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哈爾濱 日本 總領事館을 襲擊- 朝鮮人 革命 靑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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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5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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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 하얼빈시 화원가 97호화원 소학교 |
1930년 5월 1일, 조선인 청년들이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의 지도하에 흑룡강성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여 정치적으로 일본에 큰 타격을 입힌 사건.
1930년 4월 5일,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에서는 「5·1 사업에 관한 성 당·단위의 결의」를 각 급 당·단 조직에 하달하였다. “만주에서 당·단 조직이 있는 곳이면 모두 광범한 군중 시위를 견결히 조직해야 한다. 특히 만주의 산업과 정치 중심인 하얼빈[哈爾濱]·봉천(奉天)·무순(撫順)·대련(大連) 등지에서는 반드시 광범한 정치적 파업과 정치적 시위를 하도록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1930년 4월 18일 만주 주재 전국 총 공회 대표 임중단이 심양(瀋陽)에서 하얼빈으로 왔다. 상기 결의문의 내용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임중단의 주요한 사명이었다. 임중단은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를 통하여 하얼빈 군중 시위를 기획하고 추진하고자 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과 손을 잡고 한·중 연합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즉 하얼빈시의 중국인 노동자 200여 명과 조선인 농민 200여 명을 동원하여 하얼빈 시가에서 메이데이 시위를 단행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인 청년들의 일본 총영사관 습격 사건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기획되고 추진되었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는 중국인 노동자를, 조선 공산당에서는 조선인 농민을 동원하는 일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조선인 농민을 동원하는 일은 이극화(李克華)가 구체적인 책임을 지고 추진하였다. 이극화의 본명은 홍남표(洪南杓)이다. 강우(江宇)·유포심(劉怖深)·진덕삼(陳德三)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극화는 화려한 혁명 운동가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반대하는 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6월 만주로 망명하여 한족 신문사(韓族新聞社)를 설립하고 책임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0년 6월 조선에 잠입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25년 4월 조선 공산당 설립에 참여하였고, 1925년 11월에는 조선 공산당 중앙 집행 위원회에 선전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9월 중국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상해 한인 특별 지부’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약하였다.
1929년 10월 이극화는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이극화는 중공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아성(阿城)·해구(海口)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당·단 서기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선 공산당 당원을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극화는 메이데이 연합 시위에 참여할 조선인 농민을 동원하기 위하여 아성 개신 소학교에서 비밀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 후 이극화는 한형도[장시우(張時雨)-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선전 부장]를 황산저자(荒山咀子)에 파견하였다. 황산저자조선 공산당 책임자 허극(許克)[허형식(許亨植)]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는 취원창(聚源廠)의 조선 공산당 당원 박만수[박원혁]도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메이데이 시위 참여자를 동원할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허극은 황산저자에서, 박만수는 취원장에서, 한형도는 해구·옥천(玉泉)에서 시위 참여자를 동원하도록 책임을 분담하였다.
메이데이 전날, 아성현의 해구·이층전자·모서하·사리둔[지금 평방]의 조선인 청년들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두 세 사람씩 흩어져 하얼빈으로 들어왔다. 일부 사람들은 해구에서 하얼빈까지의 먼 길을 하루 종일 걸어왔다. 해구에서 온 대부분 사람들은 할빈시 도외 태고 14도가에 있는 정해주가 꾸린 조선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5월 1일 황산저자와 취원창에서 온 청년들과 하얼빈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선인 청년 학생들도 이 여관에 모여 왔다. 조선인 200여 명이 집결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중국인 노동자 동원이 차질을 빚으면서 원래 계획하였던 한·중 두 민족의 연합 시위가 불발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200여 명 가운데 비교적 나이든 농민 약 150여 명은 각자 흩어지고 35명 청년들만 남아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전해 졌다.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서는 양환준(梁煥俊)을 하얼빈에 급파하여 이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양환준은 단숨에 이층전자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했다. 양환준은 도외 16도가 있는 김기덕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김대수·허극 등이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환준은 정세를 알아본 뒤 35명의 청년들을 모두 모여 오게 하였다.
양환준은 청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의견을 물었다. 일부 청년들은 남은 사람들이라도 시위 행진을 단행하자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양환준도 적은 인원으로 단행하는 시위 행진 보다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것이 정치적 영향이 더 클 수 있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시장기가 있던 청년들은 점심을 든든히 먹어야 힘을 내어 일본 영사관을 칠 수 있겠다고 양환준에게 말하였다. 그는 즉시 김대수를 보내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 대표를 청해오게 하였다. 그리고 김대수와 함께 온 만주 주재 전국 총공회 대표 임중단과 북만 특별 위원회 위원 당홍경에게 조선인 청년들의 결의와 요구를 이야기 하였다. 그들은 조선 청년들의 결의에 찬성하였고, 당홍경은 흘레브[빵] 50개와 갈바스[러시아 순대] 50 토막을 사왔다.
임중단·양환준·김대수·허극 등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토의하였다. 임중단은 하얼빈시 경찰청 책임자가 공산당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국민당 좌파이니 자기가 곧 찾아가서 교섭하겠다고 하였다. 청년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임중단은 경찰청에 다녀왔다. 임중단은 “경찰청장이 당신들을 보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할 때 민국 경찰대가 출동할 테니 저항하지 말고 민국 경찰청 간수소로 가시오. 그러면 일본 총영사관이 간섭해도 당신들을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지 않을 것이고 금방 석방할 것이요.”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행동 방안을 점검하고 책임을 분담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위원회에서는 경찰청과의 연계와 뒷수습을 맡기로 하였다. 김대수와 허극은 습격 행동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양환준은 습격 행동이 성공하면 곧 해구로 돌아가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만반의 준비가 된 조선인 청년들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표어를 쓰고 깃발을 만들고 선전물을 준비하였다. 하얼빈 거리에 익숙한 김은주가 앞장서서 대오를 이끌고 최재순이 깃발을 들고 황경석이 구호를 부르고 허극이 선전물을 뿌리고 나머지는 수기를 하나씩 들도록 하였다. 사람마다 돌멩이 수십 개씩 준비하였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남강 이주가 27호[지금의 화원가 97호 화원 소학교 교사]에 있었다. 추림 상점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이날 오후 6시 30분 반일 대오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높이 추겨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 총영사관으로 돌진하였다.
이때 영사관 문 앞에서 경비를 서던 경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황급하게 일본 총영사관 대문을 닫아버렸다. 대문 안으로 쳐들어 갈 수 없게 되자 조선인 청년들은 “박아라!”, “부셔라!”라 하며 일본 총영사관 건물을 향해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다. 여성들은 부근에 쌓여있던 벽돌과 기와 조각을 치마로 날라 오고 남성들은 그것을 받아 있는 사력을 다해 던졌다. 이들의 돌벼락에 엉망진창이 된 것은 일본 총영사관의 유리 창문이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갑작스러운 조선인 청년들의 반일 거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조선인 청년들은 모여든 행인들에게 선전물을 뿌렸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 군벌의 압박을 반대한다!”,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군벌 정부가 노동자·학생을 함부로 체포함을 반대한다!” 등이 적힌 삐라였다. 조선인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을 타도하자!”고 높이 외쳤다.
바로 이때 일본 총영사관의 3층에서 당직 순사가 총을 쏘았다. 그는 총을 쏘아 조선인 청년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 총소리는 오히려 조선인 청년들의 더욱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조선인 청년들은 또 다시 벽돌 조각과 돌멩이를 주어 유리 창문을 여지없이 부수어 버렸다. 일본 순사는 다시는 얼굴도 내밀지 못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 총영사관에 돌을 던진 후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선전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시위 대오는 동성 특별구 경찰처 소속 경찰들에게 포위되었다. 조선인 청년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경찰들에게 질문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은 경찰들에게 붙잡힌 두 친구를 빼앗았다. 조선인 청년들은 붙잡히면 빼앗고 또다시 붙잡히면 빼앗으면서 경찰들과 싸웠다. 조선인 청년들은 비록 용감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경찰들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소련 대사관 문 앞에 이르러서 35명 가운데 여자 5명, 남자 27명 총 32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조선인 청년들은 도리구(道里區)에 있는 동성 특별구 경찰처로 압송되었다. 경찰 당국은 1주일이 지나도록 사건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죄 석방을 요구하며 옥중에서 떠들썩하게 고함을 지르고 높은 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이틀 동안이나 단식 농성도 하였다. 동성 특별구 법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을 심문할 때 모두가 용감하게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다고 떳떳이 나섰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와 동북 삼성에 대한 침략상을 꾸짖으면서 이러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것은 정의롭고 애국적인 행동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재판관들은 이들의 정의의 주장에, 간절한 호소에 밀려 쉽게 판결을 내리지 못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행동을 펼쳤다. 한국이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상황에서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재판권을 빙자로 체포된 조선인 청년들을 저희들한테 넘기라고 중국 당국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인 청년들은 모두 중국 국적에 들었다고 주장하였고 성명을 내었다.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에서는 사람을 아성·옥천·취원창 등지에 보내 이들의 '입적 증명서'를 발부 받아 중국 경찰 당국에 제출하였다. 중국 경찰 당국도 이들을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인이라 하여 일본 총영사관에 인도하지 않았다.
당시 하얼빈에는 정수강이라 조선인 한의사가 있었다. 정수강은 구금된 박창주의 외사촌 형이었다. 그는 군벌 김해산과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의사를 자주 보내 체포된 청년들의 병을 봐 주고 공산당의 지시를 조선인 청년들에게 전달하였다. 공산당에서는 옥중 청년들에게 서로 말이 모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모른다고 잡아떼라고 하였다. 한사람을 통역으로 내세워 경찰 당국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몇 사람이 책임을 안고 대부분이 석방되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라 하였다. 이런 지시에 근거하여 옥중의 청년들은 8명이 총영사관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승인하고 나머지는 쌀 사려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진술하도록 하였다.
법원에서는 한 달이 지나도 심문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 청년들은 제2차 단식 투쟁을 벌였다. 동성 특별구 법원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법정에서 이욱·허극·김은주·박창주·유홍래·황병서·서경락·이성무 등 8명이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한 것을 승인하였다. 나머지 24명은 딱 잡아떼고 혐의를 승인하지 않았기에 6월 10일 석방되었다. 그들은 하룻밤을 성고자 까지 도보로 걸었고, 이튿날 기차로 아성으로 돌아갔다. 체포되었던 조선인 청년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에 해구·모서아·옥천 등지에서 200여 명이 아성역 까지 마중 나왔다. 해구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환영회까지 열었다.
감방에 남은 8명은 징역살이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판결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제3차 단식 투쟁을 벌였다. 법원에서는 하는 수 없이 판결을 내렸다. 황산저자의 허극, 해구의 서경락, 하얼빈의 이욱 3명을 8개월, 나머지 청년들은 6개월에 언도하였다.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조선인 청년들이 만기되어 석방되는 날을 기다려 다시 체포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공산당은 그들이 석방되는 날 택시로 안전하게 아성까지 이동시켰다.
중국 전역에 발행되던 심양의 『성경시보』는 5월 3일, 5일, 6일, 10일자와 6월 15일자에 이번 사건에 대하여 보도하면서 중국인들의 관심을 하얼빈에 집중시켰다.
전국 총공회만주 주재 대표 임중단은 조선인 혁명 청년들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에 올린 보고서에서 “그들의 견결하고 자각적이고 용감한 행동에 나는 참으로 탄복했다.”라고 썼다.
하얼빈 주재 야쯔기일본 총영사는 이번 사건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였다. 일본에서 출판하는 『만몽 년감』에도 “소화 5년 5월 1일 대략 100여 명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메이데이 시위 행진을 거행하고 하얼빈 신시가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고 돌멩이를 뿌려 매우 소란스러웠다.” 라고 쓰여져 있다.
당시 소련인이 하얼빈에서 꾸린 『기백』이란 러시아어 잡지에서는 「생각지 않았던 메이데이 선물」이란 풍자적인 기사 제목을 뽑아 이번 사건을 보도했고 유리 창문들이 깨진 영사관 청사를 보여주는 사진 두 장을 함께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