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頭滿江·鴨綠江을 건너 朝鮮人이 일군 間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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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지명 | 19세기 중엽이후 조선인들이 건너가 개척한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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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9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0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5년 이후 |
| 지명 | 중국 요령, 길림, 흑룡강성 |
개화와 외압에서 시작된 한국 근대사는 전통적 지배층이 보수 반동적 관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외압에 휘말려 나라와 민족을 파멸로 몰고 갔다. 영세 농민인 피지배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았다. 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 만주와 러시아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그곳을 한인의 ‘신천지’로 삼아 생활 토대를 마련하고 나아가 독립운동 기지의 토대를 만들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의 이주 개척지는 고대 이래로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져 왔던 민족의 활동 무대로서 고대 문화를 형성하였던 민족의 옛 땅이었다. 그곳은 또한 지리적으로 강 하나만 건너면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에 대규모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중국 안의 한민족인 ‘조선족’의 원형이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주한 한인들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지칭하는 간도는 백두산의 동북방,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와 백두산의 서남방,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국외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던 북간도는 연길·화룡·왕청의 3현과 훈춘현 등 4개의 현이 중심이 되었으나, 넓게는 액목·돈화·동녕·영안 등 4현도 아울러 지칭하기도 하였다.
북간도에는 주맥인 노야령(老爺嶺) 산맥과 흑산령(黑山嶺) 산맥에서 뻗어나간 지맥들로 형성된 무수한 구릉과 분지가 있고, 부루하통하[希爾哈通河]·해란강·가야하[嘎呀河]·두만강 등 4대 하천을 젖줄로 하여 골짜기마다 한인의 개간 농경지가 펼쳐졌다.
북간도의 하천 중에서도 부루하통하와 해란강이 큰 편이다. 해란강은 백두산에서 동북으로 뻗은 장백산맥이 흑산령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청산리에서 발원한 후 동쪽으로 흘러가 두도구(頭道溝)와 용정촌을 지난다. 부루하통하는 서 노야령 산맥의 가운데 위치한 합이파령(哈爾巴嶺)에서 발원해 명월구(明月溝)와 토문자(土門子), 그리고 동불사(銅佛寺)를 거쳐 북간도 제일의 도시인 연길의 마반산(磨盤山)에서 해란강과 합류한 뒤 도문에서 다시 두만강과 합류하게 된다.
한편 북간도와 대칭을 이루는 서간도는 백두산 서남쪽, 압록강 너머의 혼강(渾江), 파저강 또는 동가강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중상류 지역까지 아울러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서간도에는 집안·통화·유하·회인·관전·임강·장백·무송·안도·흥경·신빈·해룡 등의 여러 현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가 깃들여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발흥지로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그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는 환도산성·오녀산성을 비롯하여 광개토대왕비·장수왕릉 등 고구려의 위업을 상징하는 유적·유물들이 분포되어 있다.
서간도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산간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백두산 서쪽으로 장백산맥이 가로놓여 있으며, 요동 반도에는 반도의 주맥인 천산산맥(千山山脈)이 이어지는 등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다. 그러면서도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禿魯江)·자성강(慈城江)·혼강 유역에는 충적 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제외하고는 표고 1,000m 내외의 기복이 완만한 노년기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국경 지대를 넘으면 산지와 구릉에 둘러싸인 표고 200m 미만의 평원이 펼쳐진다.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에서 온난한 편에 속하며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비교적 적합한 조건을 구비하였다.
서·북간도 도처에 평야와 분지, 그리고 구릉지를 따라 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개간농경지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조·옥수수·고량·기장·콩 등의 밭농사도 크게 성행했지만, 이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농업은 역시 하천유역의 저지대와 습지에서 일으킨 벼농사였다. 이주 한인이 시작한 벼농사는 후일 만주 농업경제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주곡으로 등장할 정도였으며, 그 전토의 대부분은 한인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개간되었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와 한인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조선 왕조 말에 조성된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었다. 그 이전에도 변경 지대의 한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출가이민(季節出稼移民)’을 하였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조선 후기 정치 기강의 해이와 탐관오리의 발호, 그리고 빈발하는 민란 등도 도강 이주를 촉발시킨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정조 이후 노론이 득세하면서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가 자행되고 있었다. 외척 권신들이 왕명의 출납에서부터 인사행정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파행적인 인사행정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고 국가 기강은 날로 해이해져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상징되는 탐관오리들의 대민수탈이 누적되면서 민중의 생활고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삼남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란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민중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상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서북간도는 한반도와 연접해 있어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변경지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주 여정이 용이하고, 국내와 비슷한 산천지형이 낯설지 않아 서북지방의 빈민이 쉽게 간도로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한인의 간도 이주를 급격히 촉발시킨 계기는 서북 지방을 휩쓴 1869년 대재해부터였다. 1869~1871년간에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을 비롯한 서북 지역에 사상 유례가 없는 대흉년이 들었다. 당시 겨우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던 서북 지방의 주민들은 영양 부족으로 얼굴이 누렇게 되었고 몸은 퉁퉁 붓거나 풀독에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제대로 구휼책도 강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빈민들은 정치적·사회적 처지와 입장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다만 연명을 위한 방책으로 국금(國禁)을 무릅쓰고 도강 이주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洪南周)는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두만강 대안 간도 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향호(鄕豪)인 이인회(李寅會)로 하여금 주민들을 권유하여 월강원서(越江願書)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수개간(引水開墾)을 월강 명목으로 설정하도록 하고 두만강 대안을 ‘사잇섬’ 곧 간도(間島)로 명기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간도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인회는 부사 홍남주의 부탁에 따라 월간사업(越墾事業)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는 주민 다수를 동원하여 인수개간원서를 부사에게 제출하였고, 부사는 즉시 수락하는 허가를 내리면서 개간을 위한 도강 이주가 합법적으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동안 국법으로 도강을 금지하던 간도지역에 대한 개간 허가 소식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군읍도 호응하였다. 빈민들의 도강 이주가 급증했고, 이주민의 수도 격증하면서 황무지도 매우 활발하게 개척되어 갔다. 그리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100여 정보의 황무지가 개간되었을 정도로 급격하게 농경지가 늘어났다.
이러한 한인의 간도 이주를 행정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해준 인물이 1883년 서북경략사에 임명된 어윤중(魚允中)이었다. 그는 회령 등지의 변경지대를 순회하면서 간도 개간문제를 직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월강 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越江罪人不可殺).’고 하며 종래의 변방정책을 수정해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간도의 개간지에 대하여 토지 소유권을 정부 차원에서 인정해주는 문서인 ‘지권(地券)’을 교부하여 한인의 간도 이주를 실질적으로 승인해 주었다.
한편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청 정부 측에서도 밖으로 러시아의 거센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간도개척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따라서 한인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883년 조선과 길림성 당국간에 체결된 「조길통상장정(朝吉通商章程)」에 근거하여 청 정부에서는 1885년 화룡욕(和龍峪), 현 용정시지신향(智新鄕)에 통상국을 설립하고 광제욕(光霽峪, 현 용정시 광개향 광소촌과 서보강서보강, 현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분소(通商分所)를 설립하였다.
통상국을 설립한 목적은 경제적인 수익보다도 이주 한인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당시 간도에는 성현(省縣)의 지방 관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상국이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까지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어 세 곳의 통상국 분소를 월간국(越墾局)으로 고치고 두만강 이북으로 길이 700리, 너비 50리 되는 광범위한 지역을 한인 이주민을 위한 특별개간구로 획정하였다. 이 결과 한인 이주민의 수는 더욱 급증하게 되었다.
북간도 이주 초기 단계에서는 한인들이 두만강변의 무산·종성·회령 등지에서 도강한 뒤 강 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해란강 이남 일대, 곧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 중 대표적으로 한인촌락이 형성된 사례가 명동촌(明洞村)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한인들은 더욱 멀리 북상하여 해란강을 건너 부루하통하와 가야하 이북과 이서 지방으로 깊숙이 이주 정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북간도 도처에 한인마을이 자리잡게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와 이주 한인의 간도 개척은 내강(內江) 혹은 마도강(馬刀江)영안이라고도 부르는 오지에까지 미쳐 황무지를 개척하는 추세가 급증하였다. 따라서 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촌락이 형성되었고, 간도 일대에는 의관문물이 마치 국내와 흡사한 양상을 띨 만큼 크게 변모하였다.
한인들이 북간도에 이주 정착하게 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북간도 한인들이 처음으로 수전농을 실시한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의 용정시 개산둔진(開山屯鎭) 천평 일대와 용정 부근 해란강변의 서전대야(瑞甸大野)일대가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1860년대 이후부터 일제의 대한 침략이 심화되는 1905년 을사늑약 이전까지는 한인들이 대체로 이와 같은 이유와 배경 하에서 서북간도 이주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이주민 가운데서는 북간도의 경우에는 함경북도, 서간도의 경우에는 평안북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1894년에 실시한 재만 한인동포의 출신지 조사에서도 조사대상 인원 65,000명 가운데 함북 출신이 32,000명, 평북 출신이 14,400명이었고, 1904년에는 78,000명 가운데 함북 출신이 32,000명, 평북 출신이 23,500명이었다. 통계숫자로 보더라도 간도에 이주한 한인 가운데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의 함북과 평북 출신이 70% 이상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간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간도에 한인이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다. 청이 봉금령을 선포한 후에도 서북 지방 변경 주민들은 월경죄를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이주를 단행한 사례가 있었다. 그 중에서 1831년경 임강현(臨江縣)의 모아산(冒兒山) 북방으로 한인 두 가구가 이주한 것이 그 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1845년 이후 봉금령이 느슨해지자 평안도 변경 주민들은 압록강 대안 임강현 일대의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1849년에는 충청도 출신 몇 명이 후창군의 대안 삼도동(三道洞)으로 이주하였고, 이듬해에도 7도동에 십 수명의 이주가 있었다. 또 1852년에는 함경도 단천 주민 10여 명이 노령하(老嶺下)로 이주한 것이 그 사례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추세에서 1869년의 기사년 대재해는 북간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간도 이주의 큰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기사년 이후 3년 동안에 평안도 출신의 한인 이주민이 6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서간도로 이주한 것이다. 이로써 서간도에도 대규모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72년에 기록된 『강북일기(江北日記)』에 의하면, 1869년에 한인들이 대거 이 지방으로 이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주민의 대부분이 본적지를 무산·후창·초산·강계·영변·선천 등지로 밝혀 평안도 출신이었다. 이에 강계군수는 정부의 명도 받지 않고 한인의 월경을 인정하고 서간도 일대를 28개면으로 분할하여 평안도의 행정구역으로 연장하여 그 중 7개 면을 강계군에, 8개 면을 초산군에, 9개 면을 자성군에, 나머지 4개 면을 후창군에 배속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청은 1875년 서간도의 봉천성 현재 요령성에 대한 봉금령을 정식으로 폐지한 뒤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인의 서간도 이주는 합법적이고도 대규모로 단행될 수 있었다.
1897년에 통화·환인·관전·신빈 등지로 이주한 한인이 이미 8,722호에 3만 7천 명이나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이주 한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1897년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로 임명하여 서간도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북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1900년에 변경지방을 순시하고 이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서간도지역을 적절히 배분하여 후창·자성·강계·초산·벽동 등 각 군의 관내에 배속시키는 한편 이주민에게 호세로 30전을 상납하게 하였다. 이도재는 또 압록강 연안의 각 군에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여 비도(匪徒)의 작폐를 막게 하였다. 충의사는 이택규(李澤奎)가 사장으로 있으면서 서간도지역에서 이주민의 안전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고 지방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 뒤 1902년에도 정부에서는 서간도지역에 의정부 참찬 이용태(李容泰)를 보내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1903년 5월에는 양기달(楊技達) 등을 파견해 서간도 일대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때 한인 이주민의 수는 장백·임강·집안·통화·환인·관전·단동 등지에 속하는 32개면에서 총 9,754호, 45,593명에 달하였다.
서간도 한인 이주는 북간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05년 이후 더욱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망명이 동기가 된 민족주의자들의 이주 경향도 뚜렷하였다. 의병전쟁이 탄압을 받게 되면서 의병계열의 인물들이 북상 망명하게 되고, 신민회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당면 목표로 서간도로 집단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때 압록강 하류지역에서 서간도로 이주한 경로는 안동(安東), 현 단동에서 육로로 관전·환인·통화·유하현을 거친 뒤 점차 길림 또는 장춘 등 내륙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상룡(李相龍)의 『석주유고(石洲遺稿)』에 의하면 1913년에 서간도를 포함한 봉천성 관내에만 28만 6천여 명의 이주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초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대개의 경우 청의 심한 압제를 받으며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갔다. 청은 서간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제반 행정기구를 증설함으로써 이주 한인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청 정부는 이주 한인의 황무지 개척을 장려하는 토지대 납부를 통하여 그 소유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한인의 이주 정착을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변발호복(辨髮胡服)을 강요하고 청국 입적을 종용하였다. 이에 대다수의 한인은 치욕을 참으며 머리를 땋아 올리고 중국옷을 입는 ‘변장운동(變裝運動)’을 벌여 청의 압제를 피했지만, 그 심적 고통은 극심하였다.
게다가 한인들에게는 각종 세금이 과중하게 부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총 30여 종에 이르는 잡세 가운데는 민족차별의 성격을 띤 것이 적지 않았다. 한인들이 논농사를 하고 소를 사육한다고 하여 ‘수리세’와 ‘소사양세’를 부과하였으며, 또 관청에 드나드는 ‘문턱세’, 남에게 고용된 이들에게 부과되는 ‘고용세’, 그리고 ‘인두세’, ‘굴뚝세’, ‘소금세’, ‘입적료’ 등을 바치는 경우도 생겼다. 게다가 중국 지주들의 착취도 극심해 소작료가 3~4할, 혹은 5할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혹한 착취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겨웠으며 살림은 비참하였다.
서간도 지역의 한인사회는 처음 파저강(波猪江)이라고 부르던 혼강(琿江)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전농을 위한 경작지 확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주 한인들에 의한 벼농사는 1840년대부터 혼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861년에는 안동의 삼두랑두에서도 벼를 심었으며, 1875년에 통화현 하전자 한인들은 소택지와 늪지를 개간하여 벼를 시험적으로 재배해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다.
1880년에는 안동의 당산성과 봉성현 소만구 지역의 한인들이 유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통화의 상전자·하전자·소만구, 유하의 삼원포, 신빈의 왕청문, 안동의 당산성·삼도랑구, 봉성의 사리채 등지는 한인들이 비교적 일찍 수전을 경작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00년 무렵 유하현에 거주하던 일부 한인은 해룡·동풍·서풍·개원 등지로 다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1908년경 이들은 다시 영길현으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으며, 이후에도 송화강과 휘발하를 따라 점차 휘남·반석·교하 등지로까지 지역을 넓혀 갔다.
이와 같이 1910년까지 서간도에서도 수전의 대부분은 이주 한인들이 개간한 것이다. 밭농사를 위주로 하던 서간도에 한인들이 들어가 수전농을 개간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력 증진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신의주 대안의 안동현과 봉성현, 그리고 관전현은 양국의 교통로에 해당되어 일찍부터 한인의 내왕이 잦았던 지역으로 한인 이주가 초기부터 집중된 지역이다. 1904년의 이주 한인수를 보면 안동·봉성현이 420호에 1,420명, 관전현이 770호에 3,720명으로 조사되었다.
1905년 이후에는 이주민이 더욱 증가하여 안동현의 시가지에 모여 사는 경우도 있었다.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어 안봉선이 개축되자 한인들의 서간도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1921년 현재 안동·관전지역의 한인들 인구는 1911년에 비해 4.5배나 증가하였다.
통화현의 경우 한인 이주는 189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혼강의 우안 동강촌에도 한인에 의해 수전이 개간되었고, 혼강의 좌안 동강 지류 이밀하(二密河) 연안지방과 흥경가도(興京街道) 지방에도 한인 이주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12년 현재 통화현의 한인수는 2,055호에 10,275명에 달하였다.
환인현의 한인 이주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비적이 횡행한 까닭에 이주민의 수가 여타 지역에 비해 많지 않았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일면성(一面城)·횡도천(橫道川)·상루하(上漏河) 등지가 대표적인 한인 거주지였다. 1907년 현재 한인의 수는 514호에 2,005명 정도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유명한 유하현 일대에도 이미 188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한인 이주민이 정착하고 있었다. 삼원포(三源浦)와 대두자(大肚子)·마록구(馬鹿溝) 등지가 그 중심지였으며, 1905년경에는 유하현 시내에도 들어와 거주하였다. 유하현 일대는 벼농사에 특히 유리한 지역으로 알려져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한인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왔다. 이들은 대사탄(大沙灘)과 삼통하(三通河)의 원류 지방인 남산(藍山)과 상류 지방인 고산자(孤山子)·대우구(大牛溝) 등지에 거주하여 수전을 일구었다. 1912년 현재 한인 인구는 1,062호에 5,356명으로 집계되었다.
신빈현의 경우에도 1900년경 신빈보(新賓堡) 부근의 각지에서 한인들은 수전을 일구며 정착하였다. 그 후 안봉선의 개통 후에는 경상도 출신의 한인들이 무순을 거쳐 왕청문(旺淸門)·두도구(頭道溝) 등지에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만주는 현재 중국의 동북 3성 중 흑룡강성 일대를 지칭한다. 북만주는 북쪽으로 흑룡강, 동쪽으로는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시베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내몽골자치구와 연결되고, 서남쪽은 장춘·길림 등지와 접하며, 동남쪽으로는 돈화·연길로 북간도와 연접해 있다. 흑룡강성의 중심은 하얼빈이며 이곳을 거점으로 동지철도 연선지역과 송화강 유역이 전개된다.
서북간도의 연장으로서의 성격을 띤 북만주는 한인사회의 형성 시기가 서북간도보다 뒤질 뿐만 아니라 인구 또한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한인사회가 여러 곳에 점점이 산재된 형태로 형성되었다. 북만주 중에서도 이주 한인 사회와 가장 관련이 깊은 지역은 동지철도 동부선 일대와 송화강 유역의 여러 곳들이다. 특히 송화강 하류 일대의 요하·밀산·호림·의란·방정 등지는 한인들이 개척하기 전에는 인구가 희박하고 농경보다는 수렵이 주가 되었던 곳들이다.
북만주 최초의 한인촌으로 알려진 곳은 1869년 대 재해 무렵부터 이주가 시작된 동녕현 삼차구(三岔口), 곧 고안촌(高安村)이다. 이곳으로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해오면서 1913년부터는 ‘고려인이 편안하게 거주한다’는 뜻을 지닌 고안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훈춘이나 노령에서 대수분하(大綏芬河)나 대두천하(大川河)를 거치는 경로는 동녕을 경유하여 영안(寧安)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영고탑이라고도 불리는 영안은 북만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며, 그 주위에 동경성·신안진·황기둔 등 이주 한인촌이 여러 곳에 형성되었다.
북만주지역에는 중국 정부의 행정 통제력이 비교적 약하였고, 만주국 성립 이전까지는 일본 영사관의 경찰력도 별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지역이었다.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된 한인 사회가 192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북만주는 광대하여 이주 한인 사회도 널리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북만주 이주민들은 이미 연해주와 서북간도 등지에서의 이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최초 이주지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그 타개책으로 재차 이주를 결행한 경우가 많아 경제적으로는 보다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북만주 가운데 1910~1920년대에 한인 사회가 형성된 중요지역으로는 1천여 명의 한인사회가 형성된 하얼빈을 중심으로 그 외곽 취원창(聚源昶) 일대, 중동선 연변의 아성(阿城)·오상(五常)·서란(舒蘭)·주하(珠河) 일대, 그리고 고안촌을 중심으로 한 동녕지방 등지를 들 수 있다. 1924년 현재 북만주 한인 인구는 대략 3만 명 정도로 집계되고, 북만주 전역에 걸쳐 비교적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길림·액목·영안·목릉·동녕현 등지에 2~5천 명의 한인 이주민이 비교적 밀집해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