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갈대밭을 황금수전으로 일군 천진시 조선족마을, 보원촌

한자 갈대밭을 黃金水田으로 일군 天津市 朝鮮族 마을, 寶元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천진 직할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마을 조선족 마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대 초
마을 중국 천진시 동려구 보원촌
조선족 마을, 보원촌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1950년대 중반 심양(瀋陽)에서 한인 다섯 가구가 천진시(天津市) 동려구(東麗區) 보원촌(寶元村)으로 건너와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은 “조선족 마을”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조선족마을의 조선족 주민들 대부분은 이미 한화(漢化)되었고 노인들만 민족의 생활습관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조선족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이미 한화(漢化)되었고 노인들만 민족의 생활 습관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동려구 보원촌은 별로 크지 않은 마을이다. 마을 깊숙한 곳에 세워진 한글로 된 팻말이 조선족 마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15살에 부노를 따라 보원촌에 들어온 박정직은 조선족 마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때는 보원촌 쪽에 전부 한족(漢族)들이 거주했어요. 당시 여기는 알칼리성 토지이다 보니 작은 단층집 하나밖에 없었지요." 그는 오빠와 같이 마을에 있는 조선족학교에서 공부했고, 부모는 땅을 개간해 뱌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정부가 조선족들이 이주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집터를 제공하고 집까지 지어주면서 점차 조선족 마을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는 조선족 생산대가 조직되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을 유지해 조선족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보원촌 조선족 마을이 가장 번창했을 때는 10여 가구의 조선족 가정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김도명과 박정직 내외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은 지진을 겪고 나서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일반 단층집이었지만 한족 마을의 주택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특히 온돌을 깐 것은 전형적인 한국 전통의 가정집 구조이다.

보원촌에 거주하는 조남은 외관상으로는 조선족의 특징이 거의 없다. 그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보원촌 1대 주민이었다. 조부모가 세상을 뜬 후 어머니는 한국으로 출국했고, 보원촌에는 조남 부부만 살고 있다. 큰 집에 현대화한 주방을 갖추고 있고, 평소 조선족 음식보다 중식을 더 즐겨먹는다는 조남은 한국어는 아예 모르는 전형적인 천진 사람이 되어 있다. 조선족 마을인 보원촌도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만큼 점차 조선족의 문화와 삶을 잃어 가고 있다.

최초로 이주해 온 조선족 주민들이 떠나고 다른 지방의 조선족들이 적지 않게 보원촌을 찾아왔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온 그들에 의해 조선족 마을의 역사와 명맥이 그나마 유지되고 있다.

보원촌의 제1대 건설자, 박춘보

보원촌은 천진시에 있는 거의 60년 역사를 가진 토박이 조선족 마을이다.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박춘보는 1997년에 마을을 떠나 한 10분 거리에 있는 시내로 이사가 만년을 보내고 있다. 이 마을은 1950년대 중반 요령성 심양(瀋陽) 일대에서 건너온 다섯 가구의 조선족 농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박춘보는 “빠른 게 세월이군요. 그때를 생각하면 꿈만 같습니다. 공장에 들어가 월급을 타는 노동자가 되려고 왔는데 소금물에 절은 갈대밭을 개간해 논밭을 일구는 농민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바다 옆이라 그동안 물 고생은 물론이고 전기도 1973년 전까지 석유등을 켜고 살아야 했지요”라며 옛날을 회고했다.

1955년 2월, 18살이었던 박춘보는 이낙진, 최육성, 이우석, 이경삼 등 네 가구의 조선족 농민들과 함께 심양에서 천진으로 왔다. 그들이 천진으로 이주해 오게 된 계기는 당시 김진근이라는 조교가 천진에 유지공장을 세울 계획이라며 조선족들이 필요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사영(私營) 기업 보다는 ‘공사합영(公私合營)’ 바람이 불어 김진근이 사업을 포기하는 바람에 그들의 꿈은 고사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할 수 없이 찾아간 곳이 바로 당시 황무지가 많다는 오늘날 보원촌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던 박춘보는 “거처도 없었어요. 다행히 마음씨 좋은 보원촌 한족들이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알고 선뜻 저들의 집을 한 칸씩 내주어 겨울을 나게 했지요.” 라고 하였다. 초봄이 되자 이들은 한족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와 11칸 되는 흙집을 짓고 옮겨왔다. 그리고 한족들의 말과 쟁기를 빌려 갈대로 꽉 들어찬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기 시작했다. 이른 봄이라 날씨는 더없이 쌀쌀했다. 매일같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얼음장처럼 차디찬 늪에 들어서서 갈대밭을 밟으면서 일했다. 두 발은 송곳 같은 갈대뿌리에 찔리고 찬물에 얼고 터서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더군다나 염분이 많은 갈대밭이라서 염도를 낮춰야 벼농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성이 하나도 없는 토질이라 논두렁을 간신히 만들고 물을 대면 두렁은 금방 모래성처럼 스르르 내려앉곤 하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했다. 옥살이 같은 날들이 반복되었다. 아물 새도 없는 상처투성이가 된 두 발을 붙잡고 남몰래 수없이 울기도 했다. 주위에 온통 늪이라 봄부터 가을까지 극성스런 모기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3년 동안 대자연과 억세게 싸웠다. 결과 160여 무의 갈대밭을 논으로 바꿨다. 한족들은 그 해 가을에 타작한 벼를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다른 곳에서 몇 호의 조선족들이 더 들어와 12호로 늘어났다. 1965년 지역 정부는 정식으로 조선족 생산대를 세우도록 결정하고 행정 관리상 보원촌에 귀속시켰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1958년 대약진, 인민공사화 시절에도 지역에서는 조선족들의 언어, 생활, 풍속 습관 등을 충분히 배려해 민족자치를 실시하도록 허락했다.

촌민들 돈 한 푼 안들이고 벽돌기와집에 살다

천진시에 정착한 조선족 농민들은 논농사 외에도 볏짚을 이용해 새끼를 꼬아 팔아 수입을 늘렸다. 처음에 수공으로 시작했으나 후에는 집집마다 새끼 꼬는 기계를 갖췄으며 질이 좋아 인근 공장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사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 이들은 또 마을에 자그마한 기업을 앉히고 안경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품질과 신용으로 천진시 한 큰 안경점의 지정공장으로 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1976년 7월 28일 일어난 7.8 규모의 하북성 당산(唐山)대지진으로 보원촌 마을의 흙집들도 피해를 입었다. 당시 중국 정주가 발표한 공식적인 사상자 수는 사망자 242,400명, 중상자 164,000명, 불구 3,800명이었다. 보원촌 주민들은 그동안 모아왔던 자금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방 3개에 창고 한 칸씩 달린 벽돌 기와집을 짓기로 했다. 이리하여 1977년 마을의 12호 조선족들은 개인 돈 한 푼도 안들이고 새 벽돌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그 때에 지은 집들이 지금도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다.

10여 호 조선족 마을에 천진시 인민대표 배출

천진시보원촌 조선족 농민들은 마을의 경제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주변 한족 마을에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렸을 분 아니라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춘보는 젊은 시절에 보원촌에서 생산대장과 회계로도 활동하였으며, 한 때는 안경 부품 공장을 관리하면서 마을의 경제 수입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이에 그는 천진시 동려구의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 후에는 천진시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돼 1980년대까지 활약하면서 조선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천진시에 가는 곳마다 조선족 음식점들을 찾을 수 있지만, 박춘보가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있을 때는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민대표대회 회의에서 천진에 조선족 음식점을 영업하게 해달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보원촌 조선족 마을은 천진시 개발 계획에 따라 집을 허물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지 아니면 공장이 들어설지 알 수 없으나 갈대뿌리에 발바닥을 사정없이 찢겨가면서 옥답으로 풀었던 논밭도 역시 개발계획에 들어가 다시 황무지로 되돌아왔다. 12가구가 병아리처럼 모여 서로 의지하면서 오붓하게 살아가던 조선족 마을은 이젠 호적도 6호만 남고 마을을 지키는 원주민은 달랑 2세대밖에 없다. 천진시 보원촌 조선족 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지만, 60여 년을 홀로서기하며 정을 들여 가꾼 고향마을의 이야기는 언제든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보원촌

보원촌에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선족 소학교와 유치원이 있었고 식당도 있었고 식당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도 없어지고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지역에 개발 계획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면서 천진에는 많은 기업들이 입주하였다. 그전부터 홍콩을 거쳐 천진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지만, 수교 이후 많은 기업이 발을 들여 놨다. 가장 먼저 들여온 것이 의류사업이었다. 의류도 다양하여 속옷, 겉옷, 그리고 정장이나 청바지와 스웨터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가발 공장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외에도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신발, 낚싯대, 생활용품 등을 만드는 공장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자연히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보원촌 주변에 공장이 들어섰다. 동북 3성에서 이주해 온 조선족들은 보원촌 주변인 신하이루[新海路]와 퐁낸춘[豊年村]에 거주하였다. 1992년 수교 이후, 대우전자가 대항구에, 엘지전자가 북진구에, 삼성전자가 당고구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엘지 생활용품이 북진구와 당고구에 들어섰다. 지금은 삼성전자와 테크윈, 삼성SDI 등이 진출go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곳은 아주 낙후된 지역이었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의 유입과 경제 활성화에 따라 조선족도 자연스럽게 분산되어 이제는 동북 삼성에는 호구만 남겨두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려구 노인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박춘보, 김도명 등 보원촌 1세대 주민들은 이제 60여 년이 지난 지금, 조선족의 천진 역사를 알리고, 또 없어질 위기에 놓인 보원촌 조선족 마을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참고문헌
  • 「갈대밭을 황금 수전으로 일군 천진시 조선족마을」(『길림신문』, 2011.10. 28.)
  • 「조선족마을 보원촌의 어제와 오늘」,(『연변일보』, 201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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