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지역의 논농사를 개척한 한인 농민들

한자 滿洲 地域의 논農事를 開拓한 韓人 農民들
분야 역사/근현대.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생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5년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0년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이후
개설

오늘날 한인[조선족]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백여 년에 걸쳐 만주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일군 한인들의 후예들이다. 이주 초기 한인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이곳을 찾았다. 오로지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고 살고픈 소박한 소원 때문이었다.

당시 만주는 기후 조건 등으로 대두와 고량 등 밭작물만 경작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한인들은 자신들의 특기였던 벼농사 기술을 발휘하여 이를 성공시켰다. 벼농사가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농업이라는 것을 현지인들에게 인식시켜 줬고, 수리 시설 확충하고 습지를 개간하여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놓았다.

한인들의 도강과 한인사회 형성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파된 벼는 19세기 말 한인들에 의해 다시 중국의 동북, 만주로 옮겨갔다. 청나라의 봉금령(封禁令)과 조선 정부의 월강죄(越江罪)가 있었지만, 한인들의 굶주림은 막지는 못했다. 1881년에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제되고 이민 실변 정책(移民實邊政策)이 실시되면서 한인들의 이주는 급증하였다. 이민 실변 정책이란 청나라가 변방의 국방을 강화할 목적에서 이민자들을 끌어들여 이들로 하여금 변방을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함경도 변방의 한인들은 강을 건너 북간도,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 발을 들여놓았고, 압록강변에 살던 평안도 사람들은 요령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생활 기반을 닦은 뒤에 이주 한인들은 북으로 발길을 돌려 흑룡강이 흐르는 북만주 지역에 터전을 일궜다. 그 결과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함경도 후손들이, 요령에는 평안도 출신들이, 흑룡강 주변에는 함경도·평안도·경상도 등지에서 떠나온 한인들이 각기 분포하고 있다.

이주 한인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산동 반도에서 동북으로 이주한 한족들은 한인들에게 자신들이 일군 토지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이들을 배척하고 쫓아냈다. 이에 한인들과 한족들 간의 민족 갈등이 초래되었고 결국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곤 했다. 결국 한인들은 밭농사를 주로 하였던 한족이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소택지나 수렁을 개척하여 논으로 개간하였다.

중국 동북 지역 최초 벼농사 마을, 길림성 통화의 하전자

동북 3성에서 가장 먼저 논농사가 시작된 곳은 1875년경 길림성 통화의 상전자·하전자에 정착한 한인들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요령성 환인만족자치현 괴마자진 와니전자촌의 마을 입구에는 ‘동북수도제일촌(東北水稻第一村)’이란 비석에 “1875년 환인현의 괴마자 하전자에서 조선인 농민들이 벼농사 시험에 성공하여 벼 재배 기술을 전 동북 지방으로 보급시켰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후 수전 농사는 인근의 요령성흥경·환인·안동 등지로 퍼져나갔다. 1883년에는 통화 일대의 한인들이 길림성 유하현으로 이주하면서 휘발하 상류, 혼하 상류 등지에서도 논농사가 시작되었다. 1890년에는 요령성 단동 부근에서 수전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어 1908년경에는 심양·신민 등지에서도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수십만의 한인들이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대거 이주하였다. 1875년부터 1915년 일제의 강압에 만몽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청나라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가 일으킨 만주 개발 붐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에 벼농사 기술이 뛰어났던 한인들이 중국인들에게 환영받았다. 한편 만주에 산재한 광대한 저습지와 황무지는 한인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다.

1915년 만몽 조약 이후 일제가 상조권을 내세우며 한인까지 이용하여 침략을 강화화자, 만주 당국은 한인의 토지 소유 금지, 엄격한 소작 규제, 심지어 소작 불허, 제한된 고용만 허용 혹은 구축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종전 만주 이주사에서는 통상 탄압기, 박해기 등으로 분류하던 시기였다.

1922년 연변의 화룡·연길·왕청 등 3개 현의 한인은 35만 명으로 중국 동북 3성 전체 44만 4천여 명의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은 수전 개발에 열심이었지만, 일본 금융 기관과 중국인 봉건 지주의 착취로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의 수전 개발

개척 초기에 이주 한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즉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두만강 지역의 산간 지대 혹은 반산간 지대였기에 기후가 한랭하고 무상기가 짧아 벼농사를 짓기에는 부적합하였다. 그럼에도 함경남도의 수전 지대에서 이주한 한인들은 벼농사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해란강 연안의 세전벌과 연길에서 회령으로 가는 지신대교동 부근에서 습지를 이용하여 진펄에 괭이를 박아 논을 만들었다. 화룡 지역에서는 1907년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연길현 장백향 인평촌에 3,929m의 물길을 만들어 부르하통하 물을 끌어다 33㏊의 수전을 개발했다.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전지는 청조 말기인 1906년에 12.5㏊이었는데 불과 5년이 지난 1912년에는 1만 5975㏊, 1943년에는 2만 4622㏊로 증가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전은 대부분 세전벌·평강벌·구수하벌·훈춘벌·백초구벌·대석도 등 6개 평원에 집중되었고 모두 736㎢에 달했다.

북간도의 벼농사는 두만강해란강 부근의 몇몇 산어귀에서 1900년에 용정 동쪽의 서전 평야와 남쪽의 대교동 부근에서 성공을 거둔 뒤 확대되어 1910년에 급격히 발전했다. 1920년에 연길은 만주에서 수전이 가장 발달한 곳으로 변모하였다. 규모가 3,700향에 달하였다.

왕청은 1913년 대감자(大坎子)에서 처음으로 벼농사가 성공을 거뒀다. 춘융향·만태성·귀일동·소백초구·춘화향 황구·남북 하마탕 등에서도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1912년에는 돈화현 냉수천자로 이주해 간 한인들에 의해 수전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액목현에서는 1916년에 강원도에서 이주해 온 김상덕(金相德)이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반석현에서는 1910년 가을 남부 지방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에 의해 벼농사가 처음 시작되었다. 1921년경에 500여 호의 한인들이 600여 정보의 논을 경작했다고 한다. 대체로 1910년 이후 북간도에서의 한인들은 벼농사를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만주 지역 기후와 벼농사

만주의 자연환경은 봄이 짧고 관개(灌漑)가 불편하며 강수량이 부족하다는 등의 요인 때문에 벼농사가 부적합했다. 기후도 북부의 경우 봄에는 늦게까지 서리가 내리고 가을에는 일찍 서리가 내려 벼농사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고, 강수량은 적은 반면에 상대적으로 증발량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볍씨의 선택이나 6~8월의 집중 강우 등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수확기에 강수량이 적어 오히려 벼의 성숙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수확한 벼를 충분히 건조시킬 수 있어 쌀의 변질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한인들은 송화강이나 두만강·압록강·대요하 등의 지류를 따라 벼농사에 필요한 관개시설을 개발하여 이를 극복했다. 맨발로 물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중국인들의 풍습은 한인들의 수전 경작에는 유리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남만주와 북만주 지역 한인의 벼농사

남만주 지역의 한인들 벼농사는 1840년부터 시작되어 1861년에는 단동의 삼두랑두에서 벼농사가 행해졌다. 1861년에는 통화현 하전자의 한인들이 소택지와 늪지를 개간하여 상당한 양을 수확했다고 한다. 1880년에는 단동의 당산성과 봉성현 소만구 지역의 한인들이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으며, 1900년 무렵에는 유하현에 거주하던 일부 한인들이 해룡·동풍·서풍·개원 등지로 이동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1908년경에는 영길현에서도 수전이 개발되었으며, 이후 한인들은 송화강과 휘발하를 따라 휘남·반석·교하 등지로 이주하면서 벼농사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북만주 지역에서의 한인들에 의한 수전 개발이 이뤄졌다. 동녕현에서는 1916년 노력에서 이주한 최동환과 14명의 한인들이 소수분(小綏芬)으로 와서 수전을 실험, 재배하였다. 소수분의 벼농사 성공은 목단강·목릉하·수분하를 거쳐 송화강의 통하·삼성·부금 등으로 전파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 사람들이 해림현 마도석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한인들은 동청철도 동부연선과 동경성·목릉·밀산·위하현 등지로 흩어져 살면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에 1921년경 북만주지역에서의 벼 생산량은 28,800여 섬에 달했다.

요령성 한인 이민 사회의 형성과 벼농사

요령성에 이주한 한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갖지 못했다. 선주민(先住民)들이 할 수 없는 벼농사를 개발함으로써 정착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새로운 개척지에 정착할 때 벼농사의 가능성을 전제로 삼았기 때문에 이주 한인 사회의 형성은 그곳의 벼농사 발달의 과정과 직결되었다.

한인의 대량 이주는 요령성 지역이 간도에 비해 년이나 이르다. 벼농사의 개시도 요령성 통화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요령성으로 이주한 한인 농민들 대부분은 전적으로 벼농사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양현·심양현·개원현·신민현·철령현·무순현·유하현·서풍현·동풍현·법고현·금현 등지의 한인 이민 중 거의 100%가 벼농사에 종사했다.

그들은 벼농사에 집중하며 자가 소비용의 콩을 논두렁에 심고 약간의 채소밭을 소유했을 뿐이었다. 만주와 같이 기후조건이 변덕스러운 곳에서 이처럼 수전만 경영하는 형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조선에 인접한 요령성동변도(東邊道) 지역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으며 기후가 차고 무상기가 짧아 벼농사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전을 일구거나 산간의 궁벽한 곳에서 제한된 수전을 개발하는 자 이외에 많은 한인 이민들은 수전에 적합한 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재차 이주해 갔다. 그 결과 동변도의 인구 증가는 매우 느렸고 심지어 감소하기도 하였다.

수전 개척과 인구 증가

1897년 동변도의 한인 인구는 37,000여 명이었는데 1907년 12월의 흥경·장백·봉황·통화·임강·집안·안동·환인·관전 등 2부 1청 6개현의 한인 인구는 28,0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봉천성 수리국의 신게하 수리 공정이 준공되어 벼농사 여건이 조성되면서부터 한인 인구가 급증하였다. 1916년에는 100명, 1917년에는 229명, 1918년에는 595명, 1919년에는 775명, 1920년에는 1,500명을 넘어서, 혼하 연안에 10여 개의 한인 집거촌이 형성되었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 직전 63만 명이 넘는 재만 한인들은 논농사에 적합한 만주 전역에 분포했다. 다만 1920년대 중 후기까지도 기후가 차고 무상기가 짧은 만주 북부 지역보다 따뜻한 남부 지역인 요령성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그 후 한지에서도 재배 가능한 품종인 ‘북해(北海)’가 보급되면서 북만주에서의 벼농사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봉천성 지방 당국이 일제의 대륙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아래 한인 이민의 단기 소작조차 허가하지 않고 일부 제한된 고용만을 허용하는 등 엄격한 규제와 구축 정책을 폈던 것과 달리 길림성과 흑룡강에서는 귀화 이주인을 중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조차권과 전압(典押) 등 토지에 관한 권한도 취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토지가 넓고 인구가 적은 북만주 지역에서는 비교적 유리한 조건의 분익 소작을 행할 수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한인 이민이 북만주으로 이동해 갔다.

이처럼 한인 이민의 북만주으로의 이동 추세로 말미암아 요령성의 수전 면적은 점차 감소하였다. 1928년 심양현 신민현의 수전은 합계 53,000여 무로 1923년의 12,700무에 비교해 58%나 감소되었다. 1926년 봉천성의 수전은 1924년의 42.4%에 불과하였다.

한인은 근대 중국 동북 논농사의 개척자

일찍이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중국 동북에서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하였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된 후 요, 금, 원, 명, 청 몇 개 왕조에 걸쳐 무려 900여 년간 중국 동북에서 벼농사를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한인들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동북에서는 논농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날 한인[조선족]은 근대 중국 동북 논농사의 개척자였다.

1875년에 통화 지구의 상전자, 하전자 일대에 정착한 한인 농민들은 소택지나 수렁을 논으로 개간하고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이는 근대 동북 수전 개발의 첫 시작이다. 논농사 바람은 여기로부터 흥경, 환인 등 여러 지구로 불어갔다.

요하, 혼하 일대의 심양, 신민 지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논농사는 1908년에 김시정(金時禎) 등 한인 5~6명이 신민현 서공태보(西公太堡)의 황무지 10㏊를 소작 맡아 개간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에 봉천 당국은 한인 농민 김중삼의 건의에 따라 봉천수리국을 세우고 한인 농민들을 조직하여 13㎞나 되는 물 도랑을 건설하고 혼하 물을 끌어들여 1천㏊의 논을 만들었다. 이렇게 일어난 논농사 바람은 봉천, 신민으로부터 재빨리 무순, 개원, 철령, 길림 쪽으로 불어갔다.

애하(愛河), 대양하(大洋河) 유역의 논농사는 1890년에 두 한인 농민이 안동[단동] 부근의 탕산성(湯山城)에서 수전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어 봉황성, 수암(岫岩), 송수 일대로 확대되었다. 휘발하 상류, 혼하 상류의 논농사는 1883년에 통화 일대의 한인이 유하현에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료하연안 수전 농사의 중심지였던 영구의 전장대(田庄台)의 논농사는 1913년에 한인 농민 김원우 등이 200~300㏊의 땅을 소작 맡아 개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두만강 북쪽 연변조선족자치주 지구의 수전은 1900년에 용정 동쪽의 세전벌과 용정 남쪽의 대교동 한인 농민들로부터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에 논농사는 평강벌,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강 연안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에 이미 3,700㏊의 논을 개간한 연길현은 동북에서 논이 가장 많은 현이었다. 1900년에 한인 농민 김지순 등이 덕혜현 남령자(南嶺子)에 1.5㏊의 논을 개간하였다. 이것이 길림, 장춘 지역의 첫 수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만주의 수전은 1911년에 안종호를 비롯한 89세대의 한인 농민들이 동녕현 소수분하에서 150㏊의 논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수전 농사는 여기로부터 목릉, 녕안, 해림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 통계에 따르면, 봉천 지구 수전의 85%, 안동 지구 수전의 70%, 길림 지구 수전의 100%, 북만주 수전의 100%, 개원 지구 수전의 90%, 통화 지구 수전의 85%, 무순 지구 수전의 80%, 연변 지구 수전의 100%는 모두 한인이 개간하고 다루었다. 1934년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 동북 벼 총 수확고의 90.1%가 한인 농민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밥은 뼈밥”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의 억압과 군벌 당국의 약탈을 받던 한인 농민들의 수전 개발사는 악전 고투의 역사이며 피눈물의 역사였다. 한인 농민들은 인간의 발자취가 닿아본 적이 없는 험한 초지, 임지나 수렁을 다스려야 했다. 얼음이 서걱거리는 강물에 들어가서 보를 막고 물도랑을 만들었다. 바로 이렇게 한인 농민들이 피땀을 흘린 보람으로 태고연히 잠자던 동북의 초지, 습지들이 옥답으로 변하였고, 수리 관개 사업도 발전하였다. 입쌀을 수입하던 중국 동북은 1910년대 말부터 쌀을 수출하게 되었다. 실로 한인 농민들에 의해 시작된 동북의 논농사는 근대 중국 동북 지역의 농업 발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홍종필, 「만주 한인 이민 수전 개척 소고」(『명지 사론』3. 1990)
  • 권립, 「근대 수전의 개발과 우리 민족」(『독립운동사의 제문제』, 범우사, 1992)
  • 박진환·남병원·남철우, 「중국 흑룡강성 조선족의 촌락 생활과 벼농사의 역사적 고찰」(『북방농』13, 2002)
  • 김영, 『근대 만주 벼농사 발달과 이주 한인』(국학 자료원, 2004)
  • 황민호, 「1910년대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동향과 한인의 만주 이주」(『숭실 사학』25, 2010)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