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여진족촌 허저족 부락에서 공생하는 조선족

한자 女眞族村 赫哲族 部落에서 共生하는 朝鮮族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마을 여진의 후손인 허저족과 함께 살아가는 한인[조선족] 거주지
조선족 거주지 흑룡강성 의란현, 가목사시, 동강시
정의

가목사시 오기 혁철 문화촌처럼 흑룡강성과 길림성 일대에서 여진족과 함께 공생하는 조선족들의 삶과 역사.

개설

우리 한인은 오래전부터 만주라는 공간에 거주해 왔다. 여진족도 만주라는 공간에서 살아왔으며, 때로는 한민족과 융화되기도 하며 함께 공존해 왔다. 하나의 공간에 살아가는 각기 다른 민족의 특수성과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그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의미는 매우 크다.

만주의 한인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중국 동북 3성 지역을 일컫는 단어들 가운데 ‘간도(間島)’는 가장 좁은 범주이다. 일제시대에 1:200만 축척으로 제작한 『간도성』 지도에는 현재 길림성의 연길현·왕청현·돈화현·안도현·화룡현·혼춘현이 간도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간도(間島)는 ‘사이 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 후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서 농사짓는 것을 중국과 조선 양국에서 금하자, 한인들은 처벌을 피하고자 '사이 섬'이라는 말을 생각해 냈다. 실제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지었지만, 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간 것이 아니라 강 가운데에 있는 섬, 즉 사이에 있는 섬에 다녀왔다는 핑계를 댔다.

청나라 강희[康熙, 1654~1722] 연간에 공포된 봉금령에 한인들이 자유롭게 압록강두만강을 건널 수 없었다. 그런데 1869~1871년 함경도의 극심한 가뭄에 굶주린 수많은 한인이 사이 섬에 간다는 말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의 길림성과 요령성 일대에 '사이 섬'이라는 뜻의 간도라며 생활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만주는 사이 섬을 포함하여 더 넓은 범주로 현재 중국의 동북 3성인 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요령성(遼寧省) 지역이다. 이 지역은 중국의 영역에서 보면, 산해관 동쪽 지역으로 한반도·러시아·몽골과 접하는데 청을 세운 만주족[여진족]이 흥기한 곳이기도 하다.

명나라 말기, 이곳의 여진족은 해서(海西) 여진·건주(建州) 여진·야인(野人) 여진의 3부로 나누어져 있었고, 명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았다.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로 명나라의 만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이 틈에 건주 여진의 족장 누르하치는 1588년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변방 세력이 더욱 쇠락해지자, 이를 기회로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의 여진족을 완전히 통일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정하였다. 3년 후, 누르하치는 1619년 살이호[薩爾滸,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여 요하(遼河) 동쪽을 차지하게 되었고, 아들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 태종]는 1636년 청을 세웠다.

청조는 순치 원년(順治元年) 1644년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만주일대는 여진족과 이주한 한인, 한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특히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뒤 텅빈 만주 일대를 흑룡강 유역과 만주 일대의 부족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주 일대에서 우리 한인이 거주했던 역사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발해(渤海)동경성(東京城)이 현재 흑룡강성 목단강시(牡丹江市)에 있었기에 당시 한인이 거주했던 지역이 적어도 목단강 유역과 흑룡강 이남이었을 것이라는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요동지(遼東志)』에는 요동 지구에 한족(漢族)이 10명 중 7명이고, 여진에 귀화한 고려인이 10명 중 3명이었다고 하였다. 17세기 초 중국 내 후금의 건국과 명과의 전쟁, 청의 건국 등이라는 격변기에 조선에서는 전쟁에 강제 징발되거나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의 원치 않은 이주가 있었다. 이와 달리 19세기에는 좀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떠난 자발적인 한인 이주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이후 1910년부터는 한인의 자유 이민이 더욱 커졌다. 이와 함게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가 '안전농촌'이란 미명하에 한인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삼남 지방의 농민들을 만주로 반강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1930년대 후반 25만 명 정도가 만주지역으로 집단 이주 하였는데, 당시 만주의 한인 인구는 약 50만 명에 달했다. 이후 매해 8만 명의 한인들이 이주하여 1938년에는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만주는 한족(漢族)과 한인(韓人), 여진족이 함께 살아온 다민족의 터전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다민족이 어우러져 같이 만들어 가야 할 공간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한민족에게는 함께 공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흡수되어 하나가 되어야만 했던 공간이기도 하였다.

담비로부터 시작된 전쟁

'담비'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예전에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동물이었다. 담비는 족제비과의 동물로 족제비보다는 조금 크고 몸빛은 누른 갈색을 띠고 있다. 머리 꼭대기와 꼬리 끝이 희며, 네 발은 까만데 겨울에는 몸빛이 엷게 바뀐다.

한반도 내 함경남도 보천군 대평 노동자구에는 검은 담비가 분포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3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검은 단비를 ‘보천 검은돈’, '흑초'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고, 털가죽은 '돈피' 또는 '자알'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겨왔다. 검은 단비는 침엽수림을 좋아하며 인적이 드문 깊은 산에 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피동물이다. 털가죽의 질이 좋아서 모피코트 가운데서도 최상급으로 친다.

만주 일대는 담비의 훌륭한 서식지였고, 만주 일대의 사람들은 담비를 사랑하는 포식자였다. 발해의 특산물로서 로마까지 유통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담비 코트가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만주 일대 소수의 부족들은 청에 특산품으로 바쳤고, 17세기 러시아에서는 재정의 10%를 담당하는 귀한 털가죽이었다. 최근에 이러한 담비의 교역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5~7세기, 소그디아나(사마르칸트)~쿠차~바이칼~치타~당나라 영주~발해상경용천부~연해주~두만강 하구~경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2의 동아시아 교역로를 ‘초피로(貂皮路)’를 통해 연구하자는 것이다.

특히 17세기, 만주에서 담비[초피]는 뜨거운 감자였다. 만주 부족민들이 청에 바쳤던 주요 조공품에 하나가 초피였다. 흑룡강 하류 유역의 부족민들은 영고탑(寧古塔) 장군[청의 동북 지역 최고 수장 영고탑 장군에게 공물을 납부했고, 그는 공물 수량을 점검한 후 북경의 호부에 보냈다. 이에 청 황제는 부족민들에게 쌀·술·소금·멥쌀·콩 등을 하사했다.

그런데 17세기 중반,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흑룡강을 따라 만주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청의 여진 지배력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1630년대 말 야쿠츠크(Yakutsk)의 러시아 카자크(kazak)들은 흑룡강 유역에 사람이 많고 땅이 비옥하다는 정보를 처음 접하고 동진하기 시작했다.

카자크는 수백 년 전 몽골이 러시아를 침공한 후에 러시아 남부에서 슬라브 등의 여러 민족이 융합하여 탄생한 아종족(亞種族, sub-race)이자 군사 집단이었다. 이들은 화기로 무장한 러시아의 용병으로서 담비 가죽을 찾아 끝없이 너른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개척한 드센 전사였다.

흑룡강 상류의 부족민은 용맹하기로 유명했지만, 러시아 카자크상대가 되질 못했다. 1644년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후 부족민들을 보호해 줄 청의 병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을 오르내리며 부족민들을 약탈했다.

러시아인들은 1650년 흑룡강 상류 지역에 알바진[雅剋薩] 요새를 세우고, 흑룡강 연안의 부족민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야삭'이라는 세금을 징수했다. 북경으로 천도한 청은 남명(南明)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상황이었기에 러시아의 침입은 또 하나의 골치가 아닐 수 없었다.

청은 순치제 시기(1638~1661) 에만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 수백 명에서 천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러전투는 만주지역 북방의 부족민을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 성격이 강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로 쟁탈전에 나선정벌이라는 이름으로 두 차례 파병하였다. 조선의 조총부대, 즉 화력부대는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1654년 제1차 나선[羅禪, 러시아의 음역]정벌에는 변급(邊岌)이 100여 명의 소총 부대를 이끌고 송화강 유역으로 출정하여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 무사 귀환하였다.

1658년 제2차 나선정벌에서는 신유[申瀏, 1619-1680] 장군 휘하의 300여 명이 청군에 합류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러시아 군대는 흑룡강 유역에서 완전히 축출당하였다. 나선정벌은 육지의 ‘명량’이라고 비유될 만큼 대단한 승전이었으며, 우리나라 해외 파병사에서 승리를 거둔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제2차 나선정벌을 이끈 신유는 행중기사(行中記事)인 일기문학 형식의 『북정록(北征錄)』을 썼다. 이는 신유가 1658년 4월 초에 조정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여 8월 27일 귀국하기까지 140여 일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기록 가운데, 다음의 내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4월 초. 흑룡강 유역의 왈가 지방이 러시아 수군에게 약탈당하니 신유가 청국의 요청으로 군사를 조발하다.

5월 2일. 아침 일찍 두만강을 건너 고나이령(古羅耳嶺)을 넘어 법순(法順) 땅에서 묵고, 영고탑을 향해 행군하다.

6월 10일. 흑룡강구를 지나 20여 리 지점에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다. 조선군 7인이 전사하다.

『북정록』에 따르면, 흑룡강 유역 왈가 지방의 민족이 러시아 군에게 수탈당하자, 청의 요청으로 우리 군이 파병되어 갔다는 내용이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이라는 지역을 지나 흑룡강가에 도착했다는 이동의 경로도 기술되어 있다. 신유 장군과 그의 병사들은 가장 북쪽 지방까지 간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그런데 ‘왈가’는 무엇일까?

개 부락, 사견부(使犬部)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인인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는 「차한 일기(車漢日記)」가 수록되어 있다. 차한은 당시 러시아를 일컫는 말이며, 신유 장군과 부하 배시황의 나선정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용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차한과 싸워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왈개(曰介)·개부락(介夫落)·퍅개(愎介) 등 세 나라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자, 청(淸) 나라에서 죄를 물으니, 세 나라는 모두 말하기를 차한[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어렵다고 하고 있다. 대국이 위엄을 보여 차한을 섬멸한다면, 대국은 소방을 구제하신 은혜가 있게 되고 소방은 사대(事大)의 정성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차한과 싸워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신유 장군은 러시아군과의 격전을 치르러 두만강을 건너 목단강송화강을 따라가 흑룡강에 다다랐다. 그의 부대가 경유한 목단강[후르카강, 만주어] 하류 유역과 송화강 하류 유역, 송화강흑룡강의 합류 지역에는 당시 후르카(hūrka), 인다훈 타쿠라라 골로[indahūn takūrara golo, 개를 부리는 부족, 사견부(使犬部)], 피야카(fiyaka) 등 다양한 부족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족과 언어 면에서 가깝지만, 다른 부족민들로, 청에 조공을 바치고 거주하는 소수민족이었다. 신유 장군은 이들 부족민을 각각 왈가(曰可), 견부락(犬部落) 혹은 개부락(介部落), 퍅개(愎介)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이 부족들을 아울러 혁철족[赫哲族, 허저족]이라 부른다.

가목사시 오기촌의 혁철족 문화촌

가목사시(佳木斯市)는 흑룡강성 동부, 송화강(松花江) 하류 연안 오수리강(烏蘇里江)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삼강 평원(三江平原)에 있다. 서쪽은 하얼빈[哈爾濱]과 이춘(伊春), 남쪽은 칠대하(七臺河)와 계서(雞西)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우수리강, 북쪽은 흑룡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449㎞ 떨어진 지역이다. 하얼빈에서 흘러 들어오는 송화강의란현(依蘭縣)에서 목단강과 만나 더 풍성해져 가목사시를 지나 흑룡강과 만난다.

가목사시 오기촌은 혁철족 집거지 가운데 하나이다. 혁철족은 명나라 말기 3부로 나뉘어져 있던 여진 가운데 하나인 야인(野人) 여진의 후손으로 송화강을 따라 위치한 의란현가목사시의 오기현, 흑룡강송화강이 합류하는 동강시(同江市) 등에 주로 거주하였다.

혁철족의 명칭은 과거에는 나나인(那乃人), 나니와(那尼卧), 나나(那乃) 등으로 불렸는데, ‘하유(下游)’ 혹은 ‘동방(東方)’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혁철족은 스스로를 ‘용일배(用日貝)’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본지인이라는 뜻이다. 현재 이들 민족을 총칭하는 '혁철'이라는 이름은 ‘혁진[赫眞, 동방의 사람], 기릉[奇楞, 강변의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이 동쪽에서 온 외지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혁철족은 본인들이 사는 곳을 원래부터 살았던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타칭과 자칭 사이의 큰 차이가 느껴지지만, 모두 강가에 거주했다는 공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000년에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혁철족 인구는 4,046명인데, 이들은 흑룡강성 외에 길림성에도 100명 이상이 살고 있다. 우리 한인이 오래전부터 만주 일대에 거주했던 것처럼 그들도 현재까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여름, 가목사시의 오기(敖其) 혁철 문화촌을 방문했다. 오기촌 앞에는 풍부한 수량을 뽐내며 송화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기촌의 '오기'는 물고기를 잡아들어 올리는 도구[손잡이가 달린 그물 채]의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강가에 형성된 마을과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해 온 혁철족의 문화를 상징한다.

이들은 추운 겨울에는 사슴 등의 모피 옷을 입었고 여름에는 연어나 잉어 등의 물고기 껍질을 가공한 옷을 입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청나라 시기에는에 이들을 어피달자(魚皮韃子)라고도 불렀다. 17세기 나선정벌에 나섰던 신유장군은 이들을 ‘견부락(犬部落)’ 또는 ‘개부락(介部落)’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겨울에는 개를 끌어 교통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북정록』에 유독 이 개부락이 눈에 띄는 이유는 그들이 장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했던 만주의 부족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러전투의 한 요인이었던 러시아로부터 핍박받던 부족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송화강가의 허저족 마을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를 잡거나 음식점을 경영하여 관광객들에게 물고기 요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우충미[尤忠美, 허저어 성명: 이오커러氏 구추구리. iokele hala gucuguli]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혁철족 전통 의상인 어피옷 제작법 전승자, 혁철족의 구비 서사시인 이마칸(伊瑪堪)의 계승자이자 샤먼 춤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공방에는 그녀가 직접 제작한 어피 옷과 어피 옷을 제작하는 기구, 박제된 담비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혁철족의 전통 노래를 만주어로 불렀다. 이어 그녀가 우리의 ‘도라지 타령’과 ‘아리랑’을 흥겹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족도 아닌 중국 소수민족이 우리의 전통 노래를 부르는 것에 매우 놀라웠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흑룡강성에 거주했는데, 아버지가 종종 손님들을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님들 가운데 도라지 타령과 아리랑을 불렀던 사람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그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족 손님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어느덧 세 살짜리 손주가 있는 할머니가 된 나이이지만 어릴 적의 노래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송화강흑룡강과 만나는 유역의 동강시(同江市)가진구향(街津口鄕)에는 원추형 주거 양식이 196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원추형 주거 양식은 건축과 철거가 용이하여 수렵 또는 어로 활동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동이 수월한 원추형의 이동식 가옥이다. 이러한 가옥의 형태는 우리나라 강원도 산간지역에 현재까지도 방앗간이나 창고 형태로 남아있다.

이 밖에 혁철족의 귀틀 다락형 구조 가옥도 우리와 같은 주거 형태이다. 지상에 나무를 수평으로 뉘어서 쌓아 올린 귀틀 다락형 가옥은 바닥을 땅에서 띄워 지상에 떠 있게 하는 주거 형태로 우리나라의 귀틀집과 같은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산간지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귀틀집인데 혁철족의 마을이나 백두산 기슭 조선족의 가옥에서 볼 수 있다.

여행객에게 숙식을 마련해주는 모습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만주 소수민족의 주거 형태와 우리나라 산간 지역 사람들의 그 모습이 비슷한 것 역시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혁철족의 주거 형태는 한민족의 시원적 주거 형태와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같은 공간에 오랫동안 어우러져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가 흘러내리는 장백폭포에서 시작된다. 장백폭포에서 발원하여 이도백하에서 송화강으로, 그리고 흑룡강으로 합류된다. 백두산으로부터 나린 송화강가에는 혁철족과 마찬가지로 우리 한인들도 오랫동안 거주해 왔다. 발해인으로, 만주의 소수민족과 융화되어 때로는 여진족으로, 송화강가에서 농사를 짓는 한인으로, 조선족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1658년 제 2차 나선정벌에 출병한 신유 장군과 그의 300병사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혁철족의 마을에 남아 혁철족 여인과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으며 함께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나의 공간에 살아가는 각기 다른 민족의 특수성과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 하나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 성해응,『연경재 전집(硏經齋全集)』, 권외 56 「차한 일기(車漢日記)」
  • 「만주·노령 지역의 한국인 이주」, (『한국 현대 문화사 대계』고려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원, 2010)
  • 이상근, 「제정 러시아의 연해주 경영과 한인 이주」(『사학 연구』60, 2000)
  • 이채문, 「한인의 러시아 극동 지역 이주와 만주 이주의 비교-이주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중심으로」(『한국 사회학회 후기 사회학 대회 발표문 요약집』, 2000)
  • 김성우, 「중국 동북 지역 소수민족의 원시적 주거 형식과 한국 주거와의 관계-혁철족, 악륜춘족, 악온극족, 달알이족, 몽고족을 중심으로」(『한국 건축 역사 학회 논문집』22-8, 2006)
  • 박경숙, 「식민지 시기(1910년-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한국 인구학』32-2, 2009)
  • 신주백, 「한인의 만주 이주 양상과 동북 아시아-‘농업 이민’의 성격 전환을 중심으로」(『역사 학보』213, 2012)
  • 권혁래, 「『북정록』과 나선정벌 노정 연구-회령~목단강시 구간을 대상으로」(『열상 고전 연구』37, 2013)
  • 이훈, 「17-18세기 청조의 만주 지역에 대한 정책과 인식」(『동양 사학회 학술 대회 발표 논문집』, 2013)
  • 고려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원(http://www.dbp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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