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 革命軍 總司令官 梁世奉 將軍의 史蹟址를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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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유적지 | 항일무장 투쟁을 이끈 양세봉장군 흉상이 있는 왕청문 신빈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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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
| 사적지 |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화흥 중학교 |
| 묘소 | 평양 |
| 묘소 | 서울 |
중국요령성 신빈만족자치현의 왕청문(旺淸門). 우리의 면소재지에 해당하는 작은 진(鎭)에 불과하지만 한때 이곳은 ‘한국 독립운동의 수도(首都)’였다. 1920년대 말 만주의 독립군 통합정부인 ‘국민부’가 있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의 본부가 자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한인들은 왕청문에 갈 때는 으레 “서울에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왕청문은 한갓 퇴락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한인[조선족] 마을에는 군데군데 빈집이 눈에 띄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조선족학교’는 이미 폐교가 되었다. 황량한 교정 한쪽에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독립운동가 양세봉(梁世奉)[1896~1934]의 흉상. 대리석을 깎아 만든 높이 5.4m의 거대한 조각이었다. ‘抗日名將 梁瑞鳳’(항일명장 양서봉:‘서봉’은 세봉의 다른 이름)이라 쓰인 글씨도 선명했다.
1995년 왕청문 인민 정부는 양세봉의 항일 투쟁을 기리기 위해 석상을 건립했다.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위해 거대한 기념물을 세운 일은 이례적이다. 왜 중국은 양세봉을 떠받드는가. 양세봉은 평북 철산 출신이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살길을 찾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그가 정착한 곳은 중국봉천성 흥경현. 지금의 요령성 신빈현이다.
1896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세봉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철산군 서당에서 소사(小使)로 일하면서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 행위가 그곳에까지 미쳐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어린 가슴에도 항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더욱이 1909년 10월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양세봉은 16세기가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1916년에 임재순(任再順)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자, 양세봉은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寬甸), 환인(桓仁)을 거쳐 영릉(永陵)에 도착하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연명해 갔다. 그러다 1919년 봄 신빈현 홍묘자(紅廟子)로 이사를 했는데, 마침 그곳에서 국내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흥동학교(興東學校) 교장 이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 양세봉은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金明奉)·정창하(鄭昌夏)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독립단 소속 지방 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해 겨울, 양세봉은 의주·삭주·귀성군의 국경선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창성군대유동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기습,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최시흥 · 최지풍(崔志豊) · 박응백(朴應伯) 등이 중심이 되어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 독립군 부대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 및 적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과 경찰들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소위 ‘토벌 계획’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최시형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천마산대는 그곳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과 합류하여 광복군 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양세봉은 광복군 철마별영의 검사관으로서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어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1922년 8월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을 비롯하여 대한 광복군 군영, 대한 광복군 총영, 평안북도 독판부 등 8단 9회의 대표들이 중국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 한족 통일회의를 개최하여 남만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 통의부를 결성하였다. 대한통의부는 김동삼(金東三)이 이끌었는데 남만지역에서의 민, 군정을 통합한 독립 정부 형태를 갖추었다. 당시 양세봉은 대한 통의부의 의용군 산하 제3중대(중대장 : 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양세봉은 1923년 5월경 평북 창성군, 초산군 판면, 의주군 고령 영산 일대의 일본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할되자, 양세봉은 통의부의 의용군 소속의 중대를 주축으로 조직된 참의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참의부를 군사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연변과 중국의 집안현을 중심으로 무송·장백·안도·통화·유화 등의 한인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양세봉은 참부의 소대장으로서 국내진입 작전을 통해 활발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참의부 소대장 양세봉은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성남동, 강계군 고산하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수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며, 특히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총독 사이토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5월 19일 소대장 한웅권과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국경 순시를 한다고 경비선을 탄 사이토 총독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일본군도 응사를 했지만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경비선이 달아나자 독립군은 박수를 치면서 야유를 보냈다. 이 소식은 만주의 동포 사회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에도 알려져 모두 통쾌해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저격 흉한은 약 10명으로 모두가 마적으로 추정됨. 흉한들은 장총 또는 모젤 권총으로 약 40~50발을 발사했다. 우리 경비원들도 기총 28발, 모젤 권총 44발 등 모두 72발을 응사했다"고 보고 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와 일본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사이토 총독은 정부는 물론 일본 국회에서도 큰 질책을 받았다.
1924년 6월 양세봉은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 일대에서 항일 무장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4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 장군이 왕청문 이도구 밀림리(密林里)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떼들의 급습을 받아 위기에 몰리자, 양세봉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신팔균 장군 등 수십 명의 독립군들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 뒤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 군정서, 길림주민회, 의성단 등 10여 개 단체의 대표들이 협의를 거듭한 끈에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양세봉은 정의부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제군경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맹활약하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국공합작에 의하여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여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를 개최하였다.
양세봉은 정의부 대포로 민족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노력에 앞장섰다. 당시에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새로 결성하였으나 청년 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 유일당 촉성 조직 동맹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 측과 참의부 측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되자, 양세봉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민부 산하 선민부 토벌 지휘부를 조직하여 지휘부의 부사령이 되어 총사령 이웅(李雄)과 함께 일제의 앞잡이 기관인 선민부(鮮民府) 토벌에 나서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1929년 12월 양세봉은 국민부 예하 조직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 부사령이 되어 일제의 기관 습격 및 밀정처단 등 무장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양세봉은 1931년 11월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령 농민 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 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 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이 중국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1931년 9·18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통화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 집행 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을 비롯한 10여 명이 피체 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피체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뒤 양세봉은 양기하·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과 더불어 조혁군각지부대 수뇌회의(朝革軍各地部首腦會議)를 소집하고 조선 혁명군과 조선 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그는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하고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하여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 중학(化興中學)을 속성 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江甸子)로 옮겼다.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인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령 민중 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 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하였다. 조선 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槍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장종주(張宗周)·왕봉각(王鳳閣)·서대산(徐大山) 등도 이에 호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맺은 후 1932년 3월 양세봉은 참모 김학규, 중대장 조화선·최운구·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왕동헌·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撫順千金寨)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적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여 연합군을 총 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은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하였다. 양세봉은 30여리를 추격하여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하순 영릉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흥경현령을 점령하자 양세봉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중국 의용군이춘윤 부대 1만여 명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돌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 공격하자 기진 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마침내 흥경성에서도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펄럭이면서 전승(戰勝)축제가 무르익어 사기가 충천하였다.
1932년 5월 초 요령 민중 항일 자위군(遼寧民衆抗日自衛軍)의 이춘윤, 왕동헌 분대와 함께 일·만군을 타격하기 위하여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병력 등의 부족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해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으나 공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당시 요령 민중 자위군중국 측의 사령관이던 왕동헌의 기고문을 통하여 조선 혁명군의 피눈물 나던 혈전을 되새겨 본다.
1932년 2월 8일 한·중 민중으로서 총이 있는 사람이면 총, 총이 없는 사람은 호미, 낫, 괭이 심지어는 단도까지 들고 나와서 동지(同志)들을 모았다. 이와 같은 호소에 호응하여 적을 격멸하기를 지원해 나온 자가 한국사람이 8백명, 그리고 중국 측에서는 전 자위단(前自衛團) 용사 5백 명을 빼고도 2천5백명이나 되었다. 곧 맹세해서 의거를 일으켰다.(중략)
슬프다! 산하(山河)는 그대로 있건만, 인사(人事)는 기대에 어긋났다. 양세봉·양하산 두 장군은 전후(前後)해서 전망(戰亡)하고 김학규 대표는 관내(關內 : 산해관 안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하략)
1933년 1월 중국당취오 부대가 와해, 붕괴됨에 따라 왕청문 남의(南依) 목수둔(木樹屯)에서 개최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에서 양세봉은 총사령에 재임용되었다. 양세봉은 부사령에 박대호(朴大浩)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 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軍規)를 제정하여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33년 4월 양세봉은 조선 혁명군의 활동 무대를 집안현, 임강현(臨江縣) 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해 5월에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 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다.
1934년 3월 양세봉은 홍경현 쌍립자(雙砬子)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1)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 범위 확대 (2) 항일근거지 건립 (3) 일본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1934년 6월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를 북경에 밀파하여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珍珠嶺)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을 처단하는 등 계속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4년 7월 7일 일본군이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 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 혁명군은 반격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4년 7월 중순 양세봉 부대는 이춘윤 의용군 부대의 잔류병 5백명과 합세하여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규모의 일군과 교전, 만 2일간의 격전을 치뤘다. 그 뒤 일본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은 격퇴되고 말았다. 이때 패퇴하는 일본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렇듯 조선 혁명군이 1929~1934년 5년간 일본군 및 만주국 군경과 벌인 전투는 80여 차례, 저격한 일본군은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독립군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좌익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들은 상해 등 중국 본토로 넘어갔을 때 만주에 남아서 일제와 싸운 것은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500여 명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대립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일본에 맞선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했고 서로 공격하고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때 양세봉은 우익의 대표로 좌익과 맞섰고 좌익들에게 원수로 찍힐 정도였고 ‘극우’라는 평까지 듣는다. “좌익들은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인 나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라고 불렀다.” (김학규) 의형제를 맺었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 (후일의 김일성)를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의 일일 것이다. 김일성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하는 양세봉이 등장한다.
“그건 다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야. 대장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 때문에 인심을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꾼들을 폭군으로 만들고,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 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고 이렇게 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이 말에 대해 김일성은 이런 해석을 내린다. ‘양세봉 자신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전까지는 지독한 영세농민으로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었다..... 무우 시래기에 피쌀을 섞어서 쑨 죽을 기아의 해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해온 빈농민의 후예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넋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세봉은 아무리 사고를 낸 부하라고 하더라도 부하에게 욕설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고 할 정도로 그는 겸손하고 인간적이었다. 양세봉은 영릉가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 천여 명을 죽였고, 수백 명을 국내에 잠입시켜 공작을 펼치기도 하면서 만주 지역 일본군 최대의 공적이 됐다. 독립투쟁 역사상 그만큼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버티며 일본군에 저항한 사람은 없었다.
양세봉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이루고 있을 때 일제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王明藩)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그를 유인하였다.
1934년 8월 12일(음) 양세봉은 부관 김광욱(金光旭)·김성해(金星海)·김추상(金秋霜)과 같이 왕씨를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들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는 순간 왕 씨는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 씨가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고 고함을 쳤다. 양세봉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씨 등 앞잡이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양세봉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 측에서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平葬)을 하였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빈현의 한인 역사 연구가 김순화(76)는 “양세봉이 총에 맞은 날은 추석을 나흘 앞둔 때로 호위 대원들이 한인 김창준의 집으로 모시고 갔는데, 상처가 심해 다음날 숨졌다”고 말했다. 『압록강변의 항일 명장 양세봉』을 출간한 중국인 조문기(曹文奇·57·신빈현 거주)는 “민간에서는 양장군의 죽음을 두고 ‘별이 떨어졌다’며 애도했다”고 한다.
‘군신’ 양세봉은 남만주 동포들에게는 ‘소작농 장군’으로 떠받들어졌다. 지금도 신빈지역에는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민요가 전한다. 폐교되기 전까지만 해도 왕청문의 한인[조선족] 학생들은 ‘양세봉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남과 북이 원수처럼 갈라서고 수많은 피를 상호간에 뿌린 이후 양쪽의 국립묘지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또 그곳에 묻힌 사람들은 대개 한쪽의 적이었고 단지 그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쪽에선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십상이었다. 한쪽에 의해 추앙받는 사람은 한쪽에선 역적이었고 한쪽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가 한쪽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으며 비록 시신 없는 허묘일망정 남과 북의 국립묘지 모두에 그 유택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양세봉이라는 사람이다.
양세봉의 묘지는 대한민국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의 애국 열사릉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현충원의 묘비에는 ‘순국 선열 양세봉의 묘’, 애국 열사릉의 묘비에는 ‘독립군 사령 량세봉 선생’이라고 적혀 있다. 한 인물이 남북한 양쪽 국립묘지에 안장된 경우는 양세봉뿐이다.
두 묘지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34년 양세봉이 일본 밀정에게 피격 당해 숨지자 부하들은 그의 시신을 환인현의 고구려성 아래 삼성자에 가매장했다. 그러나 직후 일본 영사관은 양세봉의 가묘를 파헤쳐 그의 목을 잘라다 통화 시내에서 효시했다. 뒤늦게 조선 혁명군이 양세봉의 목을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해방 뒤인 1960년 북한은 양세봉의 무덤을 평양 근교로 이장한 후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다시 안치했다. 앞서 1946년 북한은 양세봉의 처 임재순과 아들 양의준을 평양으로 불러 살도록 했다.
북한이 이처럼 양세봉을 우대하는 것은 양세봉과 북한김일성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다. 남만주 시절 양세봉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며, 말년에는 김일성의 유격대부대와 항일합작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 부대간 합작은 결렬됐지만, 조선혁명군 해체 후 상당수 대원들이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갔다.
현충원에 양세봉의 묘지가 안장된 것은 1974년이다. 1962년 양세봉 등 조선혁명군 관계자들이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고 애국지사 묘역 조성이 논의되면서 양세봉의 묘지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유골은 모셔져 있지 않은 허묘(虛墓)다. 국내에 유족이 없는 관계로 다른 묘비와 달리 ‘공훈판’에 아무런 내용도 쓰여 있지 않는 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