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중국 조선족의 애환이 담긴 명물 사과배

한자 中國 朝鮮族의 哀歡이 담긴 名物 沙果배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특산물|농작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대 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9월 25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이주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노투구진 소기촌
정의

만주산 돌배나무에다 함경북도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가지를 접지하여 개량해낸 독특한 맛의 과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를 중심으로 생산되는 한인[조선족]의 특산 농작물.

사과배를 소재로 만들어진 유행가

“… 연분홍 진달래야 춤추어다오/ 우리 마을 과수나무 꽃피어 난다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소문이 높아서 손님도 많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삼복철 스리 살살 녹는 꿀맛이라네...”

1960년대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에서 불렸던 유행가의 한 구절이다. 어딘가 투박한 가사이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 의 명물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담긴 노래라 하겠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의 명물이라 하면 사과배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모습이 어여쁜 것은 아니이지만 시원 달콤하며 아삭아삭한 그 맛이 일품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과배 창시자 최병일 선생의 만주 이주사

사과배라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특유의 과일이 탄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이다.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 선생은 큰 아들을 보았는데 그 이름을 최창호(崔昌虎)라 지었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과 시달림 속에서 조선 이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 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에 드디어 다다른 곳이 바로 용정 노두구진 소기촌이었다.

소기촌은 노두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남쪽으로 10여리 뻗은 골짜기에 위치해있다. 골짜기 가운데로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좌우 양 켠 안 쪽은 펑퍼짐하고 바깥 쪽은 경사진 언덕바지가 산마루에 잇닿아 있어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었기에 처음에는 ‘버치골’로 불리었다. 그 후 동 쪽 고개를 사이에 두고 ‘큰 버치골’과 대응하여 ‘작은 버치골’로 불렸다. 그 뜻이 한자로 적혀져 지명이 ‘소기(小箕)’로 되었다 .

최병일의 일가족 네 사람이 소기촌에 이주할 무렵 소기촌에는 밭 한 뙈기도 없었다. 인가라고는 오직 부르하통하에서 가까운 골짜기 어구에 초막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소기골을 차지한 중국인 ‘점산호’가 보내어 산을 지키고 있는 순시원이 임시 거처하는 초막이었다. ‘점산호’란 차지 할 ‘점(占)’ 뫼 ‘산(山)’, 집 ‘호(戶)’이니 당시 북간도 일대에서 산과 들의 밭을 차지하고 있던 청나라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다. 이렇게 잠자던 불모지 소기골에 최병일 네 일가가 정착하면서부터 비로소 인적이 있게 되었다.

당시 최창호는 막 약관(弱冠)의 나이가 된 열혈 청년이었다. 최창호의 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벌어온 돈으로 ‘점산호’에게서 잡목림과 잡초가 우거진 냇가의 경사지와 황산을 합쳐 총 10여 ㏊의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일가 식솔을 휘동하여 황무지 개간에 달라붙었다. 큰 나무는 대 밑을 자르고 뿌리를 파냈으며, 작은 나무와 잡초는 불태워버린 뒤 괭이로 파 화전을 일구어 첫 해 농사를 지었다. 그 이듬해인 1917년에는 지세 높고 양지 바른 곳에 바깥 기둥을 세우고 널 마루까지 번듯하게 깐 8칸짜리 집을 지었다.

최창호의 과수원 개척과 조선 배나무 식재

최창호는 무던하기만 한 재래식 농민만이 아니었다. 식견이 넓고 다방면의 흥취를 가진 그는 수전과 한전 농사 외에도 과수원을 꾸리고 양봉업을 벌였다. 약국을 차려놓고 의사일도 보는 한편 소기골 ‘광영 학교’의 학감으로 일하면서 교육 사업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과수 재배와 약용 식물 재배에 흥취가 컸고 조예도 깊었다.

최창호 집 뒷켠에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거기서 9,600여㎡되는 잡목림을 떼내어 개간 하였다. 이 산 등성이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무성하여 천연적인 방풍림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과수 재배에 알맞은 곳이었다.

처음 최창호는 산비탈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 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이렇게 과수원을 꾸리기 시작한 것은 1918년이며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1921년에 최창호는 조선의 고향으로 다녀오는 동생 최두범(崔斗凡)에게 부탁해 배나무 가지를 가져 오게 하였다. 최창호는 동생이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보고 보물이나 받아 안은 것처럼 반가와 하면서 그 것을 김치 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

최창호네 집 앞 터전에는 2~3년 자란 62그루의 돌배 나무가 있었는데 이듬해 봄이 되어 날씨가 따스해 지자 최창호는 동생이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짜개진 대목 틈에 접지를 꽉 끼워 넣고는 수분 증발을 방지하려 삼오리로 꽁꽁 동여맸다.

그해 가을, 최창호는 또 남쪽 땅에서 모셔온 이 ‘손님’들이 북방의 엄동설한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염려하여 땅이 얼어붙기 전에 매 그루마다 물을 흠뻑 주고 마른 풀로 밑 부분을 덮고 흙으로 다져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하지만 아쉽게도 3그루가 동상으로 죽고 살아남은 3그루마저 가지의 끝 부분이 얼어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 3그루의 살아남은 가지에서 죽은 부분을 잘라버리니 한 해 사이에 2자 남짓이 자랐던 과일 나무가 접지한 때보다 좀 굵어지고 컸다.

두 번째 해 겨울에는 과일나무 주위에 짚가리를 조심스레 쌓아두어 겨울나기를 시켰다. 세 번째 해에는 원대만 짚으로 싸고 곁가지들을 삼으로 여러 벌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랬더니 3그루의 과일 나무는 동해를 입지 않았고 봄부터 몰라보게 쑥쑥 자랐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사과배의 탄생

6년째 되던 해의 봄이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는 말처럼 3그루의 과일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 나무가 연변조선족자치주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그해 가을에 최창호네 식구들은 새 과일 나무에 달린 배를 맛보게 되었는데 배가 어찌도 큰지 어른들의 주먹만큼 했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이 많은 반면 핵이 작았으며 당분과 수분이 많아 맛이 아주 좋았다.

이 배를 맛보는 사람마다 일등 가는 진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배의 부본(父本)이 돌배 나무이지만, 과일은 돌배에 비할 바 없이 참 좋다는 뜻에서 ‘참배’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1950년대 초까지 불리다가 1952년에 와서 그 배의 외모가 사과와 흡사한 특징을 가졌다는데서 ‘사과배’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52년 길림성 과일 품종 조사조가 이 과일이 확실히 새로운 품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과일의 이름을 ‘사과배’라고 칭한 것이다.

사과배 재배지 확산

3그루의 과일 나무가 사과배의 선조로 되었고 새로운 과일 품종인 사과배가 그 품질과 맛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의 으뜸으로 인정을 받게 되자 사과배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사과배 나무는 노두구 지방의 노동, 노서, 염명, 관도촌과 세린하향의 일신, 문화촌 그리고 광신향의 수남촌에까지 전파 되었는데 총면적은 750여 무나 되었다. 1939년 용정시 경내의 사과배 나무의 재배 면적은 1,770무로 늘어났다. 해방 전후 최창호의 영향을 받아 용정 일대는 물론 화룡현 등 여러 지방에서 사과배 나무 재배가 널리 확산되었다.

사과배 최대 재배지, 용정 만무 과원

어느 덧 용정 일대는 거대한 과수원이 들어섰다. 이 곳을 우리는 ‘만무 과원’이라 지칭한다. 무려 25만 그루에 달하는 사과배가 이 땅의 과일 동산에서 일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무 과원은 1952년 초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대 주덕해 주장이 모아산 기슭에 과원을 건설할 구상을 제기하면서 스타트를 떼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연변 화룡 집단의 과수 농장, 비암산 자락으로부터 삼봉동을 감돌고 말바굽산을 지나 모아산을 뒤덮으며 연길 비행장까지 이르는 곳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 기지를 자랑하고 있다. 봄철 이면 몇 십리 이어진 과수원 산자락을 마치 대설(大雪)이 내리기라도 한 듯 사과배 꽃이 뒤덮는데, 이는 연변의 유명한 경관 중의 하나이다.

연변의 사과배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또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추위에 잘 견디고 맛이 상긋하여 품종이 우량하다. 연간 총생산량이 2만여 톤에 달하는 사과배는 중국 동북 3성은 물론이고 중국 내 14개 성, 시에 뿌리를 내렸다.

사과배의 명성

사과배는 이웃 나라들에 수출되는 주요 과일 품목으로도 명망이 높다. 조선, 한국, 일본, 러시아, 싱가포르 등의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중국베이징에서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국가 연회석에도 오르고 있다.

사과배는 일찍 1985년에 중국 전역에서 펼쳐지는 전국 배류 평의에서 1등상을 안았고 1990년과 2003년에 차례로 AA급 녹색 식품으로 길림성 명브랜드로 평의 받았다. '설리', '내양리' 등의 과일과 함께 중국에서 “3대 배 제품왕”의 하나로 뽑혔으며 “북방 배 제품의 왕”으로도 불린다. 따라서 국내외의 관광객이 연 인수로 13만여 명에 달하면서 연변의 관광업 발전에서도 중대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사과배는 80여 년 동안 연변 각지에 퍼져 연변 경제의 기둥 산업의 하나로 되여 왔다.

1995년에 용정은 국가 농업부로부터 '사과배의 고향'으로 명명되었다. 1950년 초에 국가 해당 과학 연구 부문에서는 사과배의 육성 과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최창호가 육성해낸 3그루의 사과배의 모수에다가 ‘사과배 모수’라는 패쪽을 세워두었다. 그 후 전례 없던 문화 대혁명 가운데서 그 패쪽이 분실되었다.

‘사과배의 아버지’ 최창호는 1967년에 타계했다. 1987년 9월 25일, 용정시 정부에서는 사과배의 연변에 대한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최창호가 처음 육성해낸 사과배나무 앞에 ‘사과배 선조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 사과배 나무 고사(枯死) 위기

해마다 5월이면 용정과 자치주 수부인 연길의 접경지인 모아산 남쪽 산자락을 감싸 안은 만무 과원에서 하얀 배꽃이 백사지를 방불케 하듯 무연하게 피어나 말 그대로 인간 선경이다. 또 가을이면 아기 주먹 만한 알알이 탐스런 사과배들이 주렁주렁 달려 장관을 이루며 그 향기가 백리를 내달린다.

그리고 입하를 앞둔 초여름의 따스한 날씨가 다가오는 이 즈음이면 어김없이 용정만무 과수원을 무대로 축제가 펼쳐진다. 대외 교류 합작을 추진하여 용정의 지명도를 높이고 관광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취지로 ‘사과배 꽃 민속 문화 축제’라는 이름의 축제 기간 다양한 민속 활동과 관광, 문예 공연, 풍경구 관광, 등불 놀이, 사과배 나무 분양 등 행사가 이어진다. 축제는 용정과 연변을 홍보하고 사과배를 홍보하는 데 민속 문화를 발전시키고 지역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추진시키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난 봄, 용정 사과배 축제 행사의 여흥을 틈타 살펴본 사과배 모수 가운데 하나는 이미 죽어 었고 두 대 역시 고사 위기에 처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당년의 영광을 알렸던 ‘사과배 선조 기념비’는 그 모서리가 닳아 떨어져 있고 기념비 주위는 잡풀로 무성하여 살풍경이었다.'사과배 선조 기념비'가 세워진 바로 곁에는 최창호의 생가가 있었는데, 지금 그 친지들은 이사를 가고 관복재라는 한족 농민 가정이 임시로 입주해 있었다.

관복재는 “사과배의 선조나무라고 들었는데 돌보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가끔 내가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역시 전문가들이 착수해야 하고 품이 들어야 하는 상태로 별 방도가 없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백발 노인들만 남은 촌민들은 해당 부문의 중시가 뜸해지면서 사과배 선조기 념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어들고 있다고 하였다. 기념비와 선조 나무에 대한 관리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망가진 담장과 풍화 작용에 볼품없이 속뼈를 드러낸 기념비 수선을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조선족 정체성의 표상, 사과배

사과배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감흥은 깊다. 이민 민족인 한인들은 중국 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사과배라는 것이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한인들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이념을 키워 온 한인[조선족] 문화를 형상화 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다. 150여 년의 이민 정착 역사를 경유해 온 한인들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한인들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 있다. 그래서 중국 한인[조선족] 북방 시단의 원로 시인 이삼월은 199년「접목」이라는 제하의 시로 이렇게 노래했다.

접목의 아픔을 참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

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 곳 토질에 맞게

이 곳 비에 맞춤하게

이 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든든한 테를 둘렀거니

큰 바람도 두렵지 않고

한 마당 나무들과도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한인들을 산 낯설고 물 낯선 타향의 나무에 접목된 접수(接穗)에 비유한다. 이 나뭇가지는 타향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 해 튼튼하게 자라났고,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중국 한인 이민사 속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뛰어난 은유와 상징 기법으로 노래한 시라고 하겠다.

한국에서도 한인[조선족]이 이주 민족으로서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인생사를 그린 설날 특집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그 제목을 '핑구어리[苹果梨]'라고 달았다.

사과배처럼 광풍 조류에 우수하게 접목해야 할 조선족

근년 변혁기의 광풍 속에 그 사과배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자기의 주체성을 보존해가면서 존속해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중국 한인[조선족]에게 하나의 커다란 과제로 놓였다. 요즘 세계는 바야흐로 각 민족 문화의 다원 공존의 장을 열고 있다. 중국 한인[조선족]은 앞으로도 유구한 민족 문화의 뿌리에서 끊임없이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접목해 우량한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 변혁의 복잡다단한 환경 속에 중국 한인[조선족]은 존속의 근원, 접목의 힘을 찾고 믿어야 할 것이다. 일심동체가 되어 민족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민족 문화의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면서 뿌리 깊은 나무로 무성한 가지를 뻗쳐 나가야 할 것이다. 접목을 거쳐 추위를 이겨낸 품질 우량의 사과배처럼.

참고문헌
  • 류연산, 「연변 특산 '사과배'에 어린 조선족의 중국 정착 과정」(『월간 말』 243, 2006)
  • 김혁, 「중국 조선족의 애환 담긴 명물 ‘사과배’ 」(『민족 21』 1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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