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

한자 哈爾濱市 朝鮮人 民主 聯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하얼빈시 조선인 자치 조직
설립자 이광국|박진용 등
설립 시기/일시 1946년 7월
해체 시기/일시 1948년 4월 23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6년 7월 22일
최초 설립지 하얼빈시
정의

1946년 7월 북만지구 조선인 민주 연맹에 이어 만들어진 하얼빈시 조선인 조직.

개설

1946년은 국공내전 시기로 조선인이 아직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통일된 정책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6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동안 하얼빈시 조선 의용군 제3지대 사령부에서 ‘북만지구 조선인 민주 연맹’ 제1차 집행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의 결과로 22일 북만지구 조선인 민주 연맹이 하얼빈시에서 조직되었다. 북만지구 조선인 민주연맹이 조직된 직후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이 연이어 조직되었다. 주임에는 이광국, 위원에는 박진용, 이현준이 선출되었다.

1947년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에서는 조선인 거주 정황에 따라 하얼빈시 도리구에 9개, 남강구에 2개, 도외구에 1개 등 모두 12개의 분맹을 설치하였다. 각 분맹에서는 야학교를 통해 다양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고 각종 혁명 가곡을 보급하였으며, 다양한 오락회를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국 경찰, 일본 영사관 경찰, 국민당 특무 등 9명을 체포하였다.

당시 하얼빈시에는 무직자와 피난민이 몰려 이들로 인한 문제가 많았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주민 공작에 관한 결정’, ‘이주민 잠행 조례’를 반포하여 그들을 농업 생산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은 이러한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여, 조선인들을 농업 생산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은 1948년 4월 23일 해산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하얼빈 조선인회가 성립되었다.

설립 목적

하얼빈 시내의 조선인들에 대한 관리와 지위 향상 등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7년 초 하얼빈의 조선인은 약 6,000여 명으로, 이들 중 도리구에 4,000여 명이 살았다. 나머지는 성고자, 신향방, 고향둔, 동과수 등 하얼빈 교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에서는 조선인 거주 정황에 따라 도리구에 9개, 남강구에 2개, 도외구에 1개 등 모두 12개의 분맹을 설치하였다.

각 분맹에서는 야학교를 꾸려 조선인들에게 신민주주의 혁명의 성격, 토지 개혁 정책 등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각종 혁명 가곡을 보급하고, 다양한 오락회를 전개하였다. 또한 야학 모임을 이용하여 일제의 잔여 세력과 국민당 세력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만주국 경찰, 일본 영사관 경찰, 국민당 특무 등 9명을 체포하여 하얼빈시 공안국에 넘겼다.

당시 하얼빈시는 많은 무직자와 피난민이 몰리면서 도시의 치안과 사회 안정, 그리고 경제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얼빈시에서는 ‘이주민 공작에 관한 결정’, ‘이주민잠행조례’를 반포하고, 1947년 11월 22일부터 1948년 3월 24일까지 계획적으로 그들을 농업생산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하얼빈시 조선인 민주 연맹은 이러한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여, 거처할 곳이 없고, 직업이 없는 조선인들을 농업 생산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47년부터 조선인들의 경제 문제 등을 해결하는데 노력하였고, 1948년 하얼빈시 조선인회의 기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이전 TOP