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白頭山과 朝鮮族의 삶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자연지명 | 백두산 |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세기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8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5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0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4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9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4년 |
| 자연지명 | 북한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백두산을 근거지로 살아가는 조선족 사람들의 이야기.
내두산촌은 안도현 이도백하진 동남쪽으로 약 116㎞ 떨어져 있다. 동쪽은 화룡시와 인접해 있고 남쪽은 북조선과 접경해 있다. 마을 서쪽의 두 산봉우리가 젖꼭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내두산촌(奶頭山村)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청나라 시기 백두산 지역은 만주족의 발상지로 지목되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금되었다. 사람들이 사사로이 들어와 사냥이나 채집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청조 말기 봉금정책이 해제되면서 한반도의 주민들이 백두산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1868년 함경북도 무산군 일대의 6~7호 한인들이 안도현내두산과 두도백하 일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황무지를 개간하고 작은 마을을 형성했다. 1908년 수백 호 한인들이 안도현에 이주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함경도갑산과 혜산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을 에돌아 내두산을 경유하여 산지 사방으로 이주해 왔다. 그 결과 내두산은 주요한 길목이 되었으며 늘 오가는 길손을 볼 수가 있었다. 1931년 70여 호의 한인들이 내두산에 이주 해와 비교적 큰 마을을 형성했는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모두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1935년 동북 항일 연군 제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는 부대를 이끌고 내두산에 들어와서 항일 유격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1936년 일본군의 대토벌로 인하여 항일 연군과 현지 한인들은 내두산에서 내쫓겼다. 그 뒤 내두산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일본 수비대는 1940년에 「치안숙정」 계획을 실현하고자 내두산촌에 무장 이민 부락을 세웠다. 당시 무장 이민단은 한창섭을 단장으로 하여 화룡현에 정착하였던 100세대의 한인들이 이끌고 내두산에 들어와 무장 이민 부락을 세웠다. 그들은 50정의 소총을 지니고 100마리의 소를 끌고 왔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후 내두산 무장 자위단은 해체되었고 대부분의 자위 단원들은 도망쳤다. 이후 1946년경 함경도갑산 일대의 한인들이 백두산 기슭을 따라 내두산에 이주해 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1954년에는 내두산 초급사가 세워졌고, 1959년에 이르러 이도백하 인민공사 내두산 대대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83년에 내두산촌으로 회복했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내두산촌에는 97호 정도의 농가에 473명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2014년 기준 54호에 100여 명 촌민이 살고 있다. 그중 한족이 8명이 살고 있다.
내두산촌은 사면이 높은 산들로 둘러쌓인 작은 평지에 위치해 있으며, 주위에 원시수림이 우거지고 마을 옆으로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삼도백하가 흐르는 경치가 수려하고 살기가 오붓한 산간 마을이다.
내두산촌 한인들은 백여 년 동안 백두산이란 성스러운 고장에 뿌리박고 민족의 고유한 풍속을 대대로 이어오면서 조용히 생활해 왔다. 한인이 내두산 지역에 처음 이주해 왔을 때에는 주로 사냥이나 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평지나 산비탈에 묵밭을 일구기 시작하였으며 삼도백하 물을 끌어와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이 촌에 경작지가 85㏊가 있었는데 그중 수전이 12㏊에 달했다.
비록 넓은 면적의 경작지는 아니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주요 농작물은 콩·벼·감자·옥수수 등이다. 이 고장엔 토스레 감자가 잘되는데 그 맛이 특별히 좋아 인근에 소문이 파다했으며, 안도현 사람들도 이 고장의 감자를 사 가곤 한다.
현재는 감자 대신 해바라기를 많이 재배한다. 지금은 야생 동물의 수렵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멧돼지가 많이 번식하여 여름에 감자가 열릴 때면 몇 날 밤사이에 모두 먹어 치우곤 한다. 멧돼지의 침입을 막으려고 촌민들은 떼를 지어 징을 치고 폭죽을 터트리면서 막아보려 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래서 감자 대신 해바라기를 재배하여 집마다 몇천 원 내지 몇만 원 내외의 수입을 벌어 들인다.
광복 이전 내두산촌 한인들은 주로 통나무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대부분 벽돌 기와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옛날 살림집 내부는 3간 내지 4간으로 된 외통집 위주이고 모두 온돌방으로 꾸며졌으며 천정이 낮았다. 지붕은 너와나 짚으로 이었으며 우진각 지붕이 보통이었다. 현재의 벽돌집은 다른 농촌과 별반 차이가 없다. 마을에는 지금도 5~60년 전에 지은 통나무 너와집이 몇 채가 있는데 3간으로 꾸며졌다. 소 외양간이나 창고는 집마다 통나무로 지었다. 땔나무는 겨울에 산에 가서 해오는데 장작을 패서 집 앞에 쌓아놓는다.
내두산촌 조선족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고유의 습속을 여전히 계승해 온 것이 특색이다. 온돌방에서 사는가 하면 생활용품은 소박하면서도 편리하게 배치했으며 방안을 깨끗하게 꾸미고 산다. 반찬으로는 장이나 김치가 일상적으로 올라오며 백두산에서 나는 산나물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겨울이 되면 집마다 메주를 쑤어서 천정에 달아놓는다.
내두산촌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된 후 조선족 소학교가 세워졌고 많은 학생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가 버렸다. 마을에는 중노년층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이 급속히 줄어들어 2002년에는 부득불 소학교는 폐지되었다.
내두산촌 조선족들은 대대로 짐승 사냥이나 산나물 약재 채집을 해왔었다. 부녀자들은 버섯·고사리·도라지·더덕 캐기, 남자들은 약재 채집에 나서는데, 특히 산삼 캐기는 그 조직이 잘 짜여 지켜야 할 규칙이 엄밀하여 독특한 산삼 캐기 풍속을 형성하였다. 내두산촌 조선족들의 산삼 캐기 풍속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채삼 계절은 대개 매년 7, 8, 9월인데 채삼꾼들은 혼자 산에 들어가지 않고, 3~5명 혹은 11~13명씩 짝을 무어 입산한다. 이들은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인솔자로 선발하여 계획적으로 채삼한다. 입산하면서 큰 고목이나 바위를 만나면 인솔자의 지휘 하에 제를 지내는데 갖고 온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별탈없이 산삼을 캐게 해달라고 정성스레 빈다.
입산할 때 매 사람이 나무막대기 하나씩 휴대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걷는데 수시로 나무막대기로 소리를 내어 규정된 신호를 보내 걷는 간격을 늘이거나 좁힌다. 삼을 발견하면 “삼밨다!”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모두가 모여서 정성스레 삼을 파내는데 한 가닥의 수염뿌리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산삼의 분배 형식은 보통 누가 발견하면, 그 발견한 자가 모두 가진다. 마을에 돌아온 후 삼을 소득한 사람이 잔치를 열어 채삼군들을 접대한다.
채삼하는 데 일정한 금기가 있는데 부녀자들은 채삼군 행렬에 들지 못하며, 혼자서 단독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탐욕스러워서는 안 된다. 현재는 부녀자들도 채삼에 나서는 데 남자들보다 눈썰미가 좋아 삼을 쉽게 발견한다고 한다. 내두산촌의 산삼 수입은 비교적 좋은데 운수 좋으면 한번 행차에 몇만 위안씩 챙긴다고 한다.
백두산은 먼 옛날부터 명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문헌에 따르면, 최초에는 불함산(不咸山)으로 불렸는데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이다. 백두산은 역사가 매우 유구한 곳이다. 중국의 주(周)·진(秦) 나라 시기에 숙신이란 고대 종족이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다.
그 전후로 읍루·물길·말갈·여진·만족 등 종족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주로 채집이나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이들은 보통 활이나 창으로 사냥하는데 호랑이 수달과 같은 진귀한 동물의 가죽을 중원 지구에 공급하곤 했다.
청나라 초기 만주족이 관내에 들어간 후 백두산 지역은 이들의 '용흥지지(龍興之地)'로 취급되어 거의 200여 년 동안 완전히 봉쇄되었다.
당시 조선의 일부 백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백두산 지역에 숨어들어와 짐승사냥이나 인삼 채집을 해왔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청조 정부가 점차 부패해지고 러시아가 수시로 침범하는 상황 속에서 백두산의 봉금정책은 점차 폐지되었다. 그 뒤 산동성 하북의 한족과 한인이 떼를 지어 이주해 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렵이나 채집업에 종사하였다.
내두산촌은 많은 산간 마을 중의 하나인데 19세기 말 이주 초기부터 수렵 생활을 해왔다. 광복 전 마을 한인들은 집마다 엽총이나 차꼬와 같은 사냥 도구들을 갖추었다. 20년도 전만 해도 마을에는 40여 정의 엽총이 있었는데, 산짐승 사냥 금지법령에 의해 공안 파출소가 몰수하였다.
현재는 옹노와 같은 기구로 몰래 사냥한다. 일단 걸리면 상당한 벌금을 내야만 한다. 그래서 사냥하는 사람이 드물다. 마을에는 '최포수'라 불리는 최석도(崔錫道) 노인이 있는데, 인근에 소문이 높은 명사냥꾼이었다. 그는 1920년 10월 25일 북한의 양강도 혜산군 보천면에서 출생하였는데, 1946년 3월 부모를 따라 가족들과 함께 백두산을 지나 육로로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한인 부락 내두촌에 왔다고 한다.
내두촌의 조선족 출신의 한 농부는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북한 인민군에 복무하면서 3등공도 세웠다. 그는 총을 잘 쏘는 재간이 있어 촌에서 그에게 사냥 임무를 주어 촌의 수입을 늘렸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가 내두촌에 시찰을 오면 그가 안내하여 주덕해가 사냥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최 포수한테는 세 번 곰을 잡으러 갔다가, 세 번이나 다치면서도 끝내 곰을 잡아 마을로 가져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그리고 한 번에 한곳에서 곰 네 마리를 연속 잡은 신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지난날 백두산지역 사람들은 봄철이나 여름철에는 농사에 바삐 보냈고 가을과 겨울철에 사냥을 주로 해왔다. 산짐승들은 종류와 크기에 따라 생활 습성이 달랐으므로 사냥 방법도 짐승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몇 가지 사냥 방법을 알아보자. 먼저 함정사냥은 깊은 구덩이를 파놓고 짐승들이 빠지게 하는 사냥 방법인데 비교적 보편화되었다. 이 사냥 방법은 짐승들의 생활 습성과 자주 오가는 길목 등을 이용하여 위장 시설을 만들어 놓아 짐승을 속여 함정에 빠뜨린다. 이런한 방법으로 흔히 멧돼지·범·곰·노루 등을 잡는다. 멧돼지나 노루는 가을철이 되면 감자·옥수수·콩·조 등 곡식을 먹기 위해서 산골짜기나 산등성이 밭에 자주 내려오는데 보통 산전에 내려오는 길목이나 밭 주변에 함정을 파놓는다. 함정은 깊이 2~3m, 넓이 2.5m 정도로 그리고 밑으로 내려 갈수록 넓게 파서 함정 벽이 안쪽으로 휘여 들게 만든다. 이렇게 하면 함정에 빠진 짐승이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한다.
다음으로 덫사냥은 짐승이 통나무발 밑에 깔리게 하여 잡는 사냥 방법이다. 덫으로 곰·멧돼지·범·노루 등과 같은 큰 짐승뿐만 아니라 오소리·너구리같은 작은 짐승도 잡는다.
세 번째 옹노사냥은 올가미로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잡는 방법으로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응용되었다. 올가미는 대개 보통 철사 삼노끈 명주실로 만든다.
네 번째는 차꼬사냥 방법이다. 차꼬는 창애, 차끼라고도 부른다. 차꼬는 강쇠의 탄성을 이용하여 짐승의 발이나 주둥이·목·꼬리 등을 물어 잡는 사냥 도구이다. 차꼬는 짐승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땅을 살짝 파놓거나 그냥 놓고 부드러운 흙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데 미끼만은 보이게 한다. 차꼬로는 꿩·토끼·오소리·너구리같은 작은 짐승 뿐 만아니라 여우·노루·멧돼지·곰·범과 같은 큰 짐승도 잡는다. 소 가죽으로 오리를 지어 끈을 만든 후 그물모양으로 아가리를 조일 수 있게 한 배낭. 입산할 때 사냥 기물이나 먹을 것을 지고 올라갔다가 짐승을 잡은 후 배낭에 넣어지고 내려온다.
마지막으로 엽총 사냥이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사냥 도구이다. 현재 사냥금지법령이 실시되어 사사로이 엽총 사용을 금하고 있다. 백두산 지역에서 사냥 금지가 실행됨으로써 지금 곰·멧돼지·노루·꿩과 같은 산짐승들이 득실거린다. 민간에서는 산을 둘러막고 멧돼지·노루를 인공적으로 사육하고 있으며 울타리를 만들어 곰·꿩도 사육한다.
전반적으로 수렵은 백두산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여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현재 이도백하진에서는 내두산촌을 생태 문화촌으로 개발하여 유람지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족의 고유의 생활 문화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범위에서 사냥 활동도 벌여 예전의 수렵 문화를 복구할 예정이다.
귀틀집이란 목재가 풍부한 산간지방에서 화전민들이 많이 지은 집으로 통나무의 양끝에 홈을 파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서로 엇물리게 포개어 벽체를 만들고 이 위에 지붕틀을 얹어 세운 집이다. 나무와 나무사이의 틈은 진흙으로 발라 메운다. 이 귀틀집은 틀목집, 평안남도 지방에서는 방틀집 또는 목채집이라 부르고, 울릉도에서는 투막집 또는 투방집이라고도 한다.
통나무의 뿌리와 가지를 치고 중등만 추린 다음 통나무를 차곡차곡 뉘어 쌓는다. 귀가 어긋나게 옭아 매어 쌓고 적당한 크기로 문을 만들고 창을 만든 후 지붕을 씌우면 통나무집이 된다. 이것을 귀틀집(말집)이라 부른다. 백두산 주변 마을인 수전촌과 내두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목재가 많아 집은 전부 나무로 되어있는데 벽체는 통나무로 된 귀틀집들이다. 집 구조를 보면 대부분이 웃방과 정지간이 있고 정지간 옆에 헛간이 있다. 방의 넓이는 3m이고 바닥높이는 벽면보다 0.5m 가량 낮다. 집안의 공간 높이는 2m 가량이며 웃방과 정지간 사이는 미닫이로 되어 있으며 부엌은 일반 민가의 부엌과 비슷하다. 출입문의 높이는 1.5m 정도 되어 집으로 들어가자면 허리를 굽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집의 벽체는 통나무 위에 흙을 바르고 그 위에 회칠을 하기도 한다. 헛간은 통나무를 쌓아서 만들었다. 수전촌의 집들은 앞뒤 마당이 크고 부속 채들이 많다.
마을 형성에는 음양풍수설이 고려되고 전통적인 생활풍속과 농업생산에 유리한 지점을 선택하였다. 마을 배치의 전형적인 지세는 배산임수이다. 마을 뒤에는 높은 산이 있어 겨울에 찬 바람을 막을 수 있으며, 앞이 트여 햇볕이 잘 들 수 있는 강변 위에 배치되어 있다.
단위 세대당 대지 면적이 타 지역 조선족 마을과 비교하여 넓은 저밀도 배치 유형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넓은 대지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텃밭과 주택동과 더불어 농산물 저장고, 축사, 화장실 등의 부속 시설이 배치된다. 이러한 귀틀집의 배치 특성은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 이는 혹독한 추위와 바람 등 자연 재해로부터 보호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도난에 대한 대비와 감시의 기능을 고려한 배치 특성임을 알 수 있다.
비교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담장은 가축을 보호하고 도난을 방지하려는 의도이며, 축사와 농산물 저장고를 주택동의 전면에 배치하여 바람막이의 역할을 하면서 감시에 유리한 시야 속에 배치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타 지역의 조선족 주거의 배치 유형이 주택동 위주의 구심적 배치임에 비하여 백두산 지역의 조선족 주택은 넓은 대지에 확산형 분산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과거의 한인[조선족] 주택이 그 내용 상에서 대가족제도와 유교적 전통에 의하여 설계되어 한인[조선족] 주택은 간수가 많고 각 방은 보통 낮고 좁으며 이층집이나 넓은 방들은 없었고 간막은 간살이 많아서 집은 평면적으로 퍼지게 되었으나, 이러한 전통적 배치 특성보다는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려는 기능적 성격이 강한 것이다. 저장의 기능이 중시되어 많은 종류의 창고와 저장시설을 확보하고 있다.
귀틀집의 기본 평면은 일실형이다. 즉 취사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이 일체형으로 결합된 일실공간으로 된 정지로 되어 있다. 조선족 주거 유형 중 방과 부엌의 두 공간으로 분리되는 남부형 민가보다는 두 개의 공간으로 함경도 지역에서 유래한 북부형이 많다. 남부형의 경우에도 면적 대비로 부엌이 더욱 확대되어 윗방과 고방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기능분화가 활발하지 못한 집중적인 평면형 식이 주된 형식이다. 보통 마당과 가마가 설치되어 있는 부엌과의 바닥 차이는 30㎝ 정도이므로 따로 계단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는다. 한국 북부형은 50∼70㎝가량 바닥 차이가 있어 모퉁이에 계단이 2∼3단 두는 것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유리한 단면을 혹한에서 지면과 가깝게 부엌을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산속에 간이로 지은 귀틀집은 지면에서 50㎝ 정도 낮은 마당을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취사와 난방을 겸한 형식이다. 즉, 부엌에 가마는 보통 3∼4개를 걸쳐놓는데 그중 1개는 한족 가마인 평가마를 설치하는데, 이는 부엌의 뜬 김을 말리는 화로역할을 하고 중국식으로 바뀐 식생활 문화에 적합한 요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불을 지피는 부스께는 한 곳으로만 되어 있어 집중된 화력을 한꺼번에 쓰도록 되어 있다. 아궁이는 내부에만 있어 혹한에서의 외부 생활을 최소화한다.
혹한과 긴 겨울에 대비하여 연료 절감을 위한 원시 형태인 수혈 주거 형식이 잔존하고 있다. 목재가 풍부한 산간지방에서 지은 집으로 통나무의 양끝에 홈을 파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서로 엇물리게 포개어 못을 사용하지 않고 벽체를 만들고 이 위에 지붕틀을 얹어 세운다.
나무 틈은 흙 바름으로 채운다. 기후적 특성으로 처마 깊이가 깊으나 하늘을 향해서 들린 형태를 하여 채광에 유리하게 하고 있으며 흙바름으로 단열 보온 성능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다. 또한 출입문 입구에 소극적이지만 마루의 형식으로 보이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여름철에 걸터앉거나 추수에 곡식을 말리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목재를 서로 엇물리게 포개어 벽체를 만들고 이 위에 지붕틀을 얹고 흙 바름으로 채운다. 지붕은 한족의 귀틀집이 맞배지붕임에 반하여 우진각 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택의 건축 재료, 조명, 취사 설비 등은, 난방 설비로서의 온돌과 취사 설비로서의 부뚜막을 연결하여 거기에 철제 가마를 걸고 나무와 석탄을 때여 음식을 끓이는 동시에 온돌을 덮히는 방법으로 난방도 하고 취사도 하는 것이다. 이는 혹한과 동물의 침입과 도난 등에 대비한 생활방식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긴 겨울에 대비한 충분한 식량 저장고를 확보하여 내부에서의 생활이 가능토록 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좌식 생활의 주 생활 양식이 한족의 영향을 받아 실내에 신발을 싣고 들어가는 입식으로 변화하는 일부 경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