정되었다. 주로 대공산주의 정책 수립에 대한 방책이 논의되었다.
유림은 토론에서 사상은 사상으로 방어해야 함으로 공산주의는 아나키즘으로만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김좌진·김종진·이을규는 별도로 신민부 개편 건과 대공산주의 방책 건을 논의한 후 신민부 개편을 김종진에게 위촉하였다.
이러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안’은 곧 신민부 개편으로 이어졌는데, 사상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1929년 7월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게 되었다. 연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기본 강령은 “첫째,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무지배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둘째, 모든 사람은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각 개인은 자주적 창의와 상호부조적인 자유로운 합작으로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기한다. 셋째, 각 개인은 능력껏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각 개인의 수요에 따라 소비하는 경제 질서의 확립을 기한다.”고 하였다.
당면 실천과업으로는 “첫째, 우리는 재만 동포들의 항일사상의 계몽과 생활개혁에 힘쓴다. 둘째, 우리는 재만 동포들의 경제적·문화적 향상과 발전을 촉성하기 위해 자치합작적 협동 조직으로 동포들의 조직화에 힘쓴다. 셋째, 우리는 항일 전력 증강과 청소년의 정신 무장을 위한 교육에 힘쓴다.
넷째, 우리는 한 사람의 농민으로서 각자 자기 생활을 꾸려가며 농민 일반의 생활개선과 사상 계몽에 힘쓴다. 다섯째, 우리는 각자 자기 사업에 대한 연구와 자기 비판을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여섯째, 우리는 항일 독립 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우군(友軍)으로서 협조하고 협동작전에 있어서의 의무를 철저히 수행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강령 아래 모인 동지들은 이준근(李俊根)·이강훈(李康勳)·이붕해(李鵬海)·이덕재(李德載)·이달(李達)·김야봉(金野蓬)·김야운(金野雲)·엄형순(嚴亨淳) 등이다. 그리고 신민부 개편안을 제출해 주요 간부회의를 개최해 곧 7월 21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한족 총연합회의 조직 체계는 먼저 각 지역에 농무협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자유로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연합회가 신민부의 후신이긴 하지만,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주체가 되어 조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부는 영안현 산시역(山西驛) 앞에 두었다.
당시 김좌진은 “우리(신민부)와 그들(연맹)이 표리가 되고, 이신동체(異身同體)가 되어…… 교육과 사상 지도 및 생활 개선은 연맹에서 맡도록 하는 동시에 개편되는 총연합회에는 그들 전원이 참가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연맹의 월례회의에서 이 제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두 단체의 합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즘 국내에서 소식을 들은 김종진의 부인이 장녀를 데리고 불원천리 만주로 그를 찾아왔다. 고국에서의 이별 이후 10년 만의 해후였다. 부인의 용단에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상봉을 하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남들처럼 가정을 갖게 된 것이다. 훗날 아나키스트 이을규가 쓴 『시야 김종진 선생전』에 따르면, 김종진은 이때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놨다고 한다.
재만 동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 조직체를 표방한 한족 총연합회는 위원장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이 맡았다. 이 외에 농무 및 조직선전에 김종진, 교육 이을규, 군사 이붕해 등 측근 동지들이 각각 차장으로 임명되어 조직을 운영하였다. 총연합회는 과거 단체들처럼 권력이나 위세를 부리지 않고 동포들의 토지교섭은 물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해주니 각 지역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조직정비가 완료되면서 총연합회는 조직과 간부를 훈련시키고자 북만중학(北滿中學)을 빨리 운영하고자 하였다. 중학교를 통해 경제와 교육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안정적인 농촌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한족 총연합회의 발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한번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양자 간의 공개 토론회를 열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자 청중들이 환호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응으로 서로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공산주의자들은 암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 불행히도 그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백야김좌진이었다. 1930년 1월 20일 오후 4시경, 김좌진은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공산당 당원인 김봉환(金奉煥)의 조정을 받은 주중 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한편, 1930년 3월 중순, 천안경찰서의 형사들이 인천에서 맹렬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기자가 탐문에 들어간 결과 '선하증권(船荷證券)을 위조, 6만여 원을 사취(詐取)'라는 제목의 보도를 할 수 있었다. 화물 운송 기관이 발행하는 선하증권은 은행에서 현찰로 교환할 수 있었다.
기사 내용은 ‘피해자는 호서(湖西)은행’인데 충남 아산에서 미곡상을 하는 최석영(崔錫榮)이 7만여 원 상당의 선하증권을 위조해 천안호서은행에서 6만여 원으로 할인해서 바꾸고는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경찰이 긴장했던 것은 최석영이 국내로 잠입한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형사대가 인천 일대를 뒤지고 있을 때 신현상과 최석영은 이미 북경에 도착해 있었다. 정화암은 ‘호서은행 본점과 지점을 통해 15회에 걸쳐 5만8천원이라는 거금’을 빼냈다면서 ‘엄청난 거액’이라고 회상했다. 1929년 말 최상품 쌀 10㎏이 2원20전이니 현재 10㎏당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6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들여오지 못하고 일부만 가져왔는데 북경에 안전한 장소가 생기면 나머지도 가져올 계획이었다.
자금이 생기자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앞으로 운동 방향을 토의해서 결정한 뒤 자금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경과 천진은 물론 상해, 복건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북경으로 달려왔다. 북만주의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일제의 감시가 심한 중동선(中東線)을 우회해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1930년 6월 하순 열린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대회에서는 두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유기석(柳基石) 등은 의열단처럼 국내로 잠입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종진·이을규 등은 북만주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회에 참석했던 이을규는 “선생(김종진)은… 각지 동지들이 만주기지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물론 인적(人的)인 점에서도 우선적으로 총력을 기울여 민족대계의 기반을 만주에다 닦자고 호소해서 만장일치로 승인했다(시야김종진 선생전)”고 한다.
그런데 대표 대회가 끝나갈 무렵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몇 명씩 분산 숙식하던 아나키스트들의 한 숙사(宿舍)를 새벽녘에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본영사관 경찰이 습격한 것이다. 자금을 마련해 온 신현상·최석영은 물론 김종진·이을규 등과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까지 체포되었다. 일제가 조선 강도단이 북경에 잠입했다고 사칭하면서 일부 부패 경찰을 매수해 숙소를 급습한 것이었다.
결국 일제가 중국 경찰을 앞세워 숙소를 급습해 참으로 중요하게 쓰일 독립운동자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세웠던 계획, 특히 만주에서의 운동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나 이을규가 천진에서 기선을 탔다가 선상에서 일제 관헌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회영과 백정기 등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천진 시내에 있는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를 털자는 것이다. 이 습격사건에 성공하여 1930년 9월 경 정화암·백정기·김지강·장기준·양여주·이규숙 등 15명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련은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농민 위에 있지 않고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함께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금방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족총련은 모든 것을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각 지방 단위의 자위대를 편성해 지역 경비를 맡게 했다.
한족총련의 재건 움직임에 공산주의 세력은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고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한족총련의 주요 간부 암살에 나섰는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최초 결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한족총련 간부 차장인 이준근(李俊根)과 김야운(金野雲)이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7월 초순 석두하자(石頭河子)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동진(金東鎭)의 집에서 저격당해 살해되었다.
김좌진과 이을규가 사라진 마당에 김종진만 제거하면 ‘재만무련’과 한족총연합회는 완전히 뿌리 뽑히고,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김종진은 1931년 7월 11일 해림역 근처에 있는 동포의 집에 갔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었다. 이후 김종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살해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 국내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일찍이 중국운남 사관학교를 마치고 신민부의 간부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최근에는 한족연합회 군사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던 시야김종진(31) 씨는 지난 8월 26일 중국중동선해림역 부근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한다. 가해자는 백래춘, 이백조, 이익화 등 3명으로 주의상(主義上) 충돌인 듯 하다 한다. 김종진 씨는 김좌진 씨의 재종제로 그의 본가는 경성 필동이며 부친 김영규와 백씨 김연진(신간회중앙 집행 위원) 등 가족이 있고 그의 처자는 중동선석두하자역(石頭河子驛) 부근 팔리지(八里地)에 남아 있다 한다.
이회영은 상해에서 김종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분을 금치 못했다. 김종진은 누구보다 소중한 제자이고 동지였다. 그만큼 아끼고 기대가 컸던 이념적 실천척 분신이었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아니다.”라는 중국 명말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 사심없이 마음을 열어 담론을 했던 사이였다. 오랜 동지 이상설의 부음을 듣고 “운(運)이여! 명(命)이여!” 하며 땅을 쳤던 심경 그대로였을 것이다.
1931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는 김종진이 박내춘(朴來春)·이백호(李白湖)·이익화(李益和) 등에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의 나이 31세, 한창 조국 광복에 매진할 나이에 동족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시체 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