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靑山里 獨立 戰爭과 庚申 慘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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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사건 | 항일 독립군이 승리한 독립 전쟁과 이에 대한 일제가 자행한 보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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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0년 |
| 사건발생지 | 길림성 화룡현 등 |
1920년 10월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와 이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으로 행해진 사건.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만주침략은 간도 협약, 신해혁명, 4차에 의해 걸친 러일협약 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서 남만주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획득한 일제는 만주 침략을 더욱 가시화시켜 나갔다. 본격적인 남만주 침략을 위해 1906년 설립된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는 교통로 확보 및 거점간의 연결뿐이 아니라 만주지역 정보 수집 및 조사 등 만주침략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7년에 일제는 러시아와 「동청철도와 남만주 사이의 경계와 접속에 관한 의정서」 및 「제1차 러일협약」 등을 체결하면서 만주분할을 획책했다. 남만주에 이어 1907년에는 북간도 용정(龍井)에 통감부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여 북간도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어 1909년 9월 ‘간도협약’을 통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기에 이르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일본 군부 내에서는 중국 본토와 만주를 분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분리한 만주를 한국과 연결시켜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11년 압록강 철교를 개통하고, 안동-심양선을 건설하여 경의선과 연결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야욕에 서구 열강들은 ‘만주에 대한 정치적 침략의 전 단계’로 간주하고 크게 우려할 정도였다.
일제의 만주침략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1914년 8월 대독 선전 포고에 이어 교주만을 점령한 일제는 1915년 「대중 21개조 조항」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다. 조항 중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조약」을 통해 만주침략의 기반을 넓혀 나갔다. 이를 근거로 일제는 남만주에 대한 권리와 간도 한인의 치외법권을 주장하였다. 이는 한인 통제를 통한 만주 침략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1916년 7월 제4차 러일협약을 통해 만주에서의 이권 조정을 마무리 짓고 남만주 침략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1917년에는 남만주와 한국을 일원화된 행정체계로 묶어 이 지역을 일본 본토와 긴밀하게 연결하는 구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8년에는 조선은행권을 관동 조차지와 남만주 철도 지역에서 통용할 수 있는 정식 화폐로 삼는 등 경제적 침투도 가속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일제의 사회경제적 침투는 훗날 만주 지배를 위한 포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은 사회 경제적 침투와 함께 일본군의 전진 배치를 통해 추진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중에 증설된 4개 사단을 상설화하고 2개 사단을 증설하였으며, 기존 조선주차군을 대신하여 상주할 2개 사단 규모의 ‘조선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1915년 12월 24일 제36의회에서 한국에 제19, 20사단을 상설한다는 안을 가결한데 이어 2개 사단 규모의 ‘조선군’을 창설하였다. 조선군 창설의 목적은 한국 내 군사 통치 체재를 구축하는 동시에 유사시 만주 침략의 군사적 기반으로 활용하려는데 있었다. 한편으로 러일전쟁 직후 요동반도에 관동군을 배치하였던 일제는 1919년 관동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만주침략을 위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해 갔다.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은 이와 같은 기반위에서 감행되었다. 시베리아 침공의 명목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을 저지, 간섭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1918년 8월 만주리 침략과 함께 자바이칼 및 하얼빈 북서 지역을 점령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간도를 육지와 바다로 연결시키는 군사망을 구축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이러한 일본군의 침공과 포진에 시베리아와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 그 중간에 위치한 북간도를 침략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이 단순히 시베리아 지역으로 그치지 않고, 간도 침공과 연계하여 만주 지역 봉쇄를 목표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1919년 3·1 운동은 한인사회가 발달해 있던 북간도, 연해주 지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북간도에서는 3·13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한인들의 민족운동에 대응하여 1919년 9월 19사단의 국경 수비부대 병력을 증강하고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는 1919년 9월 제19사단장과 제20사단장에게 ‘대불령선인작전(對不逞鮮人作戰)에 관한 훈령’을 내리고, 해외 항일 단체들의 국내 진입을 막기 위해 국경 수비를 강화할 것과 ‘불령선인’들에 대한 타격을 위해 필요에 따라 일본군의 간도 침입이라는 극단적 방침도 세웠다.
이에 조선군사령부는 1919년 10월 「재지나불령선인대책(在支那不逞鮮人對策)」을 수립하고, 중국 측에 한인의 ‘취체’를 요구하는 한편 적당한 때를 틈타 북간도와 서간도에 조선군과 관동군이 침공한다는 계획을 세워 나갔다.
1920년 북간도를 거점으로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일제는 용정촌의 일본인으로 하여금, 1920년 4월 25일 거류민대회를 열어 독립군의 활동을 종식시켜 주도록 육군대신과 조선 상주군 사령관기타 요인들에게 출병청원서를 제출케 하였다.
봉천일본총영사 아카스카(赤塚)는 1920년 4월 28일 장작림(張作霖)에게 서간도 지역에 중국 군대를 증파하여 ‘불령선인단체’를 취체할 것을 요구하였고, 5월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카이케(赤池)와 봉천총영사 아카스카는 길림성과 봉천성 정부에 ‘불령선인’의 취체 및 중일 양국 공동수사를 요구하였다.
은기서(段祺瑞) 수하의 서정림(徐鼎林) 길림성장은 이와 같은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며, “간도 한인의 취체는 어디까지나 자주적으로 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나, 봉천성장 장작림은 한인 항일운동의 격화가 치안을 혼란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병력으로 진압”할 방침을 밝히고 제1, 2차 봉천회의를 통해 일본군의 개입을 허용하는 한편 ‘일지협동조사(日支協同搜査)’를 실시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1920년 5월부터 8월에 이르는 4개월간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가와 항일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행해졌다. 하지만 길림지역에서는 서정림을 비롯한 지방관들의 성의 없는 ‘토벌’로 인해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7월 16일 제3차 봉천회의를 소집하여 강안 일대 접경 지역에서 ‘일지협동수사’를 수시로 실시할 것과 일본군의 독립군 소탕을 장작림과 서정림에게 승낙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3회에 걸친 봉천회의를 통해 ‘일지협동수사’, ‘일지공동토벌’ 등의 이름하에 일본군의 단독 토벌을 진행할 것을 주창하였다. 결국, 1920년 8월 15일 일제는 경성회의를 개최하여 ‘일지협동토벌’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한데 이어 일본군의 대부대작전 방침인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일제의 간도 지역 항일운동 탄압은 당시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이던 장작림과 일제의 야합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1919년 장작림이 27사단장으로서 봉천성을 지배한 후 동북 3성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1920년 초 만주로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동북 3성의 패권자로 떠오른 봉천파의 장작림을 후원하고 있었다.
일제의 지원을 받는 장작림은 ‘일지협동수사’ 명의로 일본군의 민족운동 탄압을 인정할 만큼 ‘협조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간도 지역과 달리 북간도 지역에서는 일제의 뜻대로 한인 탄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0년 7월 이후 일제는 간도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여기에는 1920년 7월의 직환전쟁(直晥戰爭)에서의 봉계(奉系) 승리가 무관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작림이 일제와 야합하면서 북간도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해 갔기 때문이다.
일제의 간도 침공은 1920년 9월 2일 장작림의 길림성 인사교체로 인해 급진전되어 나갔다. 장작림이 길림성장 서정림과 연길도윤 장세전(長世銓)을 한인 무장단체에 대한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전격 파직시키고 자신의 수하인 길림독판 포귀경(鮑貴卿)을 길림성장으로, 도빈(陶彬)을 연길도윤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또한 간도지역 항일단체의 무장 해제를 강제하는 탄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장작림의 이와 같은 조치와 태도는 직환전쟁 승리 이후 북경 정부에서 영향력을 증대하여 마침내 길림성의 인사권을 장악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장작림의 방침은 일제의 간도 침공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장작림의 조치는 일제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심복 우충환(于沖漢)을 동경에 파견하기 직전에 이루어졌으며, 그와 함께 이때부터 일제의 군사적 침략 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서정림 길림성장 경질 직후인 9월 12일 간도 참변의 계기가 된 제1차 훈춘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장작림과 일제의 야합을 암시하는 사실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일제는 길림성장 경질과 같은 날인 1920년 9월 2일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서」를 완성하여, 그에 따른 병력 동원에 필요한 조치들을 실행해 나갔다.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서」(이하 「초토계획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간도 한인의 학살계획을 추진해 가던 1920년 8, 9월경의 일본군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 8월 16일 시베리아 침공에 참가한 바 있는 제3사단장 오니와 지로(大庭二郞)가 조선군사령관에 임명된 사실은 일본군의 동향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1918년 시베리아 침공 당시 전술적 역량과 전투 경험을 크게 평가한 것이었다. 이어 8월 20일 일본 육군성은 포조파견군(浦潮派遣軍)의 일부 부대를 토문자(土門子), 초모정자(草帽頂子), 삼분구(三岔口), 나자구(羅子溝) 방면으로 파견하여, 조선군의 간도 침공 작전에 참가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8월 22일 조선군은 포조파견군과의 공동 작전을 계획 협의하였다.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는 1920년 9월경 북만주 파견군 사령관에게 “조선파견군은 9월 하순에 간도방면 불령선인에 대한 토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통보하였다.38) 이와 같이 일제는 포조 파견군과 북만주 파견군을 조선군을 중심으로 한 간도 침공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병력이 북간도의 동쪽과 북쪽을 포위해 들어가는 작전을 세웠다. 이후1920년 9월 2일 「간도지방불령선인토벌계획서」가 작성, 배포되었고, 조선 주둔군 산하 각 부대에 ‘출병’준비가 하달되었다. 즉, 8월부터 구체적 행동을 개시한 일제는 9월 「간도지방불령선인토벌계획서」를 통해 ‘간도출병’의 밑그림을 완성하였던 것이었다.
「초토계획서」는 일제의 ‘한인초토화계획’에 대한 구상을 보여준다. 「초토계획서」 총칙 1조에서 “본 계획은 간도지방에 있는 불령선인토벌을 목적으로 출병을 요구할 경우에 대비하여 준비할 사항을 지시하는 것이다”고 하였고, 2조에서는 “본 초토는 그 기간을 2개월로 잡고 제1기(1개월)에는 전적으로 각 행동구역 내에 있는 불령선인단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며, 제2기에는 제1기의 결과에 의거 기타방면의 실시방안을 개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대규모 부대 운용 방안으로 북간도를 (갑) 혼춘-초모정자,(을) 서대파-합마당, (병) 용정촌-대굴혼-국자가, (정) 광포-두도구 4구역으로 나누어 ‘토벌’구역으로 획정하였다.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 마적대의 습격에 의한 훈춘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어서 10월 6일 조선총독 사이토는 우치다(內田) 외상에게 정식으로 ‘간도출병’을 요청하였고, 7일 각의에서는 ‘간도 출병’을 정식 결정하여, 보병 2개 중대 및 위생, 전신부대 등을 용정촌에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 장작림도 일제의 작전에 호응하여 장학량이 이끄는 3,200명의 부대를 일면파에 파견하여 간도지방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결국 일제는 1920년 10월 8일자 「작명 제57호 훈령」 및 10월 10일자 「제497호 1의 지시」를 통해 조선군 및 포조 파견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을 하명하여 본격적인 간도 침공을 시작하였다. 간도 침공을 위해 일제는 예산을 배정하고 전신선을 가설하는 등 제반의 지원을 실시하였다.
1920년 10월 11일 일본 육군성 군사과에서 이른바 ‘불령선인’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예산을 배정하고, 필요에 따라 조선총독부에 통신원 파견을 요청한 것이 그것이다. 10월 14일 일본군 참모 아마노(天野) 소좌는 육군성에서 세부 사항을 지시받아 본격적으로 전신선을 가설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간도침략 당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일본군의 간도지방 무력 침공에 일제가 예산을 배정하여 전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조선군 역시 조선총독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간도 침공을 감행해 갔던 것이다. 결국, ‘한인초토화계획’ 및 「초토계획서」는 일본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무력 침공을 준비해왔으며 간도 참변이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 19사단은 간도 지방 ‘한인초토작전’의 중심이 된 북간도 방면을 담당한 병력으로써, 전장에서 신속한 기동이나 특별한 작전 수행을 위해 혼성부대로 편재되어 기림지대, 목촌지대, 동지대 같은 지대가 편성되었다.
1) 기림지대의 침공과 만행
가장 먼저 간도에 침공하였던 기림지대는 보병 제38여단 사령부, 보병 제75연대, 보병 제78연대 3대대, 기병 제27연대 3중대, 야포병 제25연대 2대대, 공병 제19대대 제2중대, 헌병 약간으로 구성되었다.
기림지대는 다시세 개의 ‘토벌대’를 편성하여 목(牧) 대좌의 지휘 하에 ‘제 1토벌대’, 아베(阿部) 소좌가 지휘하는 ‘제2토벌대’, 십시(十時) 중좌가 지휘하는 ‘제3토벌대’로 구성되었다.
기림지대는 기본적으로 경원(慶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혼춘하 방면으로 나아가 그 일원을 ‘토벌’하고, 독립군을 나자구 방면으로 추격 포위하여 삼분구 방면에서 남진하는 포조군 일대와 공동작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기림지대는 보병 38여단 사령부를 지대에 포함시켜 혼춘에 배치하여, 기림지대 내의 각 연대와 포조 파견군과의 협조를 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교적 평지로 구성된 작전지역의 특성상 대단위 규모의 침공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 부대들을 통솔위해 제38여단장을 지대장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기림지대는 10월 14일 밤부터 혼춘과 나자구 일대 한인 마을에 대한 ‘제1차 토벌’을 개시했다. ‘제1 토벌대’는 사도구, 남별리, 연통납자, 삼도구 등 혼춘 동북 지역을, ‘제 2토벌대’는 대황구 등 혼춘 북쪽 방면을, ‘제3 토벌대’는 혼춘 부근의 마을들을 각각 포위, 습격하였다.
혼춘지역 침입에 장작림 측은 1920년 10월 16일 이에 항의하였으나, 결국 일제 측과 장작림 사이에는 “일본 군대는 짧은 시간 안에 군사 행동을 종료하는데 노력한다”는 조건으로 「중일 공동 토벌에 관한 협정」이 협의되어 일본군의 간도 침공이 승인되었다.
10월 22일 ‘제2차 토벌’에 들어간 기림지대는 나자구, 삼도구, 노흑산 등지에서 러시아로부터 투입된 제11사단 토문자지대, 제13사단 우입지대와 합류하여 지속적인 습격을 감행하였다.
그중 목토지대는 10월 27, 28 양일 동안 나자구, 영탑도 부근을 습격하고 11월 2일 훈춘에 귀환하였는데, 이 지대에 속한 상판대대(보병 78연대의 제7, 12중대 약 120명)는 11월 4일 훈춘 한민군무부에 속한 약 50명이 삼도구 오지에 숨어 있다는 보고를 접하여, 삼도구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이들 중 3명을 사살하였다.
아베 토벌대는 10월 27일 나자구 부근 여러 부락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노모저하 서방 산지에 나자구, 왕청, 대황구 방면으로부터 모인 약 6백의 독립군이 있는 것을 첩보하여 10월 28일 우입지대와 협동하여 이를 습격하고 부근 학교 및 가옥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위와 같이 기림지대는 훈춘을 지대의 작전 중심으로 삼아 독립군이 밀집해 있던 나자구와 그 일대를 침공하였다.
2) 목촌지대의 침공과 만행
목촌지대는 보병 제76연대, 기병27연대 제2중대의 1소대, 산포병 제1중대, 공병 19대대 제1중대의 1소대로 구성되었다. 목촌지대는 기본적으로 온성으로부터 왕청 방면으로 침공하여 대한국민회·대한군정서 등의 본영을 ‘초토’하고, 서대파·십리평·대감자·백초구·합마당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목촌지대는 다른 지대와는 달리 산포대가 편성되었는데, 왕청 방면의 지형이 다른 지역에 비해 산악 지형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목촌지대는 부대별 연합 작전보다는 단독 부대의 작전을 세우고, 76연대만으로 편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촌지대는 10월 20일 밤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 22일 군정서의
근거지인 십리평을 공격하여 군정서에 양식 공급 및 가옥건설에 종사한다는 명목하에 27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 무관학교 및 건물을 소각하여 십리평을 다시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그 자원을 없애버렸다. 또한 서대파, 십리평, 일리평, 석두하자 일대를 습격하여, 22일 일리평에서 3명, 석두하자에서 13명을 총살하고, 십리평 산중에서 6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3일에는 왕청 합마당 부근 마을을 습격하여 상당한 수의 한인을 학살하였고, 11월 2일에는 혼춘현 회룡봉 부근에 출동하여 8명을 사살하였다. 11월 3일에는 지대 주력으로써 북일양구 부근 곡지로부터 조양하곡으로 이동하여 11월 13일까지 부근 일대와 박만홍을 수장으로 하는 의군단 산포대의 근거지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에서 의군단, 국민회, 대한독립단원 50명을 사살하였다. 11월 30일 일본군 측의 조사통계표에 따르면 목촌지대에 의한 피해 상황은 사살 86명, 설유방환 132명, 소각 학교 2개소, 가옥 103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지대는 10월 15일 보병 제37여단장 동 소장이 주도하였다. 동지대는 회녕 등지에서 용정 방면으로 침략을 시도하여,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일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 ‘초멸’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대장은 10월 16일 국자가 및 천보산, 두도구에 각 1부대를 파견하였다. 국자가 방면에는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관총 1소대의 석총 대대를, 천보산 방면에는 보병 제73연대 제2대대, 기관총 1소대의 반야대대를, 두도구 방면에는 보병 제73연대 제3대대의 중촌대대를 파견하였다.
동지대는 10월 17일 밤 기관총을 지닌 약 5, 6백의 독립군이 두도구 서남 약 10리 청산리 부근 곡지에 있다는 정보를 얻어 산전토벌대로 하여금 수색하여 습격하도록 하였다. 21일 ‘토벌대’는 밀림 중에 숨어있던 독립군을 찾고, 부근 여러 마을을 초토하여 49명과 대한독립군 10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지대 주력은 10월 18일 저녁 홍범도가 인솔하는 약 500명이 두도구 서방 산중에 있다는 사실을 첩보하였다. 그 후, 이도구로 이동하여 남 · 북 완루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 섬멸하려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동지대는 독립군의 매복과 기습에 당하여 참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청산리 대첩이다.
국자가 방면에 파견된 부대는 1920년 10월 19일 학성 ·강역동에서 국민회 통신원 및 간부 6명을 총살 혹은 사살하였고, 10월 20, 24일에는 일양구에서 의군단원 등 10명을 사살하였다. 27기병연대는 22일 어랑촌에서 김좌진 휘하의 사관생도대를 간부로 하는 약 3백 명과 교전하여 60명의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기병대대는 어랑촌 오도양차도를 봉쇄하여 25일 밤 12시 야습을 감행하여 독립군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사단뿐만 아니라 포조파견군 중 일부도 간도 침공에 앞장선 일본군 제19사단과 협력하여 간도를 북쪽과 동쪽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간도 지역 침공에 나선 포조파견군 부대는 포조파견군14사단 예하 28여단과, 제11사단 토문자지대와 제13사단 우입지대였다.
포조파견군 제14사단 예하 28여단의 보병 제15연대와 제66연대는 1920년 10월 22일부터 30일 사이에 포시에트에 상륙하였다. 22일 제15연대 중대대장의 지휘하는 2개 중대는 용정촌을, 또 1개 중대는 회령을 향하여23일 출발하였다. 용정촌에 도착한 2개 중대(15연대 제3대대)는 29일 수칠구를 포위하여 4명을 체포하였고, 30일 오전 6시 장암(국자가 남동 약 3리)을 포위하여 20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기독교 학교 1곳, 사립학교 및 가옥 10호를 소각하였다.
28여단 주력은 11월 2일 혼춘을 출발하여 양수천자를 거쳐 국자가에 들어와 당시 동지대의 청산리 방면 ‘초토’와 목촌지대의 조양하곡의 ‘초토’를 지원하기 위해 국자가부터 알하하 사이에서 잠시 대기하였다. 그 후 용정촌을 지나 회령에 들어간 후 11월 22일 나남에 집결하여 우품으로 귀환하였다.
19사단과 함께 호응하던 포조 파견군 중 제11사단 토문자 지대와 제13사단 우입 지대, 안서 지대 등은 다음과 같이 침공해 왔다. 우선 제11사단 토문자 지대는 10월 19일 바라바시를 출발하여 국경을 넘어 10월 20일 이후에는 기림 지대와 함께 초모정자, 토문자 부근과 그 북방지구를 지속적으로 습격하였다.
지대의 주력은 10월 23일 상초모정자, 24일 청니와 부근, 25일 토문자남방 약 2리 대평천 및 이수구 부근을 습격하여 한인 9명을 포획하고 1명을 사살하여 신민단의 구병사를 파괴하였다. 그 후 다시 초모정자, 왕팔발자 일대를 습격하여 독립군 간부 6명을 체포하고 소총백 탄약 3천여를 압수했다. 토문자 지대는 토문자를 중심으로 훈춘의 북동부 지방을 19사단과 함께 습격하였다. 이렇게 일대를 습격하던 지대는12월에 이를 일단락하고 12월 15일 모두 러시아령으로 돌아갔다.
제13사단 우입 대좌가 지휘하는 우입 지대는 10월 27일 기림지대에 속하는 ‘아부토벌대’의 일부가 노모저하 부근에서 벌인 전투에 참가하여 독립군을 퇴각시켰다. 또한 ‘아부토벌대’와 연계하여 수분대전자 남북지구를 습격하였다. 그 후 11월 12일 사단명령에 의해 이도구를 거쳐 이십팔도하자로 전진하여 안서지대와 호응하고, 대소수개하곡를 습격하여 12월 20일을 전후로 전부 노령으로 돌아갔다. 우입대좌는 기림지대 ‘아부토벌대’와 함께 나자구 인근의 독립군과 독립군 기지를 습격하였고, 북만주파견군 안서지대와도 협동작전을 감행하면서, 작전지역을 이동해 나간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북만주 파견대가 북간도를 침공해왔다. 북만주 파견대는 안서소좌가 지휘하는 안서지대로서, 10월 16일 해림에서 집결하여 11월 9일 금창방면을 침공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관동군은 북간도 지역 침공을위해 장작림과 교섭하여, 10월 17일에 이르러 일본군의 봉천성내 ‘토벌’을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지협동토벌에 관한 원칙’에 근거하여 10월 23일 ‘무력행군’이라는 명목으로 서간도지역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 침공에 동원된 병력은 관동군 소속 철령 보병 제19연대와 공주령 기병 제20연대로서 총 1,200명에 달하였다. 관동군 부대는 북간도 지역의 침공 후 서간도 지역을 침공하여 서간도의 독립군 기지와 한인 마을을 습격하는 한편 북간도 지역 초토를 피해 온 독립군과 한인 ‘토벌’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