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5현의 교육 이야기

한자 明東 5賢의 敎育 이야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학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
정의

일제 강점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서 남종구(南宗九),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김하규(金河奎), 김정규(金貞奎) 등 명동 5현이 명동촌을 건설하고 명동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실시한 이야기.

개설

북간도 명동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곳이다. 시인 윤동주의 후광으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명동은 이미 한 세기를 넘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명동을 누가 개척했을까?

지금도 명동에 가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명동 교회 옛터가 우리를 반긴다. 이미 오랫동안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한 건물이지만 지금은 명동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소박한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재린(文在麟), 윤동주(尹東柱), 문익환(文益煥) 등의 얼굴도 있지만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 다섯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들이 바로 남종구, 문병규, 김약연, 김하규, 김정규로 명동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명동 5현이다. 명동 5현은 함경북도 종성, 회령 일대에서 북간도로의 이주를 결심했고 이주와 동시에 교육을 강조하였다. 명동 5현의 교육 이야기야말로 북간도 근대 교육 이야기의 서막이라 하겠다.

북간도 명동은 조선인이 이주한 뒤에 비로소 명동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불굴라재 또는 동가 지방(董家地方)으로 불렸고, 혹자는 따라즈라고 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불굴라재[현재의 중국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로 이주하면서 천 일경(日耕)의 토지를 사들였고 그 땅에 동쪽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그 조선인들은 여느 이주 조선인과 달랐다. 그들의 이주는 단순히 생계만을 위한 이주가 아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명동이라는 의미 있는 이름이 생겨날 수 있었고 또 명동 5현의 활약도 가능했다. 그들의 이주와 개척, 후대 교육 등 모든 것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의식적인 노력에 대해,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주를 결심하다

고향을 영영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 정든 것도 있겠지만 새로운 곳에서 살 앞날이 그리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명동에 처음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25세대, 다섯 가문, 통역 1명으로 구성된 142명의 이민 집단이었다. 규암김약연의 전주 김씨집안 31명, 소암김하규의 김해 김씨집안 63명, 성암문병규 집안에서 40명, 여기에는 문병규의 외손인 김정규 김씨 가문이 포함되었고, 규암의 스승인 도천남종구 가문에서 7명이었다. 한마디로 이 이민 집단은 매우 방대하였다.

이민 집단은 1899년 2월 18일 명동 5현의 인솔 하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의 불굴라재[현재의 중국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왜 이주를 했을까? 방대한 이주민 집단을 이끌고 이주를 결심할 수 있었던 그들의 용기와 결단성의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명동 5현의 학문적 배경을 살펴보자. 함경도 지역, 이를테면 관북의 학문적 진작은 최신(崔愼)이라는 송시열의 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최신을 중심으로 관북에는 오룡천(五龍川) 5현이 탄생한다. 오룡천은 회령, 종성, 경원, 경흥 등 북관의 주요한 곳을 모두 거쳐 동해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오룡천 5현은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 지방 유현들로 최신(崔愼), 한세양(韓世讓), 한몽린(韓夢麟), 남명학(南溟學), 채징은(蔡徵殷)을 가리켰다. 명동 5현은 바로 이 오룡천 5현과 혈연적, 학문적 관계가 있다.

오룡재남명학의 손자인 남대임이 조부를 배향하기 위해 설립한 오룡재사(五龍齋祠)에 최신 등 오룡천 5현을 모두 베향하게 되면서 오룡재사는 희성사(希聖祠)가 되었다. 희성사의 관북 유현들은 회령, 종성 등 지역에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명동 5현은 이들 오룡천 5현의 대표적인 후손이자 후학들이다. 문병규는 오룡재남명학을 사사하여 사제관계가 되었고 남종구는 곧 남명학, 남대임으로 이어지는 남씨 가문의 직접 후손이다. 김약연, 김정규가 남종구의 제자로 되었고 김하규는 이주암을 통해 최신의 학통을 이어받으면서 명동 5현은 명실상부한 오룡천 오현의 학문적 계보를 이어받는다.

그렇다면 명동 5현은 이와 같은 학문적 관계 속에서 어떠한 사상적 입지를 굳혔을까? 명동 5현의 학문적 발원지에는 성리학의 사상이 깃들어 있었지만 성리학이 북관에 뿌리를 내리면서 점차 실사구시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으로 바뀌게 된다. 그 때문에 오룡천 오현도 그랬거니와 명동 5현 역시 과거시험이나 관직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이렇게 성리학으로 출발한 학문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으로 지방 토착화되기까지는 다양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원인도 있다.

하나는 당시 북관 지역에는 수많은 유배인들이 드나들었다. 유배인들은 대부분 사대부로 학자 관료들이다. 유배로 인해 관료적인 신분이 사라지자 그들은 유배지에서 학자의 신분으로 교유, 종유 등 비정규적인 교학 활동을 빈번히 진행한다. 궁극적으로 지방 학문의 진작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유배인들의 학문적 유파는 서로 다양했기 때문에 지방에 미치는 영향 역시 다양하였다. 결국 지방 유생들은 다양한 학문적 유파를 융합 및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들의 학문은 지방을 벗어나지 못한 이상 실사구시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으로 발전되어 갔다.

다른 하나는 실학파의 인물이 직접 유배되는 경우였다. 초정 박제가가 19세기 초 종성에 유배되어 4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역시 여느 유배인들과 다를 바 없이 그의 실학 사상을 북관에 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룡천 오현들은 이들 유배인들과 교류 속에서 점차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을 하게 되면서 오룡천 실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명동 5현에게도 전승되었던 것이다. 명동 5현이 이주의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단연 그들이 전승받은 사상에 연원한다.

명동 5현이 북간도 이주를 결심하던 시점은 동학 운동과 개화 운동이 실패한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명동 5현 중에 김약연이 이 두 혁명에 모두 참가 하였지만 혁명이 결국 실패하게 된다. 시대적 배경과 혁명의 경험으로 명동 5현은 이상 사회 건설을 고민하게 되었고 밤을 새며 토론을 거듭한 결과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이들 명동 5현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이주는 여느 조선인들의 이주와는 달랐다. 그들은 이상 사회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땅을 사들일 재력도 갖추었으므로 생계를 위한 이주도 아니었으며 충분한 고민을 거친 의식적이고도 계획적인 이주였던 것이다.

명동을 개척하다

명동 5현을 주축으로 하는 142명의 이주 집단은 1899년 2월 18일 밤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종성의 상삼봉(上三峯)에서 얼음진 두만강을 건너 자동[현재 용정시 개산툰진 자동], 호천가[현재 용정시 개산툰진 회경], 만진기[萬鎭基, 현재 용정시 덕신향[예전 팔도하자향] 등 지역을 거쳐 불굴라재에 정착하였다.

명동 5현은 땅값 약 1만 냥을 주고 불굴라재의 지주 동한(董閑)에게서 600만 평의 땅을 공동 구입하였다. 이 땅은 대개 천일경이 되는데 각 가문에서 투자한 만큼 분배하였고 그 중 10일경은 학전(學田)으로 남겼다. 사실 명동 5현이 사들인 600만평의 땅 가운데 이미 개척된 땅은 겨우 4~5만평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산지였는데 명동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 산지들이 곡식을 키우는 밭으로 변해갔으며 점차 이주민들의 생활은 안정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명동을 개척함에 있어 명동 5현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던 옛 선비들과 달랐다. 그들은 손수 땔나무를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김약연이 자주 다니던 산을 심지어 김약연의 자를 따서 구룡산이라고 하기도 했다. 규암김약연네 김씨네는 장재촌에, 소암김하규네 김씨 가문은 큰사동에, 문씨네는 학교촌에, 남씨네는 중영촌에 각각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 이제 명동은 지붕에 고추가 빨갛게 타오르는 명실 상부한 조선인 마을이 되었다.

서당 교육을 시작하다

명동 5현이 이주를 결심한 이유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은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땅을 사들이고 분배가 끝나고 학전이 마련되었고 마을이 이루어지고 또 안정이 되자 명동 5현은 서둘러 서당을 열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명동에 이주할 때 명동 5현 가운데 문병규와 남종구는 이미 연로한 몸이었다. 사실 이들 명동 5현은 함경도 종성, 회령에 있을 때도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남종구는 김약연김정규의 스승이였고 사람들은 남종구 선생을 백결 선생이라 불렀다. 남종구 선생은 호가 도천이었으므로 남도천이라고 불렀는데 도포도 안 입고 관도 안 쓰고 그냥 검정 천으로 만든 것을 쓰고 있었다. 옷은 스스로 누덕누덕 기워서 입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남종구 선생의 아들인 남위언 역시 남씨 가문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식이 높았다. 그는 명동에 와서 정착되자 곧 오룡재라는 서재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룡재는 사실 남명학의 호로 남종구의 증조할아버지로 보인다.

문병규는 문씨 가문의 어른으로 명동 이민 집단의 가장 어른이면서 문재린의 증조부였다. 그는 종성에서 동네에서 존경을 받은 분이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툼이나 시비가 생기면 재판을 해주기도 했다. 서재를 가지고 후진 양성을 하기도 했는데 김약연이나 김하규도 모두 선생님이라 불렀다. 문병규 선생도 남명학 선생한테서 배웠다. 문병규 선생은 명동에 이사해서 이듬해인 1900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17일 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당시 명동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하였다.

김약연장재촌에서 자신의 호를 딴 서재 규암재를 개설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약연 선생은 모든 가무 일을 혼자서 감당할 정도로 비교적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서재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농사도 손수 하였고 나무도 직접 하셨다. 특히 칠도구 골짜기의 땅을 개간하기도 하였고 양봉도 하였다. 김약연의 서재에서 공부했던 중요한 인물이 곧 문익환의 선친인 문재린 목사이다. 문재린은 여덟 살 때부터 김약연 선생이 당시 용암촌에서 꾸린 규암재 서당에 다녔다. 2년 뒤 김약연 선생이 장재촌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녔다 한다. 그는 4년 동안 김약연 선생에게서 차례로 천자문을 떼고 사략, 통감 등을 배우면서 한학과 중국 역사를 배웠다. 하지만 김약연 선생은 매우 엄하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문재린 목사는 외우는 것을 잘 못했기 때문에 늘 회초리를 맞았다고 한다.

김하규 선생의 호를 따서 꾸린 소암재도 명동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김하규 선생은 동학에 관여했다가 실패한 실학자였다. 그는 실제적인 학문을 매우 강조하였다. 한학에 밝았고 풍수와 의학도 공부했으며 주역도 공부하면서 백성을 돕는 실용적인 학문을 했다. 처음 북간도에 이주해서는 땅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국을 운영해서 가세에 보탬을 하였다. 김하규 선생의 학식을 모두 알고 있는 터라 약방을 경영했지만 글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후 1902~1903년경에 약방을 그만두고 큰 집을 짓고 정식으로 소암재라는 서당을 차렸다. 소암재에는 20명 남짓이 되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하규 선생은 성격이 청렴 결백하였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원칙을 따지고 뭐든지 대충 넘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매우 엄하여 한번 야단을 치면 무섭게 혼을 냈다. 늘 검소해서 옷은 언제나 베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늘 일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옷은 흙이 묻고 구겨져 있는 때가 많았다. 김하규는 특히 양반들을 매우 미워했다. 양반들이 간혹 서당에 와서는 학생들의 쌀을 한말씩 걷어 가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많이 슬퍼했다는 것이다. 당시 만주에는 이렇게 함경도나 기타 지역의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이 마구 약탈해가는 현상이 있었다 한다.

명동 5현은 이주 정착과 더불어 곧 교육을 시작했고 명동 교육의 기초를 튼튼히 닦기 시작하였다. 당시 명동 서재들에서 사용하던 서책이나 공부에 필요한 재료들은 모두 학전에 나온 소출로 구입하여 장만하였다. 사서삼경 같은 한문과 관련한 책들이 방에 가득히 차 있어서 문재린 등 당시 서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도서관처럼 그 책들을 가져다 보기도 했다. 훗날 명동 서숙이 사실은 이 서재들을 기반으로 설립된 것이다.

명동 서숙을 설립하다

20세기 들어서 명동에도 신학문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체조와 노래가 들어왔고 서당에서는 교육에 대한 토론을 자주 진행하였다. 구학 서재에서 비록 신학문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으로 토론의 방식을 배워 진행한 것이다. 당시 명동 마을에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매우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함경북도 경원에는 김하규 선생의 친척인 김도심이 있었다. 그 부인은 아들을 살리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고 남편이 열병에 걸리자 자기 다리의 살점을 베어 먹여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김도심은 1906년에 북간도 명동의 김하규를 찾아와서 열녀문 신청서를 써 달라고 부탁했고 김하규 선생은 서슴지 않고 정성껏 써주었다. 김도심은 이 청원문을 서울의 오상규 탁지부 국장에게 보였는데 오국장은 만주에 이렇게 훌륭한 선비가 있냐면서 치하해마지 않았다 한다.

그렇게 김하규 선생은 함북흥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오국장이 임명장과 함께 신학문 취지문과 선전문, 다양한 교재와 백로지를 한 짐 보내주었다 한다. 명동의 학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 선전문을 읽고 앞으로는 신학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북간도 일대의 서당들에 통지문을 보내 신학문을 하라고 독려했다. 그러므로 북간도 명동의 서재들에서 처음 신학문을 개시한 것은 1906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06년 용정에 신학문을 하는 서전 서숙이 설립되었다가 1년 만에 폐교한 일이었다. 서전 서숙에서 신학문을 수용한 학자들이 명동으로 들어와서 신학문 전수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처음 신학문을 접한 명동 사람은 바로 김약연 선생의 사촌인 김학연과 김약연 선생의 제자이자 사위인 최기학이었다. 이들의 도움과 명동 학자들의 뒷받침으로 1908년 4월 27일 신식 학교인 명동 서숙이 설립되었다. 서전 서숙의 박무림 선생이 숙장을, 김약연 선생이 숙감을 맡았다. 그렇게 약 10년을 지속되어 왔던 명동의 세 서당이 문을 닫고 모두 명동 서숙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남위언 선생은 한문을 가르쳤는데 후에 이사를 가게 되면서 명동 서숙의 한문은 김하규 선생이 가르치게 되었다. 명동 서숙에서 사용했던 교과서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국어 교과서 다섯 권과 역사책이었다. 수업은 역사와 국어, 체육과 음악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명동 서숙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 서당이 합하여 명동 서숙을 설립할 때 갑반과 을반이 있었는데 한학을 많이 공부한 학생들을 모아서 갑반, 조금 모자란 학생을 모아서 을반을 편성하였다.

명동학교로 명성을 날리다

1909년에 명동 서숙은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1910년에는 명동 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2년과 1913년 1회, 2회에 걸쳐 졸업생 15명을 양성하였다. 사실 명동이 명동으로 불린 것도 명동학교가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명동학교가 유명해지면서 만주와 함경도 곳곳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조선에서 망명한 애국자들도 자주 들리는 곳이 되었다. 작은 지역 명동은 이때로부터 북간도 독립운동의 본산지 구실을 했다. 1911년 봄에는 명동 여학교가 개설되었다. 이는 북간도의 첫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이 여학교로 인해 많은 여자아이들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09년 명동학교에는 정재면이라는 젊은 선생님이 찾아와서 교사가 되었다. 정재면은 숙장이었던 박무림이 추천한 사람이다. 명동에서 교편을 잡은 지 1년쯤 되었을 때 그는 명동학교 및 명동 마을에 기독교를 수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약연을 비롯한 명동의 학자들은 대회의를 열고 또 며칠 동안 심사숙고도 하면서 결국 정재면명동학교에 남기기 위해 기독교를 수용한다.

명동 마을에서는 이 기독교 수용 때문에 갈등과 고민을 거듭한 듯하다. 그때까지 고수해왔던 상투를 잘라 버려야 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걸리는 것이 제사 문제였다. 전통과 신학문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하던 명동 학자들은 끝내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시세의 흐름인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명동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명동 학자들 가운데 유독 김하규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말리지 않았지만 본인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사적으로 방어하였다. 그는 아마도 제사의 끊을 놓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1911년 이동휘의 명동 방문과 사경회의 개최는 명동 사람들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을 준다. 바로 여자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주장한 것이다. 사실 김하규는 자기의 딸들에게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을 만큼 여자들에 대한 교육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김하규는 기독교가 명동에 들어온 3년 뒤에야 기독교 사상을 제대로 수용하였다. 그는 그동안 기독교와 유교가 무엇이 다른지 꼼꼼히 따져보고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인하였다. 사실 그에게는 매우 유력한 설득 논리가 필요했던 것인가 보다.

결국 김하규의 노력으로부터 우리는 명동의 학자들은 무작정 과거를 포기하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명동 사람들은 전통적 유학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실학과 유학 사상을 전제로 기독교와 성경을 이해하였고 민족을 살려야 한다는 민족 정신을 기반으로 기독교 사상을 수용하였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기독교를 활용하고자 했다. 당시 북간도에서는 민족 운동과 교육을 위해 마을 전체가 단체적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명동학교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1929년 무렵 종교와 학교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북간도 조선인들의 교육 기관 역할을 해왔다. 특히 광복 후에는 유구한 한인 교육관으로 줄곧 명동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이 줄어들어 폐교하게 되었다. 현재는 학교를 다시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 정신을 살려 수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북간도 즉, 연변의 한인,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 한인에게 있어 중요한 유적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명동 5현을 축으로 하는 명동 마을 사람들은 교육열이 매우 드높았다. 후대 교육을 위해 학전을 마련하는 것은 당시의 조선인 이주민들에 있어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교육의 북간도 정착을 위해 그야말로 차근차근 준비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따져보면 명동 5현의 교육적 노력은 매우 의식적이고도 계획적이었다. 학전을 준비하고, 서당을 열어 교육을 시키고, 서당을 통합하여 학교로 만들고, 명동 사람들과 함께 학생들을 유학 보내고 등등 그들의 교육적 행보를 보면 매우 철저한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마을이 점차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면서 교육과 구국, 독립을 위해서는 유교 사상과 기독교 사상 및 독립운동 사상을 분리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을 유기적으로 잘 결합시켜 민족의 해방을 위해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사상적 무기로 삼았다.

이와 같은 명동의 노력은 결국 북간도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명동은 북간도 교육의 중심지로 되었으며 명동 5현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약연은 ‘간도의 조선인 대통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명동 5현의 결단과 사상적 영향이 결국 북간도 조선인 교육의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명동 5현은 성리학적 학통으로부터 실학과 동학을 거쳐 기독교 사상에 이르기까지 늘 비판의식과 함께 발전을 기해왔다. 특히 그들의 이주 역시 이와 같은 사상적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민본 사상, 외세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자주적인 정신, 노동과 일상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 그들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할 점들이 많다. 그들은 시대적 변화에 매우 유연하게 대처해 나갔으며 그것은 결국 민족과 나라를 위한 미래지향적이고 진보적인 노력이었는바 북간도 교육, 정치, 문화의 중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힘으로 되었다.

참고문헌
  • 서대숙, 『간도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역사 공간, 2008)
  • 문영금, 문영미, 『기린갑이와 고만네의 꿈』(삼인, 2006)
  • 김해영, 『북간도 한민족 교육 사상의 형성과 전개』(제주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2011)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