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의 넋을 빼앗아 버린 압록강의 총소리, 사이토 총독 습격 사건

한자 朝鮮總督의 넋을 빼앗아 버린 鴨綠江의 銃소리, 사이토 總督 襲擊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사건 참의부독립군의 사이토 총독 습격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사건발생지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 강변
정의

참의부(參議府) 독립군이 1924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습격한 사건.

개설

사이토 마코토는 3·1 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조선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조선인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그를 저격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부임하는 당일 강우규에 의해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압록강한·만 국경에서 참의부 대원들에 의해 일어났다.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35년은 식민지 시대라기 보다는 치열한 항일투쟁기라고 기록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기득권층과 명망가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협조했지만, 더 많은 독립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시기였기 때문이다.

독립투쟁 방법 또한 다양했다. 국외로 망명해 외교를 통한 독립을 꾀하거나 무장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안중근·이봉창·윤봉길 등의 의사가 있었고 이회영·신채호·박은식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은 일본의 정계와 여론에 큰 충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고양되고 있던 데모크라시와 반군국주의 분위기에서 접하게 된 3·1 운동은 조선 총독의 무단통치에 대한 비판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무단 통치에 대한 비난은 자연히 무관 총독 문제와 결부되어 식민지 총독 무관 전임제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문제가 전례 없이 대규모로 논의되었다.

3·1 운동의 발발로 무단 통치와 무관 총독은 개혁되어야 할 식민정책의 상징이 되어 시정을 요구하는 국내외 여론이 비등했다. 이런 가운데 군부는 제3의 대안으로 전 해군 대신 사이토를 조선 총독으로 추천했다. 사이토는 육군 대신에 이은 해군 대신과 총리의 삼고초려 끝에 제의를 수락했다.

191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가 일어난 지 10년째, 3·1 운동 독립투쟁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 전의 서울남대문역에서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있었다. 피폭당한 자는 일제의 새 총독이었고, 폭탄을 투척한 사람은 조선인 강우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강우규의 나이 65세로 백발성성한 노인이었던 것이다.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안중근이 30살, 윤봉길 24살, 이봉창이 32살이었다. 65세 노인인 강우규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던진 폭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 역두,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인파들은 넘쳐나고 이날의 경계는 실로 삼엄했다. 당시 분위기를 잘 알려주는 기사가 전한다.

‘이날의 시민 간에는 유언비어가 성행하여 남대문 역부터 가로까지는 수만의 군중이 술렁술렁 우왕좌왕하며 알 수 없는 의구불안의 공기가 쌓여 있었다.’

해군 제독 출신의 3대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는 3·1 운동 이후 바뀐 식민정책에 따라 신임 조선 총독에 임명됐다. 남대문역 앞에는 총독을 관저까지 태울 쌍두마차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해군 제복을 입은 사이토 총독은 일장기가 휘날리는 군중 사이를 지나 자신이 타고 갈 마차 쪽으로 접근했다.

강우규는 5일 전부터 남대문 역을 사전 답사한 후,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두르고 귀빈실 출입구 옆쪽 인력거 하치장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신동아’에 기록된다. 마지막 예포가 발포되고 총독이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마차 7보 앞에 불기둥이 일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대문역 광장을 뒤흔든 폭음 소리, 이는 3.1 운동 이후 최초로 국내에서 벌어진 무력 독립 투쟁이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사이토 총독을 실은 마차는 현장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폭발로 인한 사상자는 37명. 한일 양국의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총독은 허리띠에 찬 대검에 파편이 박혔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 뒤 15일 후인 9월 17일, 가회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강우규는 검거되었다. 수형기록카드의 범인은 65세로 고령이었다. 그의 직업은 매약상으로 한약방을 하며 환자를 돌보고 있었으며, 사립 동광 학교를 창립해 교장직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독실한 신자로 장로회 신자라고 기록되고 있다.

강우규의 폭탄 투척 현장에는 각국 대사들과 많은 외국 언론도 참가하고 있었다. 사이토 신임 총독의 부임은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움직임 이후의 새 총독이라 관심이 집중되었고, 강우규는 바로 이곳에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비록 총독을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강우규의 가사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으며, 그의 재판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기록원 문서 수장고에는 강우규 의사의 재판 판결문이 보관되어 있다.

첫 공판 이후 두 번의 항소, 판결문은 모두 세 가지가 전하는데 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인 셈이다. 1920년 2월 14일 의거 5개월 후, 경성 지방 법원 7호 법정에서 강우규 의사의 첫 공판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방청객이 모여들었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법정이 혼잡해지자 임시구류까지 하는 등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반 시민들 이에도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 등 해외 인사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판이 시작됐고, 법정에 등장한 강우규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훤칠한 키, 당당한 풍채, 그리고 성성한 백발과 빛나는 눈빛… 강우규 의사는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이런 고얀 놈!! 피고라니! 니들 나라엔 법도도 없더냐?”라며 판사에게 호통을 치는 등 거침없었다. 판사나 검사가 반말로 질문하면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법정에서 의자를 집어 던진 것만도 두 차례나 되었다.

65세 노지사의 용기는 실제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국망이라는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온 몸으로 경험하며 그는 늘 청년들에게 부채의식을 지고 살았다.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죽음마저도 조국의 미래인 청년에게 바치고자 했던 진정한 독립 투사였다. 그리고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운명을 마감한다.

사이토 총독의 식민통치

조선의 문화와 문물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선의 사서와 서적을 수십만권 불사른 데라우치의 경우와는 다른 정책을 쓰려고 위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쳐 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고, 결과로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후,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1919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일선융화(日鮮融和)’·‘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 아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정책의 변화를 구하였다. 한마디로 “문화적 제도의 혁신을 통해서 조선인을 가르치고 이끌어 그 행복과 이익을 증진하고, 장래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에 따라 궁극적으로 정치상·사회상의 대우도 내지인과 동일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통감부시기를 거쳐서 10여 년간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 식민 지배 방침을 변경시킨 조선을 보고, 조선의 오랜 역사와 관습은 물론 그것이 조선인들 속에서 작용하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랜 역사와 관습을 갖고 있는 조선을 급격히 개혁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사이토가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점진적으로 조선인의 의식과 관습을 바꾸어가는 방식으로 지배할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19년 3·1 운동 직후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앞세워 조선인을 회유하는 한편, 국내 치안 및 한·만 국경에 대한 순찰을 강화해나갔다. 어느 정도 치안 유지에 자신이 붙은 사이토는 1924년 5월 19일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을 거느리고 한·만 국경을 시찰하기로 했다.

참의부와 마시탄 사건

사이토가 한·만 국경을 시찰하기로 하였을 당시 압록강을 무대로 참의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경신참변 이후 남만주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군단들의 활동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22년 통합 군단인 대한 통의부가 성립된 이후부터 1924년 초 참의부가 성립될 때까지는 통의부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1924년 11월 통의부·광정단·서로 군정서 등 남만의 8개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될 때까지는 통의부와 참의부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정의부 성립 이후부터는 참의부정의부의 무장 활동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항일 무장 투쟁을 단체의 존립 목적으로 한 참의부는 독립군의 병력을 국내진입이 쉬운 압록강변에 집중 배치하였다. 특히 평안북도 초산·위원·만포진·자성의 대안인 집안현은 참의부의 주요 군사 근거지이자 활동 무대였다.

따라서 성립 초기 참의부의 5개 중대 중 3개 중대 제1·2·4 중대가 집안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2개 중대는 집안현과 접해있는 환인현 제3중대과 통화현 제5중대에 배치되었다. 이들 각 중대의 병력은 중대당 150명 정도로 이들 또한 한 지역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소대별로 주변의 여러 지역에 나뉘어 분산 배치되었다.

분산되어 있는 근거지들 사이에는 중간 중간에 형성되어 있는 한인마을에 통신원을 파견하여 그 곳에 일정기간 머무르게 하여 주변의 정세를 파악하게 한 후 본부로부터의 연락사항이나 일본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신속히 연락하도록 하는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이런 형식으로 한인마을에 특파된 통신원들은 중대 또는 소속부대에서 작전계획을 세워 자신들이 있는 지역에 도착하면, 그들을 인솔하여 다음 통신원이 있는 지역까지 안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계속 인계 받은 통신원은 또 다시 다음 지역으로 유격대를 인솔해 연계시켜주는 형태를 취해 유격대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압록강 대안을 기반으로 이 같이 치밀한 군사 통신망을 구축한 참의부만주 내에서 중일 군경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지만, 국내 진입 작전을 주된 활동 목표로 하였다. 국내 진입 작전을 시행할 경우 통신원들의 안내로 압록강변에 도착한 유격대원들은 입고 있던 군복 또는 중국 복장을 벗어 버리고 준비해온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도강하여 참의부 국내 통신원의 집에 도착하였고 상황을 판단한 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 마시탄에서 조선 총독 재등실을 공격한 전투는 무장 투쟁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조선 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앞세워 조선인을 회유하는 한편, 국내 치안 및 한·만 국경에 대한 순찰을 강화해나갔다. 어느 정도 치안 유지에 자신이 붙은 사이토는 1924년 5월 19일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을 거느리고 한·만 국경을 시찰하기로 했다.

사전에 사이토 총독이 국경 수비대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 독립군은 사이토를 저격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작전에 나섰다. 참의장 채찬은 제2중대 1소대 대원들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특공대는 총지휘관 장창헌 이하 제1소대장 참사 한권웅(韓權雄)·오장이춘화(李春和)·일등병사 김창균(金昌均)·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여하(金呂河)·전창식(田昌植) 외 8명으로 조직되었다.

제1중대 제1소대장 한권웅은 대원들을 이끌고,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 강변의 만주 쪽 절벽 바위틈에 매복한 채 사이토 일행을 기다렸다. 이날은 중국 경찰 측에서도 경비에 나서 만주 쪽 강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침 9시경 사이토를 실은 순시선이 압록강을 따라 특공대원들이 매복해 있는 지점에 나타났다. 60여 명의 경찰이 동승한 총독 순시선이 다가오자, 한권웅의 사격 명령에 따라 대원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예고 없는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대원들은 절벽 위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혼비백산한 순시선이 전속력으로 사정권을 벗어나는 바람에 사이토를 사살하지는 못했다. 비록 큰 싸움은 아니었지만 〈독립신문〉은 '재등실 영송연(永送宴)'이란 제목으로, 〈경종 警鐘〉은 '왜(倭) 총독 사격 쾌보', '왜 총독 저격사건 문(聞)하고'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여 독립운동계에 적잖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만주 동포사회도 크게 통쾌해했다. 하지만 이 거사를 주도한 한권웅은 후일 일제에 잡혀 사형당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박환, 『항일독립운동 답사기』(국학자료원, 2001)
  • 채영국,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 투쟁』(경인문화사, 2007)
  • 박환, 『강우규의사 평전-잊혀진 의열투쟁의 전설-』(선인, 2010)
  • 윤병석, 「1920년대후기 滿洲에서의 民族運動과 獨立軍」(『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 1989)
  • 채영국, 「1920년대 중반 南滿地域 獨立軍團의 整備와 活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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